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처음이었다.
뭐가 처음이냐면 자신이 진정한 검술을 배우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가문의 검술을 배워도, 유실되어 희미해진 검술을 베끼는 정도였기에 사실상 무의미했다.
그런데 이안 아이넬과 함께하는 요 며칠간, 가로 막혀 있던 인생의 벽이 뚫린 기분이 들었다.
동갑임에도 묘하게 어른스럽고, 다섯 원석으로 뽑힐 정도로 마나도 많으며, 둠베스트를 이기는 검술 실력도 가지고 있다.
평민임에도 가장 눈에 띄는 아카데미의 이단아.
그런 그가 일레인 가문에 대해 알고 있다.
마차에서 내 외모를 보고 바로 일레인 가문인 걸 눈치챘고, 유실된 검술에 대해서도 무언가 아는 말투였다.
물어봐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고 오히려 절대로 따라 할 수 없을 법한 화려한 검술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알겠어.’
숨기고 있는 건 알겠지만,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나 친절이 거짓된 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샬롯은 선택했다.
이안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일레인과 관련이 있더라도 일단은 배울 수 있는 걸 배우겠다고.
부족한 자신과 일레인을 위해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보여도 당장에는 눈을 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애초에 친구를 의심하는 건 샬롯의 성격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후훗.”
그것만으로도 샬롯 일레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당장이라도 이안 아이넬과 함께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
운동장의 흙먼지가 규칙적으로 흩날린다.
바람이 마침 샬롯 쪽으로 불어와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는 이안을 찾았다.
운동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서 다리를 떨며 책을 읽고 있는 이안 아이넬.
처음 봤을 때는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는 은발이 신비롭다 생각했으나, 의외로 그늘이 진 얼굴과 합쳐지자, 이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초췌했다.
고작 하루 만에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초췌했으며, 자신이 다가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그대여, 미녀와 진리는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다. 처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진리를 속삭여라 by 테르토나 샤이먼.
슬쩍 몸만 기울여 곁눈질로 본 책 내용.
‘연애 관련 책인가?’
미녀와 처녀?
사랑?
답지 않은 책을 다 보는구나 싶었다.
‘뭐, 그럴 수 있지.’
입학한 지 닷새가 되어가는 시점.
듣고 싶지 않아도 벌써부터 누구랑 누가 사귄다는 얘기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명문 귀족가에서 모인 귀공자와 귀공녀들.
그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를 망각하고 둥지를 떠난 동물이 배우자를 고르듯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간을 보고 있었다.
물론 샬롯 같은 경우는 워낙 급한 일이 많다 보니 연애 쪽은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레인 가문은 검술을 잃으며 몰락하기 시작했고 300년이 지난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꽤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장에는 괜찮았으나, 한 달 뒤에는 학식 중 가장 저렴한 감자 샐러드만 입에 넣어야 할 수도 있을 정도.
연애 따위보다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샬롯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생도들의 노골적인 생활을 까놓고 표현하자면 배부른 돼지들이 번식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꼴과 썩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잠깐 기다려 줄까.’
뭐, 이안 아이넬도 얼굴 자체는 꽤나 반반한 편에 속하니까. 평민이 귀공녀들과의 로맨스 정도는 꿈꿀 수 있지.
“…….”
탁탁탁탁.
거세게 떨고 있는 다리에서 나오는 소음 사이로 간질이는 봄바람이 운동장 표면을 부드러이 어루만지고 간다.
훈련 중인 다른 생도들의 기합과 목검과 목검이 맞닿는 타격음.
이런저런 소리가 자연히 어우러져 샬롯의 귀에 들어왔으나, 그럴수록 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건 반대로 들리지 않아서 이상했다.
‘왜 책을 안 넘기는 거지?’
책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집중하고 있으면서, 샬롯이 이곳에 오고 지금까지 단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놓친 건가 싶어서, 샬롯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슬쩍 몸을 기울여 책의 내용을 살폈다.
– 그대여, 미녀와 진리는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다. 처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진리를 속삭여라 by 테르토나 샤이먼.
“…….”
그대로였다.
내용은 여전했다.
“흐으으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안 아이넬은 깊은 묵직함이 깃든 신음을 흘렸다.
물론, 이건 오해였다.
이안 아이넬이 지금 보고 있는 부분은 ‘매개체와 소환마법의 상관관계’와 ‘거짓된 매개체를 구분하는 10가지 방법’이란 난해한 부분이 적혀 있는 곳이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
저자가 걸어둔 보안마법 때문에 책을 처음 본 샬롯에게는 첫 문구만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쯤 되니 샬롯은 이안이 저 문구에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구나 싶었다.
그게 5분이 더 지나고.
10분이 더 지나고.
“수첩…… 수첩이랑 펜이 필요해.”
책 내용을 필사하려는 이안 아이넬을 보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거리를 벌렸다.
“처녀를 유혹하는 마법적인 언어가 떠올랐니?”
샬롯이 지독한 비아냥을 담아 말하자, 집중하고 있던 이안 아이넬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샬롯과 눈을 맞췄다.
