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369
369화
3부 외전 후일담(完)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여러 강국을 초토화시키며 공포를 떨친 유목제국이 오랫동안 준비한 서정은, 과연 그 준비와 대제국의 위명에 부끄럽지 않을 대원정이었다.
칸을 필두로 전대부터 활약한 기라성(綺羅星) 같은 노장들과 명장들은 익숙지 않은 지역에서도 그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오늘날 어떻게 대제국이 되었는지 증명하였다.
그러나 그 종횡무진의 원정도 불현듯 정체되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준마라 할지라도 머리가 없으면 살 수 없듯, 대칸이 급사한 상황에서 무작정 서정을 계속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칸의 죽음으로 단번에 와해가 되기에는 예케 몽골 울루스는 ‘이미’ 단순히 양이나 치던 유목 부족이 아닌 대제국이었고, 동시에 ‘아직은’ 대제국을 이룩한 선대 칸(칭기즈칸)과 그 유훈 그리고 현 칸(오고타이칸)이 즉위한 이유를 잊지 않은 이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와해될 것이라고 믿었던 유럽의 예상과 다르게, 몽골 제국은 다음 칸을 뽑기 위한 예케 쿠릴타이는 무사히 시작되었고, 여기에는 동방 변경에 있던 노물. 테무케 옷치긴도 부랴부랴 참가하였다.
당연히 그 목적은 쿠릴타이에 대한 간섭이었다.
이미 무단으로 카라콜룸까지 군대를 끌고 온 테무케에게 쿠릴타이 참석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수 불가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예케 쿠릴타이에서 많은 이들이 오고타이칸의 5남 카시가 대칸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카시는 쿠추와 몽케와 더불어 다음 대 칸 후보로 꼽혔고, 쿠추가 남송원정에서 전사한 이후 유력한 후보였으나 오고타이칸 보다 먼저 사망하며 계승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선 아직 살아 있었다.
본래 역사의 사인인 음주로 인한 사망이었는데, 여기선 오고타이가 서정을 시작하면서 되도록 절주를 하면서 덩달아 절주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카시 님이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키시 보다도 더 적합한 자가 있을 텐데?”
“다른 자라니요? 테무케 님?”
“쿠추의 아들. 시레문이 있을 텐데?”
여기서 옷치긴 왕가의 테무케는 처음 가장 어르신인 스스로를 추천하였으나, 아무리 선대 칸의 막냇동생이라 할지라도 자식도 아닌데, 칸이 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강한 반발들에 결국 대칸 위를 마음에 접고 3남 쿠추의 아들 시레문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는 명분적으로는 칸이 총애하던 아들의 자식이 죽은 지금, 칸의 총애를 받은 손자가 받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실제 이유는 오고타이계를 지지하는 것으로 자신이 저지른 병크에 역심이 없었으며, 세력이 약한 시레문이라면 더욱 자신을 벌할 수도 없고, 자신이 주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시레문도 충분히 받을 자격은 있었고, 쿠릴타이에 참석한 이들도 시레문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딱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예케 쿠릴타이로 칸이 선정된 후 재개될 서정(西征)의 문제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아직 어린 시레문을 대칸에 올린다 한들, 미성년인 그가 역대 칸들처럼 친정이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워 미덥지 못하다.
그것은 서정을 완수해야 한다는 오고타이칸과 차카타이의 유훈에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테무케가 적극 지지하게 되면서 시레문의 대칸 즉위 가능성은 크게 부상하였는데, 바로 테무케가 시레문이 대칸이 된다면 자신도 서정에 참여하여 보좌할 것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옷치긴 왕가는 몽골제국의 왼팔로 불릴 정도로 강했고, 테무케 본인도 오랜 연공을 가진 숙장이었다. 그가 나선다면 시레문의 즉위로 떨어진 사기를 보완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테무케의 발언에 몽골의 제왕들은 ‘노물이 쿠추의 아들을 올리고 자신은 섭정의 위치에서 국정을 움직이려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본래 역사에서 오고타이칸은 유언으로 쿠추의 아들 시레문을 다음 대 칸으로 지목하였으니 만약 테무케의 바람대로 된다면 본래 역사의 오고타이의 유훈이 달성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릴타이가 끝났을 때 많은 이들은 경악하였는데 오고타이 칸의 다음을 이어 예케 몽골 울루스의 3대 대칸이 된 것은 오고타이가 총애한 카시도, 쿠추의 아들 시레문도 아닌 구유크였기 때문이다.
