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08
제107화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오
나현이 아무리 신속하게 처리했다고 해도 독의 건은 몰라도 무왕과의 비무 결과가 내 도착에 앞서 진소월에게 전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채 열 시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보가 정맹에서 우한을 거처 칠주봉에 이르는 데는 최소한 열여섯 시진이 소요될 터였다. 총 거리가 칠천 리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광의가 칠주봉에서 절곡까지 첩지를 가지고 오는 데 걸릴 시간을 감안하면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소월이 핵심적인 두 사안을 손에 쥐고 있으니 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비결을 캐묻기 전에 나는 머리를 굴렸다. 사술 같지만 분명 논리적인 해답이 있을 것이었다.
궁리는 짧았다.
알고 보니 간단했다. 일단 독의의 정맹 출현에 대한 정보는 진소월에게 전해졌다고 보아야 했다. 시간 상 몹시 빠듯하지만 나현이 최대한 서둘렀고 진소월이 광객을 칠주봉에 대기시켜두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진소월은 독의가 자발적으로 정맹을 찾아온 이유를 추론해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와의 면담이 이루어졌으리라 예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무왕과의 비무에 관해서는 넘겨짚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현이 전서구나 전서응보다 비행속도가 세 배쯤 빠른 영물을 동원했거나 진소월이 만리경으로 태평전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지 않은 한 절대로 알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둘 다 터무니없는 가정이니 진소월은 짐작으로 알아맞힌 것이었다.
나는 씩 웃었다.
‘다 알고 있다오, 소월.’
진소월도 빙긋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전 가가.’
뜨끔했다. 틀렸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뭔 수로 두 정보를 알아낸 걸까.
궁금증을 풀려면 진소월을 닦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질문에 답해주오, 소월. 첫째,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소? 둘째, 그게 오답이라면 정답은 뭐요? 미리 경고하는 데 에둘러가거나 나를 놀리는 건 용납하지 않겠소. 그러면 바로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겠소. 언제 돌아올 지는 기약할 수 없소. 장담컨대 아무리 소월이라도 그곳이 어딘지는 상상도 못할 거요.”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이 동그란 한숨을 토해냈다.
“연인에게 그렇게 협박을 해도 되나요?”
“둘러가지 말라고 했소. 또 딴 소리하면…….”
진소월이 내 소매를 잡았다.
“아이, 참.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요? 알았어요, 얘기할 게요. 전 가가는 그제 독의가 정맹에 나타났다는 나 대인의 첩지를 받은 내가 그 후사를 추론했으리라 보았을 테죠? 무왕 어르신에 관해서는 전 가가의 무사귀환 자체를 그 어른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거로 삼아 내가 대충 짐작했을 거라 여겼을 테고요. 아닌가요?”
나는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그게 아니었소?”
“당연히 아니죠. 전혀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진상은 너무나 단순해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
“어머? 삐쳤어요?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전 가가를 놀리려던 의도는 없었어요. 진실이라는 데 내 새끼발가락을 걸 게요.”
짐짓 안면을 일그러뜨렸던 나는 진소월의 장난스러운 언사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구려.”
“나는 나 대인에게 부탁했어요. 이번 행사의 경과를 실시간으로 알려달라고. 그래서 하루에 네 번, 그러니까 세 시진마다 한 번씩 전서응을 받았어요.”
진소월이 의문점을 제기하려는 내 말을 막았다.
“물론 그 조치만으로는 무왕 어르신과의 비무 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을 테죠. 아니, 불가능했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한 걸까요?”
나는 답을 찾아냈다.
“우한을 경유하지 않고 원중에서 곧장 칠주봉으로 전서구를 날린 게로군.”
진소월이 빙그레 웃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웠지만 심술이 났다.
“쳇, 아무 것도 아니었군.”
“그렇다고 했잖아요.”
더 거론해봐야 내가 바보임을 자인하는 꼴이 될 터이기에 그냥 넘어가려다 뭔가 찜찜했다.
“좀 전에 말한 내 행선지 말인데, 혹시 그것도 알고 있소?”
“몰라요. 상상도 못할 거라면서요?”
“그러지 말고 말해보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아니 맞히지 못하면 나갈 거요.”
진소월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너무 빤하잖아요. 명교(明敎)가 아니면 어디겠어요? 자, 이제 장난은 그만 하고 이번 행차에 대해 상세하게 들려줘요. 내 질문공세도 각오해야 할 거예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아, 그 전에 입맞춤부터 할까요? 내 정신 좀 봐. 왜 그 중요한 환영 절차를 까먹었지?”
진소월이 팔을 들어 올려 내 뒷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녀에게 굴복해 입술을 내주었다. 그녀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여자였다.
* * *
나는 독의와 나누었던 대화를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다. 그녀의 반응은 시작부터 탄성의 연발이었다. 괴선이 원상회복될 수 있다는 말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그녀는 정작 자신에 관련한 대목에서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좋아서 까무러칠 거라 기대하고 있던 나는 맥이 빠졌다.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선심을 베풀 리가 없는데, 무슨 속셈일까요?”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뒤로 미루었다.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보다 어째서 내게 말을 하지 않았소?”
“뭐를요?”
“그대로 두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말이오. 독의 말로는 길어야 이삼 년이라던데. 그보다 짧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고.”