품에서 수첩을 찾던 모습 그대로, 샬롯을 바라본 이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책을 덮으며 말했다.
“뭐야, 왔으면 말해주지.”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뻔히 보이는데 저렇게까지 태연한 척하며 말하다니….
벌써부터 수많은 생도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아이는 떡잎부터 다르구나 싶었지만, 샬롯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뭐라고?”
이안은 집중하느라 샬롯이 했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옆에 두었던 목검을 집어 들며 물었다.
“아니, 연습이나 하자고.”
이런 애랑 같이 검을 휘두르는 걸 기대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샬롯이었다.
* * *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
“흐음.”
의자에 앉아서 골치 아픈 책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다.
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두 녀석 역시 심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열심히 하자고 해놓고. 왜 오늘은 또 거리를 두지?”
“그래도 훈련은 같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나가 손을 번쩍 들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그래, 맞아. 근데 자세를 고쳐주려 가까이 다가가면 바로 뒷걸음질 치던데?”
“으음, 검을 배울 때는 가능하면 직접 자세를 교정해 주는 편이 효율적인데요.”
“허, 요즘 애들은 이해가 안 돼.”
내일도 또 이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싶어서 애들한테 상담하고 있는데, 썩 좋은 답은 나오지 않는다.
같은 여성인 한나라면 뭔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도 더 기사다운 그녀였기 때문일까.
소녀의 감성은 뒷전이고 검을 배우는 효율적인 측면을 계속 지적하고 있었다.
“너는 어떠냐?”
아까부터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넬슨에게 물어보자, 녀석은 천천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사랑, 아닐까요?”
“……?”
그 말에 옆에 있는 한나가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눈으로 넬슨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헛웃음 치며 답했다.
“멀어서 걔가 나한테 보여준 표정을 못 봤구나? 야, 근처 똥개한테도 그것보단 친근하게 대해줄걸.”
“단장한테 감히……!”
내가 무시당했다는 걸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는 한나. 넬슨도 그게 아니면 모르겠다면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하아, 요즘 애들은 어려워.”
“제 후손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단장한테…… 똥개…… 감히…….”
“적당히 해라,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태도가 그렇단 거야.”
뭘 그렇게까지 열불을 내고 있나 싶어 한나한테 분 좀 식히라고 말하던 순간.
“……!”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손바닥 크기의 검은 구체.
처음에는 밖에서 누가 공이라도 가지고 노는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달려 있는 심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방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이미 구체는 내 손에 착 감겨 들어왔다.
그대로 허리를 틀어 창밖으로 되돌려 준다.
“콜록! 콜록! 끄억! 누가 제대로 못 던졌어!”
“켁켁! 어우 매워!”
“야! 똑바로 던져!”
창문을 닫기 직전까지 기숙사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명소리.
드디어 신입생 뷔페가 시작됐구나 싶어서 나는 바로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는 벌써 연막탄에서 나온 하얀 연기들이 스멀스멀 천장 위에 쌓이고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누가 던졌나 보군요.”
“제대로인데?”
이번 신입생 뷔페에 관련해서는 1학년 생도들 중에서도 여러 반응이 있었다.
단순히 맞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싸우겠다는 생도도 있었고, 그냥 방문을 잠그고 숨어 있겠다는 생도도 있었다.
싸우겠다는 애들은 1층에서 수성준비에 한창이었고, 그 외의 남은 생도들은 저들 방에 숨어 있었기에 복도는 텅 빈 것처럼 한산했다.
덕분에 넬슨과 한나가 거리낌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두 사람도 오늘 있을 내 계획을 들었기에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기사 아카데미라고 해서 단순히 공부만 하고, 대련장에서 검만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독특한 전통이 있네요.”
의족 특유의 딱딱한 소리를 내며 따라오는 한나.
“당하는 1학년 입장에서는 최악일 것 같습니다.”
늘 막내로 살아왔기에 이런 전통을 전혀 반기지 않는 넬슨.
1학년 길들이기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되는 신입생 뷔페.
사실상 2학년들이 강제로 1학년을 후려 패면서 학급 간의 차이를 명확하게 각인시켜 주는 거지만.
끼이익.
옥상에 올라온 나는 차가운 밤바람을 느낀다.
복도에 자욱하게 깔린 연막에서 벗어나니 신선한 공기가 몸에 차올랐다.
남자 기숙사를 빙 둘러싸고 있는 2학년 남생도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간에 기대어 입구를 보니 방패를 든 2학년들이 천천히 진형을 갖추며 다가오고 있다.
이제 제대로 시작이라는 듯 고조되는 분위기.
“마침 잘됐어, 2학년은 확인하기 힘들었는데.”
씨익 지어지는 미소.
은빛 사자 기사단을 부흥시키기 위한 제대로 된 첫 걸음이다.
신입생 뷔페?
1학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2학년의 전통?
남자 기숙사를 두고 펼쳐지는 공성전?
이제부터 펼쳐질 건 그따위 시시한 게 아니었다.
마음껏 날뛰고,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뽐내길 바란다.
은빛 사자 기사단은 너희를 응원한다.
“면접을 시작하자.”
탐스럽게 늘여진 인재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고이는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