노회한 테무케조차 구유크가 진심으로 대칸을 노리고 작업을 해놓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구유크와 관계가 나쁘기로 유명한 주치 울루스의 바투가 구유크를 추천을 한 시점에서였다.
그때는 이미 늦게 쿠릴타이에 참가한 테무케로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뒤집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나 바투는 대칸의 장자 구유크가 대칸 즉위에 오르는 것을 적극 찬성하오!”
그렇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구도로 역사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구유크의 칸 즉위는 성립되었고, 대칸에 오른 구유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오고타이가 즉위하였을 때 같은 성대한 즉위가 아니었다.
“예케 쿠릴타이에서 나는 대칸으로 선정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즉위식을 하는 것이 우선이긴 하다. 그러나 칭기즈칸께서도 하서국을 칠 때 죽음을 알리지 않고, 하서국의 항복을 받은 후에야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내리셨으니 이는 전쟁의 유리함을 이용하기 위해선 장례와 같은 의식을 미루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도 그때와 비슷하니, 지금 북진(北秦 신성로마제국)도 우리가 칠 것을 모르고 방심하고 있으니 저들을 치는 절호의 적기라 할 수 있다.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들이여! 저 배은망덕한 진의 황제와 백성들을 죽여라. 북진의 모든 여인들을 우리 예케 몽골 울루스의 노예로 만들고, 수레바퀴보다 큰 남자들은 모조리 도륙하라! 그리고 전 세상에 다시는 우리 예케 몽골 울루스를 모욕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라!”
새로운 대칸의 지엄한 명령에 예케 몽골 울루스의 포악하며 용맹한 전사들은 폭발과 같은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멸망을 확정시키는 답성이었다.
* * *
“제발 죽지 말게. 부디 오래오래 살아서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나라를 위해 일해주게나.”
“예?”
서경 팔관회를 앞두고, 강화도에서 전해진 서찰을 읽다가 중얼거린 내 혼잣말에 정안연이 놀란 목소리로 반문하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참지정사의 이야기다. 이번에 만종에게 내릴 조서를 작성하는 이가 참지정사라 하는데, 참지정사도 이제 연로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신(老臣)이 아닌가? 하여 장수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평소에도 참지정사를 만나면 말하지만, 나는 참지정사가 오래오래 신선처럼 장수하였으면 좋겠구나.”
사실 이제 연로하다는 소리를 듣는 정도가 아니다. 옛날 옛적에 중세시점에선 노인이라 불릴만한 나이다. 그리고 본래대로라면 1241년. 올해에 이규보가 죽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이번에도 홍삼 5근과 송이버섯 2개를 하사하고 아침저녁, 식후에 1각 이상 꾸준히 산보를 하며 양생(養生)을 실천하라는 글을 적어야겠구나. 아조에 그처럼 문(文)에 뛰어난 자는 찾기가 어렵다. 일찍이 김창과 이수도 문명(文名)이 뛰어난 이재였으나, 하나같이 흠이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참지정사라고 흠이 없겠느냐마는 그 셋 중 가장 문장이 뛰어나고 직접적인 죄가 덜하니, 죽는 그 순간까지 일을 하는 것으로 죄를 갚게 하고 싶구나.”
김창, 이수, 이규보는 문필가로 뛰어난 명성을 떨쳤지만 과거 셋 다 최씨 가문과 친했고, 그 당여들이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많은 인재들이 최씨 가문에 붙어 있었다. 이거 때문에 과거 엄청 곤혹스러웠고 말이다. 제길.
아무튼 그런 인재들 중 이규보가 가장 문장력이 뛰어나며 지위도 높아, 최종준과 함께 기용했고, 그 외에도 최씨 정권에 붙은 당여들은 그 죄의 크기에 따라 숙청하거나,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하고자 놔두거나, 아니면 죄가 작은 이들은 살려는 두되 사실상 좌천시키는 것으로 처리했다.
당장 앞서 말한 이규보 외 둘에 대해서도 김창 같은 경우가 정적들의 싹을 끌어내는 데 사용하며 이용 후 처리했고, 이수는 행실마저 더러운 작자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노골적으로 문제 되는 일을 벌이지는 않아서 사실상 좌천만 해둔 상태다.
물론, 추문이라도 일어났다간 즉시 처리할 생각이고 말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단순히 처리하거나 좌천시키기엔 능력과 문장가로서 이름이 훨씬 높아 개혁을 하거나 글을 적는 일을 할 때, 그가 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되고 실제 시킨 일은 잘하는 것도 있으니…. 참지정사. 내 그대의 명예만큼은 절대 후대에 역신이나 간신이 남기지 않고, 과거 흠은 있으나 역시 명신(名臣)이었다는 식으로 이름을 남기게 하리다. 그러니 조선 시대 황희 정승만큼만… 아니, 욕심 좀 더 부려 황희보다 훨씬 오래 살아서 나를 도와주시오.’
