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54
제153화 다음에 다시 나를 만날 때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비로를 통해 나현의 장원을 나온 나는 예정을 바꿔 우장산맥으로 향했다.
가면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중원대륙 중앙에 장장 육백여 리에 걸쳐 뻗어있는 대산맥은 나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소중한 친인인 광객을 처음 만난 곳이거니와 그 이후 검황자를 데리고 유람하듯 다녀간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무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무왕의 춤사위를 목도한 곳으로서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땅이었다.
나현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낭왕으로 추정되는 이는 공교롭게도 재작년 가을 괴선과 광객이 일생일대의 격전을 치렀던 불귀곡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했다.
사시사철 시독이 깔려있다는 괴담으로 인해 그 삭막한 골짜기는 평소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 금지(禁地)이지만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하려고 근방을 배회하는 산인(山人)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열흘 전부터 불귀곡에서 마치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렸다고 증언했다. 화약을 터뜨린 폭발음이 아니라면 무인들의 수련에서 파생된 기음일 터인데 그 정도 크기의 소리를 내려면 십왕 급의 절대고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나현의 판단이었다.
나현이 오후 늦게 그 정보를 받자마자 내게 보낼 첩지에 기록했다니까 지금쯤이면 사벌도 유사한 정보를 쥐고 있을 공산이 컸다. 나는 그들이 불귀곡에 사자를 보내기 전에 선수를 칠 작심이었다. 낭왕의 비중으로 보아 사왕이 친히 나설 가능성도 상당했지만 일단은 부딪쳐보기로 했다.
* * *
동천에 반짝거리는 샛별이 일출이 머지않았음을 알렸다.
거대한 산맥은 어둠과 눈에 덮여 있었다. 환상적인 설경에 눈길을 주지 않고 바삐 비행하던 중 운해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높이가 무려 일천이백 장에 달한다는 천주봉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우장산맥의 최고봉이 아니라 그 옆에 마치 시종처럼 낮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봉우리에 가서 박혔다. 작년 겨울 끝자락 무왕의 심득을 친견하는 기연을 누렸던 호천봉이었다.
그날의 격동이 기억에 생생했다. 하늘을 날아오를 듯했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왕에게 스승으로 삼은 이와 이모를 잃을 것도 모르고.
불귀곡 어귀에 접어들며 나는 뇌리를 잠식한 우울함을 억지로 떨쳐냈다. 심신 모두 최상의 상태로 강적과 조우하고 싶어서였다.
심호흡을 한 후 골짜기에 들어섰다. 기감을 최대한 확장했지만 아무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폭이 일이 장에 불과한 좁은 골짜기를 이백여 장 나아갔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난데없는 벽력성이 귀청을 때렸다. 석벽도 지진이 난 것처럼 울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낭왕이 확실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의 깃발이 석벽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는 소리였다.
기척을 지우고 소리의 진원지로 접근했다.
낭왕이 언제쯤 내 도래를 알아차릴지 궁금했다. 오륙십 장쯤 전진하니 연신 지축을 울리던 굉음이 뚝 그쳤다. 그러고는 불명료한 발음의 질문이 날아왔다.
“누구냐?”
나는 대답 대신 전속력으로 경신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장의 거리를 지우고 협곡을 빠져나가자 불룩한 공터가 나왔다. 채찍 같은 깃발을 단 깃대를 든 괴인이 공터 한 가운데 서있었다.
나를 본 낭왕이 흠칫거렸다. 그러기도 잠깐, 그가 다짜고짜 깃발을 휘두를 기세이자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멈추시오. 붙기 전에 얘기 좀 합시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는 않았으나 낭왕은 출수도 자제했다. 좋은 징조였다.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두리번거릴 거 없소. 나 혼자 왔으니까.”
“정말이냐?”
“그렇소.”
낭왕의 독안(獨眼)에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내 광환에 터졌던 그의 우안은 흉측하게 아물어있었다.
“두 달 가까이 이런 험지에 머물러 있었소? 보아하니 부상은 다 나은 모양이구려.”
낭왕의 면상이 일그러졌다.
“너는, 어떻게…….”
나는 낭왕이 얼버무린 뒷말을 이어주었다.
“이렇게 멀쩡하냐고? 뭐, 남들보다 월등한 회복력 덕분이오. 그래도 그날 당신 깃발에 꽤 심하게 다치긴 했소. 대단한 솜씨였소.”
내 말을 조롱으로 받아들였는지 낭왕의 낯짝이 더 구겨졌다.
“이번엔 진짜 죽여 버리겠다.”
나는 다시 손을 내밀어 급전으로 치달으려는 낭왕을 제지했다.
“진정하시오. 아직 얘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소.”
“……무슨 얘기?”
나는 단도직입했다.
“한판 거하게 싸우고 나서 나하고 손을 잡읍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던지 낭왕이 송곳에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충격을 추스른 낭왕이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개소리냐?”
흐음. 이런 표현은 어디서 배웠을까. 엉뚱한 호기심을 누르며 나는 낭왕을 꼬드기는 데 전념했다.
“사왕, 그 늙은이는 격전 중에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소. 당신 동네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전장에서 전우를 그런 식으로 배신하는 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와 동급으로 취급받소. 당신도 그 늙은이를 믿을 수 없기에 쫓아가지 않은 것 아니오?”
“…….”
“그렇다고 빈손으로 당신 동네로 돌아가는 건 체면이 말이 아닐 테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이런 데서…….”
“닥쳐라! 내가 여기 머문 까닭은 순전히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러지 않아도 조만간 찾아가려고 했는데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잡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덤벼라. 눈들을 뽑아버린 후 네 몸뚱이도 다시는 붙지 못하게 갈가리 찢어주마.”
