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제가 황제가 되겠습니다.”
당돌한 앤의 선언.
작은 소녀가 내뱉은 말치고는 지나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이라는 덩치 큰 땅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황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아리안의 입이 크게 벌려진다.
“네, 가…… 무슨 자격으로.”
덜덜 떨려오는 그의 몸. 하지만 그건 두려움보다는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분노처럼 느껴졌다.
꽤나 격렬한 감정 속에서 그가 쥐고 있던 3황자의 뒷덜미를 놓으며 강하게 외친다.
“네가! 네가 뭔데! 우리와의 싸움이 무서워 도망이나 친 네가! 타국으로 가서 기껏해야 철없이 마법이나 배우겠다고 학도 생활이나 해 왔던 주제에!”
“…….”
“유언장? 그 유언장에 그렇게 쓰여 있었냐? 지랄하지 말라고 해! 내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알아? 그걸 고작 네깟 게 차지하겠다고? 어딜 계집년이 황제의 자리에 앉겠다고!”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만큼이나 그가 절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황자 아리안.
그가 황제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지금까지 흘려온 피가 어느새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도망친 주제에 고작 아버님의 유언장 하나 가지고 까불고 있기는! 네가 지금 몰라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야! 아난과 오르아스 그리고 내가 저 자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콰앙!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는 아리안. 분노로 통제가 되지 않는 마나가 담긴 그의 일격이 첨탑을 울려온다.
“7년이다! 네년이 도망친 다음, 우리는 자그마치 7년을 싸워왔어! 노력도 하지 않고 자리만 날름 처먹겠다고 이리 찾아왔느냐!”
흥분한 아리안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억울함과 분노가 사무치는 그의 일갈에는 아난과 오르아스도 미약하게나마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안 오라버니.”
앤은 단호하게 또한 냉정하게 답했다.
“그래서 오라버니들이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겁니다.”
“뭐어라!”
“결국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위치입니다. 노력 또한 물론 중요하지만 유능해야 하며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네년은!”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뻗는다. 황자의 보검은 치욕스러움이 담긴 떨림과 함께 당장이라도 자신의 누이를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년이 나를 무시하느냐! 그리도 나를 모욕하느냐! 장남으로 태어나, 이 땅을 위해 많은 걸 배워 온 내게!”
“그렇게 노력하셨음에도 인정받지 못하셨잖아요.”
“……!”
“아리안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시는 순간,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그딴 것 정도는……!”
“지금 제국의 국력으로는 진압할 수 없습니다. 보세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실 겁니까.”
“네, 년!”
“결국 세 오라버니 중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제국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속국의 반란을 마주할 건가, 아니면 속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황제가 될 건가.
결국 그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예 새로운 선택지를 황제가 준비해 둔 거였고, 그게 바로 앤이었다.
“제가, 황제가 되겠습니다.”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앤은 앞으로 많은 걸 배워야 할 거다.
앤은 원치 않았으나, 그렇기에 적임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애애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아리안이 결국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베어 넘기겠다는 기세를 뿜어댔으나.
앤의 마법이 아리안을 거칠게 밀어내며 그를 벽에 때려 넣는다.
콰앙!
“그만…… 하세요.”
소녀의 어두워진 표정에는 여러 근심이 담겨 있었다.
* * *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치더라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외지인인 우리는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까.
“저, 저도 진짜 고생했다니까요?!”
워프를 타고 왔던 유령도시에서 만난 녹색 마탑의 마법사 수온.
워프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억울하다며 외쳐대고 있다.
“병실에서 도망친 다음, 일단 왕국으로 돌아가서 두 분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알았다니까요. 돌아갈 준비나 하세요.”
본인 나름대로 여러 위기를 넘기며 이곳까지 왔나 보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냉정하게 말해 이번 사건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
“……그래도 몸이 나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악령을 쫓아내셨다니.”
“뭐, 그쵸.”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목적은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뿐만 아니라 흑마법을 통해서 마몬과의 주도권 싸움을 할 방법까지 얻었으며 힐다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얻은 것밖에 없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마음은 썩 편하지 못했다.
“표정 풀어.”
내 옆에 있는 앤.
올 때는 옆 아카데미의 학도였던 그녀가 이제는 제국의 정통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아무리 오라버니들이 싫어도 내가 하지 않으면 다 죽잖아.”
가족은 가족이니까 하고 덧붙이는 앤. 아마 이런 부분을 보고 황제가 그녀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앤은 자신과 경쟁하게 될 다른 황자들에게 따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살려 두었다.
못해도 지방으로 좌천 정도는 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앤은 황궁의 최측근으로 두겠다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위험할 거야.”
야심 넘치는 오라버니들이 호시탐탐 그녀의 자리를 노리겠지.
“오라버니들한테 보여줘야지. 황제로 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 있다면서 웃는 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굳이 이 이상으로 조언을 주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알아서 충분히 잘 할 수 있겠지.
똑 부러지면서도 정의감이 넘치던 아이였으니까.
“황제라…… 솔직히 정말 되고 싶지 않았는데.”
씁쓸하게 말하는 앤.
개인의 욕심으로는 아직도 그런 자리를 원치 않고 있었으나 제국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 모습이.