이러한 나의 솔직한 고백에도, 정안연은 마치 진림(陳琳)의 격문을 받아놓고 감탄하는 조조를 보고 저 감상이 진심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 말하는 것인지 고민했을 조조의 가신들인 양 내 의중을 살피며 말을 주저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닌가. 나는 진심인데 말이다.
“어찌 됐든 이번 일에 대해선 나도 만종을 비롯한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이 맞겠구나.”
지금 내가 만종과 승려들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상은 주는 전란의 위기를 구한 대장경을 편찬한 상 때문이다. ‘전란의 위기를 모면한 대장경’이라는 말에서 뭔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렇다. 우연에 불과하지만 2차 옷치긴 전쟁 발발 직전. 그러니까 내가 군대를 이끌고 북진을 한 그날, 고려대장경(원 역사에선 팔만대장경)이 완수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2차 옷치긴 전쟁은 대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본래 역사를 아는 나야, ‘오고타이가 죽은 것에 대해 죽을 때가 돼서 죽었네’ 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그것도 전쟁의 조짐을 느끼며 불안에 떨던 불교를 국교로 삼던 고려인들은 어떻게 보겠는가?
전쟁을 막고 전란을 모면하기 위해 만들게 된 대장경이 완성되자마자 외적이 거짓말처럼 물러난 것이다.
‘우연이라고 해도 대장경이 완성되자 군이 물러났다. 부처님의 가호라는 생각이 안 든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본래 역사에서도 과거 여요 전쟁 때에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거란이 물러났다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인데, 지금 우연으로 생긴 결과지만 대장경을 만드니 몽골군이 물러난 꼴이 되었다.
이렇게 절묘하게 일어나면 원 역사에서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칠 때마다 태풍이 불어서 전멸하자 신풍이라 부르고 자신들을 신불의 가호를 받는 나라라고 자부했다는 사례가 절로 떠오른다.
이런 사태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면….
‘진지하게 이번 일로 인해 향후 전쟁에 직면할 때마다 대장경을 만든다는 관습이라도 생긴다면 진짜 골치 아픈데….’
고려는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일본과는 다르다. 대장경을 만드는데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외침이 생길 때마다 군사훈련이나 축성, 무기 개발 등 국방에 드는 비용은 뒷전이고 대장경이나 새기는 것을 우선하는 꼴이 일어나면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가호를 받았다며 자축하는 백성들을 분위기를 깨고자 지금 당장 여몽 전쟁을 앞당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번엔 이 사태로 일어난 파급을 최대한 도움 되는 쪽으로 조정하는 수밖에….’
“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모두에게 적절한 포상을 내리고, 대표가 되는 수기대사와 만종을 이번 서경 팔관회에 참석하게 하려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둘을 서경 팔관회에 말입니까?”
“그렇다. 한동안 전란의 재발로 서경민들은 물론, 북방의 백성들이 불안에 떨었다. 이때 고승인 수기대사가 와서 불법이라도 강(講)하고 설법이라도 한다면 불안을 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하면 대장경에 참석한 모든 중들을 참석시켜….”
정안연이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말을 해서 순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 못 했다가 한발 늦게 겨우 이해했다.
이게 미쳤나? 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승려들이 얼마나 되는데 그걸 모두 불러! 그들 먹일 식비만 해도 어마무시한데….
일반 승려는 그냥 적절한 포상으로 끝내자. 광종이 개혁 군주로서 배울 점이 있다지만 숱하게 불교 행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한 것까지는 배우고 싶진 않아.
“아니다. 어찌 번거롭게 모두를 부르겠느냐. 수기대사와 만종. 혹은 일부만 데려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러시지요.”
그제야 내 뜻을 이해한 정안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돈 쓰기 싫어.
“그래. 어차피 민심을 다독이는 일이다. 그리고, 아마도 조정에서도 이번 대장경 제작으로 별시(別試)를 열 것이 분명하다. 이에 나 또한 서경 팔관회에서는 간단하게나마 별시로 무과를 열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전하. 심도에서 별시를 연다면 굳이 서경에서도 별시를 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대가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이번 무과는 이전의 무과와는 다르다. 이미 시험자들을 정하고 치를 생각이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난번 해수를 잡고자 전국에 포고문을 내린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왕과의 전쟁 문제로 다소 지장이 생기지 않았느냐? 물론 그대로 사냥을 계속한 곳도 있지만 역시 전보다는 관심이 덜해진 것도 있다.