“…….”
“몰랐다고 하지는 마오. 그럴 리가 없음을 아니까.”
“내가 말한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전 가가에게 괜한 심려만 끼칠 뿐.”
“그렇더라도 얘기를 했어야 하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오. 내가 시한부 생명임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내 급사라는 날벼락을 맞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소?”
“……전 가가 말이 맞아요.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소월을 탓하자는 게 아니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요. 소월의 사정도 모르고 무공일도 운운하며 내 욕심만 챙겼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
“전 가가 잘못이 아니에요.”
“나를 배려한 처사임을 알지만 앞으로는 감추지 말았으면 하오. 그런 중대사를 모르고서야 어찌 연인이라 할 수 있겠소?”
진소월의 눈망울이 물기로 젖었다. 내가 ‘연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처음일뿐더러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나는 절대무적의 초인이 된 이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녀를 정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진소월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는 오래전 털보아저씨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저 얼간이들의 주접은 귀담아 듣지 말거라, 충아. 물건이 크니 어쩌니, 잠자리에서 여인을 녹이는 방중술이니 뭐니 다 개소리일 뿐이다. 모름지기 사내란 여인을 감동시킬 줄 알아야 한다. 감동에 겨워 눈물까지 흘리게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사내가 되는 게다.’
아! 내가 이 방면으로도 최고임을 비로소 알았다.
* * *
나는 치유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임을 진소월에게 알려주었다.
“괜찮아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고 하던가요?”
그녀로서는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귀빈전에서는 ‘여러 변수’를 들먹이며 확답을 하지 않았던 독의는 내가 정맹을 떠나기 직전 약왕전에 들렀을 때 끝까지 답을 종용하자 마지못해 선을 제시했다.
“이론적으로는 백 년도 가능할 거라고 했소.”
대번에 진소월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서 뒷말을 잇기가 괴로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십 년이 한계일 거라고 합디다. 물론 소월의 상태와 체질, 그리고 정신력의 수준에 따라 기한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는 두었소.”
진소월은 낙담의 기색을 드러내는 대신 미소로 나를 위무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전 가가. 마치 횡재한 기분이에요. 십 년이라니.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올해도 넘기지 못할까봐 두려웠어요.”
가슴이 철렁했다. 그토록 심각했단 말인가.
분위기가 우중충해지기 전에 진소월이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가 이 은혜에 대해 요구한 반대급부는 무엇이었나요?”
“내 몸을 연구하게 해달라고 합디다.”
나는 독의가 쏟아냈던 장광설을 기억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진소월에게 전했다.
내 전언을 곱씹던 진소월이 미간을 모으며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이 거래를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살겠다고 전 가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나는 진소월의 말을 잘랐다.
“그럴 순 없소. 설혹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마오.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오.”
나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기에 진소월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독곡에 가신 소 대인을 불러오는 게 좋겠어요.”
갑자기 점박이 노인은 왜 부른단 말인가. 진소월의 의중을 헤아리던 나는 무릎을 쳤다.
“알겠소! 독의는 나를 이모처럼 만들 작정이군.”
“확실치는 않아요. 하지만 그가 ‘치유력’을 거론한 데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며 ‘피’를 언급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커요. 내 생각에 독의는 이미 이모와 같은 독강시를 제조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비영 말이군.”
“맞아요. 그, 아니, 그녀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이는 경공 외에는 보여준 게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장공을 쓰면 정체가, 그러니까 독인이라는 정체가 탄로 날 터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복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강시 특유의 면상을 감추기 위해서일 거예요.”
“비영은 독의를 짝사랑해 쫓아다니는 이가 아니라 그의 작품이자 호위이자 종이었군.”
“확언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도 이모처럼 이지를 상실했을 테고요. 오로지 독의의 명만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독의는 무인이자 의원일뿐더러 술사이기도 하겠군.”
“맞아요. 그래서 소 대인이 필요한 거죠.”
* * *
진소월의 분석과 예측이 옳다면 점박이 노인은 크나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는 자기가 단순히 뛰어난 술사가 아니라 천하제일술사라 단언했다. 허풍일 수도 있겠지만 이모의 경우를 보건대 상당한 실력자임은 분명했다.
점박이 노인에 따르면 실혼인을 말 잘 듣는 개처럼 만드는 데는 지난한 과정과 다대한 수고, 그리고 탁월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독의가 연구를 빌미로 내게 수작을 부릴 시 금방 알아채고 견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점박이 노인이 독의보다 상위의 술사라고 가정할 시 역으로 그를 제어해 충복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우리는 독의와의 암투에서 비장의 패를 쥐게 되는 셈이었다.
* * *
나는 무왕과의 비무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진소월은 내가 생략한 내용들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내 조언을 따르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이 적중되어 속이 상하지만, 전 가가의 판단과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그냥 넘어갈 게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간을 졸이는 내 생각도 해줘요.”
“노력해보겠소.”
모범적이지만 무성의한 응답에 진소월이 고소를 지었다. 무왕에게 충격을 주었던 해왕도의 신녀에 관해 말하려던 나는 순서에 따라 주천 백가와 보성 현가의 인사들과의 면담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다. 부용아씨의 방문 청에 대해 듣더니 진소월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