“언젠가.”
대악마들을 사냥하며, 대륙을 지키고 있는 내 모습과 이상하게 닮았다 느껴졌기에.
“나를 불러.”
진지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정말 필요할 때, 부르면 도와주러 바로 올게.”
“이안…….”
짊어진 것의 무게감은 나도 모르지 않았다. 300년 전 내가 쓰러지면 대륙이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싸워왔으니까.
다소 오만하게 느껴져도 비슷한 감정이겠지.
앤은 내가 내민 손을 보며 부드럽게 잡아준다. 그러면서도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고마워.”
악수한 손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사각형의 작은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타고 내게 넘어온다.
손을 놓고 확인해 보니 그건 제국의 통신용 장치였다. 소형이지만 오밀조밀하게 장치와 마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걸로 보아 꽤 고급품처럼 보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가 할 줄은 몰랐어.”
“음?”
되물음에 앤은 빙그레 웃으면서 답했다.
“그걸 이용해서 언제라도 나를 불러. 내가 도와줄게.”
“……제국 황제가 뒷배로 생긴 건가?”
“아직은 후계자지만, 몇 년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듬직하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듬직했다.
앞으로 대악마를 막기 위한 유용한 패가 하나 더 생긴 거였으니까.
특히나 천사라는 독특한 존재들까지 적이 되었다. 흐물거리는 근육이라 할지라도 덩치 큰 제국이 돕는다면 전력이 크게 향상된 셈이었다.
“그리고 네가 말했던 폴 벨크터스 기사단장의 갑옷도 조사하고 있어. 관련해서 정보를 알아내게 되면 그때도 연락할게.”
“부탁할게.”
“하르제 스승이 필두로 움직일 거니까 금방 될 거야.”
하르제도 석방됐나.
“권력을 얻었는데 조금은 써봐야지.”
윙크하며 말하는 앤. 하르제와 인사라도 나누면 좋았겠으나 아무래도 그럴 시간은 없어 보였다.
높게 치솟아 올라가는 마나의 기둥.
“다 됐습니다!”
저것에 올라타면 다시 나이트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다소 길게 느껴지던 일탈이 이제 끝나는 거였다.
“겨울방학은 진즉에 끝났으니까 돌아가면 학기 중이겠네.”
같이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앤에게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 자주 해.”
그나마 이런 정도밖에 말해 주지 못했으나. 그것만으로도 기뻤을까.
앤의 표정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주 할게.”
짧은 인사.
제국의 황제가 될 소녀는 앞으로 많은 고난을 겪겠지만. 나는 비밀스러운 그녀의 친우로서, 열심히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대로 몸을 틀어 기둥으로 향한다.
나이트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풍스러운 향이 감도는 서재였다.
주변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널려 있는 가구들도 하나 같이 고급스러운 원목을 사용해서 특수 제작한 물건들이었다.
“너도 이제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 최근 가문의 비화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다고 들었다만?”
“그, 렇지만.”
왕국 최고의 기사라 불리는 남자.
신성 기사단의 기사단장, 로만 레인먼드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숨을 내뱉는다.
“알고 있다.”
그런 로만에게, 그의 아비인 로울레스 레이먼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나 또한 실로 큰 충격을 받았었지.”
레이먼드 가문.
이 단어가 왕국에서 끼치는 영향력과 무게감은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모른다.
홀로 대악마의 군세를 막아 내고, 심지어 마몬을 토벌까지 한 기사의 후손.
대륙의 영웅.
그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건 로만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영광이었다. 또한 언제나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다녀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또한 남들과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이미 목표가 정해져 있는 삶이었으나 그걸 싫어하진 않았다.
정점에 선 기사의 등을 늘 선망해 왔다.
그가 걸어온 길에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로만 레이먼드는 늘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그의 아비가 너무나 잔혹하게 일생을 부정하는 말을 다시금 내뱉는다.
“라인 레이먼드의 후손이 아니다.”
왕국의 비화.
아무런 후손도 남기지 않고 떠났던 영웅을 잊을 수 없었던.
과거의 왕실에서 만들어 낸 거짓된 핏줄.
단순히 왕국 백성뿐만 아니라 전 대륙을 속이는 사기극이었으며.
로만 레이먼드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기극의 피해자이자 공범자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불현듯.
면접장에서 봤던 이안 아이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 진짜로 라인 레이먼드의 후손입니까?
1학년 생도로는 생각할 수 없는 위압감.
– 증거가 있나요?
다소 화가 난 듯 따지고 들어오는 소년의 한마디 한마디.
– 확실하냐고.
무언가 알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내뱉는 묵직함.
또한 라인 레이먼드가 재림한 듯했던 은색 머리카락까지.
“우욱!”
로만 레이먼드는 속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삶이 송두리째 변화하며 자괴감이 전신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 이후, 이안 아이넬과 나름의 친분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상당히 뛰어난 소년이었으며, 여러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밝히길 원치 않아 조용히 넘어갔다.
아마 레이로즈 가문의 적장미 기사단도 그 소년이 졸업하면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로만 레이먼드는 두통을 호소하며 자리를 벗어난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소년은…….’
무엇을 알고 있던 걸까.
그걸 확인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