하여 다시 해수들을 잡는 데 집중하고자, 지금까지 맹수를 잡은 공을 세운 이들을 이번 팔관회에 불러 그들에게 상을 내리는 겸, 무과까지 치르게 하여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여자들을 불러 그들만으로 무과를 치르게 하는 것은, 맨땅에 별시를 벌이는 것보다는 많은 비용이 절감되고 그들의 실력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사냥을 잘하는 것이 무과의 과목을 전부 잘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으니 이번 무과는 다소 다르게 치르고, 설령 낙방한다더라도 응시자 모두에게 상은 줄 생각이다.
어차피 해수 사냥에 활약한 이들에게 내리는 상에 드는 비용은 본래부터 예정해 둔 비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어찌 만류하겠사옵니까. 신은 그에 따른 준비를 하겠나이다. 하옵고, 지금 전하께서 지난 해수 구제에 활약한 이들을 말씀하셨으니 신도 이김에 그 일에 대해 작게나마 말하고자 하옵니다.”
“음? 사냥에 관련하여 말할 것이 있는가? 기탄없이 말해보라.”
“전하께선 지난번, 소신들을 불러 범을 잡는 일에 대해 상을 규정하시며,
‘범을 다섯 마리 이상을 잡았을 시 다섯 마리 모두 선전, 선창(先箭 先槍)한 자는 일반 병사라 할지라도 산원(散員 정8품 무관직)에 삼고,
선전, 선창이 세 마리이고, 이전, 이창(二箭 二槍)이 두 마리인 자는 교위(校尉 정9품 무관직)로 삼도록 한다.
그리고 선전, 선창이 한두 마리이고, 이전, 이창이 서너 마리인 자는 대정(隊正 종9품 무관직)으로 올리도록 한다.
그 밑으로는 호부와 건의하여 정하도록 하라. 만일 잡은 자 중 이미 관직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산원 이상에 한정하여 따로 내게 고하라!’
-고 하셨는데 기억하시온지요?”
“내. 그러한 기억이 있다. 설마 관직에 있는 이중 상을 탄 이가 있느냐?”
관직에 있는 자가 무과에 참여하는 것은 이상하긴 하겠지. 그에 대해선 따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그 시험하는 정도만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 그중 한 명이 참가하였으나 참가한 이가 아니라 이를 어찌해야 할지 전하께 하답을 듣고자 하옵니다.”
“참가하였으나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그는 사냥에 동원되긴 하였으나 본래 이번 해수를 사냥하는 사냥꾼과 병사들이 아니라, 그들을 보조하고자 참가한 승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사냥에 많이 동원되다가 맹수가 사람을 해치려 하자 활을 쏘아 맞히었는데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나 해당 지방관이 그 승려도 사냥에 투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승려는 큰 활약을 하였는데 그 성과가 지난번 전하께 내리신 산원의 자격에 부합될 정도라 하여 관직에는 없으나 이렇게 고(告)하옵니다.”
“뭐라!? 정말 산원을 받을 정도로 잡았단 말이냐?!”
내가 산원을 준다고 했을 때 범을 최소 5마리 이상은 잡아야 하며, 5번 이상 가장 먼저 쏘아야 한다는 규정을 내렸다.
말이야 쉽지, 이게 쉽게 가능한 거였다면 당시 이장용이 너무 보상이 과한 것 아니냐는 말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측근 무장들부터 그걸로 낙하산 승진한 것이라면 실력을 의심할 자는 없다고 했겠는가?
그들의 말에는 그저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만큼 실제로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 그걸 성공한 녀석이 있다니….
“그렇습니다. 그 승려의 법명(法名)은….”
“법명은 됐다. 속명(俗名)을 말하라! 그러한 인재가 정말로 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환속시켜 무관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여몽 대전을 앞두고 한 사람의 인재도 필요한 상황에 그러한 인재를 승려로 썩힐 수는 없다. 반드시 환속시키고 마리라!
그런 생각으로 다그치자 정안연도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는데….
“백현원(白峴院)에서 무승(武僧)을 하고 있는 김윤후(金允侯)라고 하는 자입니다.”
“…김윤후!”
#작가의 말
*작중 초조대장경을 새기자 거란이 물러났다고 하는데, 실제 이규보가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이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초조대장경은 여요 전쟁때 만들기 시작했고, 완성된 것은 여요 전쟁이 끝난 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