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5)
>95 화>
콰앙-!
올 때만큼이나 갈 때도 거침없 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아직 반이나 남은 궐련을 깊게 빨았다.
‘……죽는다고?’
그런 것치곤 그다지 그늘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치 끝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런 병을 앓고 있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제 죽음이 얼마나 남았든, 죽을 시간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 팔을 잃는 것만으로도 그런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목숨이 저당 잡힌 심정은 어떠한 것인가.
‘……그럼에도 그림 도구를 사 갔어.’
놓을 수 없는 거겠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림이 생명을 갉아먹는다고 할지라도…….
달 밝은 밤인데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남자는 한참 만에 궐련을 끄곤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이미 없어진 왼팔이 아픈 것 같군.’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하루였다.
* * *
히이이잉-!
밀라이언이 뛰어내리자 말이 길게 울었다. 밀라이언의 거친 움직임에 꾸역꾸역 달려온 참이었다.
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제 위에 서 뛰어내린 주인에게 불만이라도 표하듯 한 번 더 운다.
“페리얼.”
페리얼 칼로스, 그 개새끼가 거짓말을 했어!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믿고 불렀다. 그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불확실하게 말함에도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감히…….”
다른 것도 아니고 그녀의 목숨을 걸고 제게 장난질을 쳤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건가? 페리얼과 친해 보였던 이유는? 윈스턴도 전부 자신을 속인 건가?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페리얼 칼로스는 어디에 있지?”
“……아까 전 카리나 영애께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장 지하실로 향하던 밀라이언이 걸음을 돌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에 눈앞이 새하얬다.
귓가에 이명이 울리는 듯 괴로웠다. 가장 괴로운 것은 지금 그와 카리나가 함께 있는 사실이었다.
밀라이언이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랐다. 체통이고 체면이고 유지할 여력이 없다.
그저, 그저…… 심장이 조이듯 아프고 숨이 멈출 것만 같아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만 같았다.
“……같아요. 그냥 이대로 떠나는 게 옳을 것도 같고.”
문손잡이를 붙잡은 밀라이언이 그 목소리 몸을 굳혔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떠난다고?
떠나겠다고?
누구와?
그녀는 대체…… 자신을 곁에 둔 채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페리얼, 난 죽어요.”
쿵-!
뛰고 있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잠시 고민 했다.
이것은 꿈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독한 악몽 인가.
발밑이 뻥 뚫려,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무저갱이 있다면 다른 곳을 찾을 것도 없이 이 방문 너머가 아닐까?
지독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 발작이 심해지고 통 증이 강해져서…….”
무너져 내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아팠다.
당장 쳐들어가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제게는 얘기해 주지 않는 그녀에게 괘씸함이 동시에 들었다.
“끝이 오는 게 느껴져요…….”
방문 너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아, 그녀가 울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이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방문 너머에 있을 것이 깊은 흉터가 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할 수도 모른 척을 해 줄 수도 없었다.
그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 * *
“흣…….”
밀라이언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뭉근한 통증이 가슴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근처에 있던 하론을 손에 쥐었다. 한 손에 쥐기엔 큰 돌덩이 같은 것이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품에 끌어안았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에 떨렸다.
또다시 통증이 밀어닥칠 거다.
속절없이 신음을 내뱉으며 괴로움에 발버둥 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싫어……’
싫었다.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물이 차올랐다.
아픈 건 싫다. 차라리,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 끔찍한 고통과 미칠 것 같은 충동에 서 벗어나려면.
한 번 오고 말 통증이면 차라리 괜찮았다.
언제 끝날지 아는 통증이면 차라리 나은 편이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그저 버티면 될 일이니까.
가장 두려운 것은 이 통증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번에만 해도 새벽에 시작된 통증이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몇 시간이나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숨을 죽이며 그저 통증이 가시길 기다렸다.
올 때마다 그저 그 시간이 밤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하론은 품에 안으면 분명 효과가 있지만 그걸 끌어안고 있어도 이제는 끔찍한 통증이 이어졌다. 하론이 막아 주고 있으니 더 큰 통증을 느끼라는 듯이.
“흐윽…….”
심장을 누군가 옥죄고 있는 듯 했다.
카리나는 이러다 제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 얼굴이 벌겋게 물들 때까지 숨을 참으면 그때는 통증이 덜했다.
심해지는 것은 다시 숨을 내쉴 때였다. 심장만 아프던 것이 요즘은 숨을 쉴 때마다 아파졌다. 아마도 숨을 쉬는 기관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점점 이렇게.’
번져 가고 번져 가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건가.
나중에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원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패악을 부리게 될 때가 올 게 분명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게 될 때가 올지도 몰랐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붓을 들고 그저 살기 위해 붓을 들겠지. 페리얼이 알려 줬던 여느 창조자들과 다름없이.
그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친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제 생명을 깎아 댔는지.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카리나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 막고 숨을 죽였다. 괜찮다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채 얼굴을 쓸어내렸다.
“카리나, 페리얼 칼로스입니다.”
“……페리…… 흐윽…….”
한마디 말을 하는 순간 누군가 갈비뼈를 부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가 심장을 부여잡은 채 끙끙 앓았다.
밖에서 소리를 들었는지 페리얼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문고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카리나, 실례하겠습니다.”
“흣…….”
대답할 힘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었고. 속절없이 열리는 문을 그녀가 침대를 나뒹굴며 가만히 바라봤다.
흐트러진 채 침대에서 밭은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본 페리얼이 황급히 문을 닫았다.
“카리나!”
“흐읍…….”
카리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통증이 몰려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라곤 그것밖에 없다.
생리적인 눈물이 그녀의 눈꼬리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가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밀라이언이 보고 싶은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비참하고 한심한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페리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 그지없다.
“발작입니까?”
“……흣.”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떠는 카리나를 보며 페리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론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저렇다는 건 그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는 거다.
‘재울 수밖에는.’
기껏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를 재우는 일 정도였다.
“밀라이언이 내게서 하론 하나를 뺏어 갔습니다.”
페리얼이 꺼낸 밀라이언의 이야기에 카리나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그녀가 웅크렸던 몸을 힘겹게 펴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맹목적이네.’
오로지 밀라이언만을 바라본다.
그가 뭘 해 줬다고 그렇게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그녀의 통증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분명했다.
페리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에 쓸 건지 모르겠네요. 연구용을 뺏어 가면 어쩌냐고 화를 냈더니 아예 돈을 주고 하론을 사 모아서는 연구실 한쪽 가득히 쌓아 주더군요.”
“핫…….”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카리나가 흐리게 웃었다.
얼마나 그녀가 밀라이언을 좋아 하는지 절로 느껴졌다. 페리얼의 표정이 어두웠다.
밀라이언의 이야기를 해 주자 카리나가 한 번씩 웃음을 흘렸다.
위태로운 겨울의 마지막 잎사귀처럼, 곧이라도 전부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미소였지만 그녀가 웃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카리나는 하론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그러진 얼굴과 꽉 악문 입술이 힘겨워 보인다. 그럼에도 아까보다는 혈색이 조금이나마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