낭왕의 중원어가 의외로 유창해 놀랐다. 지난번에는 일부러 어눌한 척 한 건가? 이역의 제왕은 내 호기심을 유발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시오. 그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았잖소? 전력의 확연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전장을 지켰소. 내 전우를 보호하며. 당신이 나와 한편이 되면 당신에게도 그럴 참이오.”
“…….”
낭왕은 여전히 적의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그의 관심을 끌었음을 알았다. 과연 그는 미끼를 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너와 손을 잡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이로써 협상의 물꼬가 텄다.
뜸을 들여 낭왕의 기대감을 끌어올린 후 나는 준비했던 답변을 꺼내놓았다.
“차후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당장 보장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요. 첫째, 내 우정. 둘째, 당신 나라와 중원 간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교류.”
낭왕이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냐?”
“그렇소.”
“땅은?”
“무슨 소리요?”
“사왕은 명교 영토의 절반을 준다고 했다. 나아가 훗날 정맹을 멸하면 그들이 차지한…….”
“말을 끊어서 미안하오만, 더 들어줄 수가 없구려. 그 개소리를 믿었소?”
“…….”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백 번 양보해 그 늙은이가 약속을 지켰다고 칩시다. 명교는 중원의 동북방에 자리하고 있소. 당신 동네와는 정 반대쪽이지. 설령 당신이 신민을 이끌고 수만리를 가로질러 거기에 들어도 정착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오. 바다를 제외한 삼면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을 테니까. 아니, 해왕도도 집중적으로 당신들을 노릴 테니 사방에 강적들을 두는 셈이 될 테지.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애당초 사왕이 당신에게 그 땅을 내줄 리 만무하니.”
낭왕의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보채지 않고 그에게 고민할 시간을 허락했다.
장고 끝에 낭왕이 미련을 보였다.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최소한 서천의 일부라도 다오.”
나는 정색했다.
“불가하오.”
낭왕의 안면이 다시 우그러졌다. 그가 발작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정녕 모르겠소? 당신을 속일 양이면 나도 얼마든지 그럴싸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소. 그러지 않는 건 한편으로는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그리고 내가 보장한 두 가지도 결코 가벼운 보상이 아니오. 나와 좋은 관계가 되면 내가 향후 대륙을 일통하더라도 당신들은 중원의 침공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잖소? 그것만 해도 어디요?”
낭왕의 입이 헤 벌어졌다. 어이가 없다는 뜻인지 대륙 일통 운운하는 내 웅대한 포부에 감화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 솔직히 전자일 것 같긴 했다.
“내가 당신을 찾아와 제휴를 제안하는 건 당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오. 나는 나처럼 싸우는 이는 처음 보았소. 당신의 통치가 내 이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었소. 만약 당신이 무자비한 폭군이었다면 아무리 개인적인 호감이 생겼더라도 결코 손을 잡지 않았을 거요. 그저 훌륭한 적수로 대했을 테지.”
속에 있는 말들을 다 쏟아낸 나는 낭왕의 결정을 재촉했다.
“자, 이제 답을 주시오. 어쩔 참이오?”
별안간 늙은이의 양물처럼 축 늘어져 있던 깃발이 빳빳이 서더니 바람도 없는데 펄럭펄럭 나부끼기 시작했다. 낭왕이 내기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네가 간과한 점이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번(幡)에 목이 달아난다면 천하통일은 몽상으로 끝나게 될 터. 어쩔 테냐?”
나는 씩 웃었다.
“바로 그거요. 나는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귀중한 전우를 얻기 위해 준비가 덜 되었음에도 모험에 나선 거요. 이렇게 합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백 초만 겨룹시다. 그 안에 나를 제압한다면 당신 처치에 맡기겠소. 뭐, 그 전에 아예 숨통을 끊는데도 할 말 없고. 하지만 일백 초 이내에 나를 어쩌지 못한다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오. 다음에 나를 만날 때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아무리 중한 부상을 당해도 명줄만 붙어있으면 나는 회복될 것이고 더욱 강해질 거요. 그리고 일체의 협상 없이 불문곡직 당신을 짓뭉갤 테요.”
내 광오한 선언에 하나 밖에 없는 낭왕의 눈동자에 기광이 일렁거렸다. 분노의 불길일까? 아니면 황망함의 표출일까? 왠지 둘 다 일 것 같았다.
기실 일백 초는 과수였다. 원래는 오십 초를 염두에 두었더랬다. 즉흥적으로 초수를 바꾼 건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었다. 고질병이 재발한 것이었다. 사정을 알면 열에 아홉은 미쳤다고 할 터였다.
하지만 내 호언은 뜻밖의 효과를 낳았다. 허장성세인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낭왕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전면전을 자제하고 신중한 탐색전을 꽤 오래 지속한 것이었다.
덕분에 삼사십 초를 번 나는 횡재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되면 애초의 구상과 별 차이가 없어진 셈이었다. 다만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솟구칠 깨달음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초반의 공방전에서 낭왕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한 승부를 이어간 탓이었다. 물론 이 백중지세는 낭왕이 삼 푼의 여력을 아낀 결과였다. 반면 나는 여유를 가장했지만 초장부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응전하고 있었다. 낭왕이 본색을 드러내면 대번에 열세에 처할 터였다.
과연 오십 초에 접어들 무렵 낭왕이 서서히 전력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내가 신법을 발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회피 위주의 전술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일백 초가 경과할 동안 버텨야 했다.
중상을 입더라도 운신불능에 처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낭왕은 초수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일백 초 이후에도 그가 계속 살수를 펼친다고 한들 비난하기 어려웠다. 그런 경우엔 도주가 유일한 대책이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경신이 가능한 상태여야 했다.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낭왕과 접전을 벌이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혼란스러워졌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