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48)
>48 화>
“헤르타의 약점을 알려 줬잖아.”
밀라이언이 빠르게 대답을 찾아 냈다.
확실히 그녀 덕에 괜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약점을 찾기 위해선 마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포를 해야 했는데, 생포는 죽이는 것보다 더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 그 일 덕분에 과정을 한 가지 줄일 수 있었다.
“……그 값은 나중에 받기로 했는데.”
작게 웅얼거린 카리나의 목소리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멋지네요.”
“그런가?”
“네, 이런 곳을 제가 가질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서요. 반년만 쓰기엔 너무 아깝네요.”
덧붙여진 말에 밀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반년.
그 단어가 두 사람을 현실로 끌어들였다. 사실 지금 이 모든 것은 끝이 정해진 것들이었다.
언젠가 끝날 것들이었다.
밀라이언은 그녀에게 파혼 서류를 받았고 그녀가 머물기로 한 날은 정해져 있었다.
“백작저에 있기 싫다면 종종 와서 써도 된다.”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제 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다정한 사람이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자신을 배려해 주는 상냥함.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
“밀라이언한테도 새사람이 생길텐데 제가 멋대로 여기에 들락날락거리면 안 되죠.”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최대한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밀라이언에게서 답은 없었지만 굳이 그의 답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라 카리나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내일, 그 화방 주인이 다시 오기로 했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그에게 말하도록 해.”
“알겠어요. 전 여기에 조금 더 있다 갈게요. 먼저 가세요.”
카리나가 이젤 앞에 놓인 의자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도화지가 아닌 제대로 된 캔버스들이 화실 안에 가득했다. 관리가 잘된 듯 깨끗하고 새하얗다.
십 수 개는 되어 보이는 캔버스는 전부 백지였다.
밀라이언이 화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종긋거리고 있던 카리나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몸에서 힘을 빼곤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과분하다니까…….”
밀라이언도 선물도 그녀에겐 과분했다.
그가 주는 것들을 품에 끌어안고 끌어안아도 밀라이언은 자꾸 무언가를 얹어 준다.
그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그 행동들이 좋았다.
똑똑-.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리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꼭 닫힌 다락방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네.”
“페리얼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들어오세요.”
카리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좋은 오후네요.”
“아, 네, 그러게요.”
페리얼이 웃는 낯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건넨 인사를 가볍게 받아 친 카리나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윈스턴이라는 의원을 만났습니다.”
“아, 정말요?”
“네, 그러고 나니 이제 카리나랑 얘기를 하고 싶어져서요. 혹시 시간 되나요?”
“그럼요. 응접실로 갈까요?”
“아뇨, 여기가 적당합니다. 아무도 듣지 못할 테니까요.”
싱그럽게 웃는 페리얼의 미소 뒤로 후광이 떠올랐다. 실제로 그런 것까진 아니겠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의 미소는 정말 어떤 악의를 가진 사람도 호의적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게만 보였다.
“……예술병에 관한 이야기군요.”
윈스턴과 대화한 후에 찾아왔다는 것과 아무도 듣길 원하지 않는 것은, 분명 윈스턴에게 자초지종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페리얼은 칼로스 가문의 가주였다. 예술병이라면 자신보다 더 질리게 겪어 봤을 게 분명했다.
꿀꺽, 긴장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바싹 긴장한 카리나를 본 페리얼이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무해하게 웃었다.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카리나. 마치 내가 악인이 된 것 같잖아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알아요. 난 단지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카리나에게 예술병에 대해 좀 알려 드리고 싶을 뿐이고요.”
페리얼이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의자를 하나 덥석 안아 들고 와 카리나가 앉은 이젤 옆에 내려놨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페리얼이 빙긋 미소 지었다.
“윈스턴에게 카리나의 이야기를 좀 들었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카리나의 몸 상태에 대해서요.”
페리얼이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시작했다. 카리나가 허리를 뻣뻣하게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전부 말씀하신 건가?’
작은 서운함이 피어올랐다.
“참고로, 나는 카리나가 예술병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쪽에 걸렸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카리나의 경악한 음성을 들으며 페리얼이 쓰게 웃었다.
“다만 윈스턴이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아서요.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니 그를 탓하진 말아주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기록 때문이죠.”
“기록이요?”
페리얼이 닫힌 창문을 한번 보고 꽉 닫혀 잠긴 화실의 출입문을 한번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칼로스 가문의 역사는 제법 깁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예술병을 연구했지요. 그리고 그 안에는 당신과 같은 창조의 기적을 가진 예술가들도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는 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카리나로서는 들을 수 없는 종류였으니까.
“창조의 기적은 귀합니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권능이죠. 그 중에서도 카리나의 능력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당한 힘이요?”
“네, 생명체를 하루 이상 살려 둔 적이 있다고 하셨죠?”
“네.”
“기록상 최대로 살아 있었던 생명체의 시간은 대략 16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리나는 제게 평균적으로 24시간이라고 하셨지요.”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그런 기록까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자신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더욱 상상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애초에 저런 거대한 마수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기록도 없었습니다.”
“그게 뭔가 문제가 되는 건가요?”
페리얼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이 강대하다는 것은 그만큼 타고난 것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른 기적을 가진 예술가들과 다르게 창조의 힘을 가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공통점이요?”
“네, 모두 서른 살을 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단호한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페리얼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건 난센스 퀴즈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겪고 있는 삶 그대로였다.
그 삶을, 그 길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예술병이었나요?”
“네, 창조의 기적을 가진 이들을 ‘창조자’라고 하겠습니다. 칼로스 가문에 기록된 창조자들은 전부 예술병에 걸렸고 전부 목숨을 갉아먹는 종류였습니다.”
“……전부 예술 활동을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고 했죠?”
“네,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들 모두가 삶에 애착이 없었다고 합니다.”
카리나의 입술이 꾹 달라붙었다.
그의 색소 옅은 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진 채 자신을 향해 있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은데 혼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 겠지만.
“왜요?”
“글쎄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들은 광증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페리얼은 의자 등받이에 느릿하게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는 천천히 제 머릿속에 있는 칼로스 가문의 기록을 뒤적였다.
‘창조자’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았지만 그 모든 기록이 해괴하기 짝이 없어서 잊을 수가 없는 종류이기도 했다.
“자신이 창조한 것을 ‘유일한 이해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예민 해지고 감정적으로 되어가면서, 나중에는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쉬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흡, 카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커다랗게 뜨인 눈은 어제와는 다르게 투명하고 순도 높은 아쿠아마린처럼 빛나고 있었다.
페리얼이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뱉었다.
“비슷한 증상이 카리나에게도 있나요?”
“…….”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던 사실을 생판 남에게 들켜 버린 듯한 느낌은 과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광증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제 생명이 작품의 재료가 되는 것을 성스럽게 여겼고 기어코 제 피와 살을 재료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카리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필요하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소름이 돋았다.
“카리나.”
페리얼의 회색빛 시선이 카리나에게 닿았다. 카리나가 그 눈을 마주보다가 숨을 멈췄다.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턱을 된 그 눈은 다정하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것이 본모습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보였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선…… 당신이 내게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져야 해요.”
“…….”
“다시 물어볼게요, 카리나.”
페리얼이 긴장을 풀라는 듯 다시 옅게 웃었다.
“제가 말한 증상 중에, 이미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