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35
교랑의경 135화
정교랑의 마당에 있던 여종들은 모두 물러갔다. 대청에 싸 둔 짐보따리는 여전히 그대로 놓여 있고, 정교랑과 시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당황도 분노도 없는 얼굴이었다.
주 노야는 자리에 앉아 한참을 침묵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갖가지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방을 수리해야 하는데 다른 자매들이랑 함께 지내기 어려워서 말이다.”
고개를 든 주 노야는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자 순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교교, 잠시 나가서 지내거라. 집에서 지내긴 불편할 게다. 대신 걱정 말거라. 집에 있으나 밖에서 지내나 똑같아. 이 외숙부가 있지 않느냐.”
주 노야는 눈 딱 감고 본론을 꺼냈다. 정교랑이 그 말에 주 노야를 쳐다봤다.
“이번에 내쫓았다가, 나중에 또 억지로 데리러 올 건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려올 필요도 없었는데. 억지로 데려오지 않고 그 저택으로 보낸 다음 간간이 가서 보살펴 주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후회막급이로다!
“교교, 그게 무슨 말이냐. 내쫓다니. 여긴 네 외가고 난 네 외숙부다. 여긴 네 집이야.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무도 강요 안 해.”
정교랑은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외숙부님께서 그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동의한 건가? 도리어 주 노야가 멈칫했다.
잘된 일이다. 집안 조용할 날 없이 소란이 벌어지니 부인도 심기가 불편하고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관계가 좋아지고 개선되기는커녕 하루하루 더 감정만 쌓이던 차였는데, 이제 따로 지내게 됐으니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외숙부이니 돈도 좀 챙겨 주고 자주 들여다보며 관심을 쏟으면 무쇠가 아닌 이상 마음이 열리겠지. 아직 어린 소녀인데 더 틀어질 게 뭐 있겠는가.
“여봐라, 아씨를 집으로 모셔다 드려라.”
주 노야가 일어나며 명하자 문밖에 있던 여종들이 급히 들어왔다.
“됐다. 거기도 있을 건 다 있어. 내가 가져왔던 물건만 가져가면 돼.”
여종들이 멈칫하는 사이, 시녀가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따라 일어섰다. 시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보따리를 뒤져 책 한 권을 꺼내 손에 들었다.
“아씨, 우리 가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모를 쓴 다음 문을 나섰다.
회랑 아래에 건 등롱이 봄바람에 흔들렸다.
“부인, 보냈습니다.”
여종 둘이 들어와 예를 표하고 말을 전했다. 주 부인은 한숨을 토하고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아무것도 안 가져갔습니다. 돈도 안 가져갔어요.”
여종의 말에 주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했다.
“그 애가 돈이 없다더냐? 어디 우리 집 돈에 관심이나 있겠어?”
“사람도 안 데려간대요. 노야께서 직접 데려다주셨는데, 마차에서 내리더니 문을 닫으며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는 바람에 다들 그냥 돌아왔다네요.”
“싫으면 관두라지!”
콧방귀를 뀌던 주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노야는?”
“서재로 가셨어요.”
여종이 답했다.
“좋을 대로 하라지.”
주 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여종에게 나가라고 하며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를 내보냈으니, 이제 나도 한시름 놓게 됐구나.”
주 부인은 창밖을 쳐다봤다. 더없이 고요한 밤이었다.
새벽빛이 밝을 무렵, 주씨 저택의 연무장에 처음으로 주육낭이 나오지 않았다.
“여섯째 아우는 슬픔을 못 이겨 자리에 누웠나?”
“무슨 소립니까. 어제 어머니께서 우리더러 자릴 피하도록 그 앨 데리고 나가 술을 먹이라고 하셔서, 들이붓다시피 했어요. 업혀 들어왔으니 일어나긴 힘들겠죠.”
“그렇게 안 봤는데 여섯째 아우가 어린 나이에 그런 마음을 품었다니.”
“한동안 꽤 상심해 있겠죠.”
형제들이 창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 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번엔 대청에서 무관심한 눈길로 쳐다보는 그 여인도 없고, 눈을 치켜뜨며 따지고 드는 시녀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사람만 없을 뿐.
주육낭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걷어차자 탁자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애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애는 아무 관련 없어요. 저 혼자 결정한 겁니다!”
주육낭이 소리쳤다.
“제가 그 애한테 빚을 졌다고요! 그 애한테 평생 갚아야 합니다!”
“네가 뭘 빚졌는데? 뭔데 평생을 들여 갚아! 네가 빚을 져? 내가 너한테 빚을 졌지! 그 애 때문에 감히 내게 이리 대들다니!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애를 이 집으로 들일 생각은 마라. 네가 뭐라 말하든 어림도 없어!”
주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치자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가거라. 네 혼사는 우리가 주관할 것이니,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마!”
주 노야가 무거운 목소리로 명하자 주육낭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급히 말을 달려 밖으로 나가던 주육낭은 마침 마차에서 내리려던 진 공자와 부딪칠 뻔했다.
“육낭!”
진 공자가 말 위에 탄 소년을 보고 소리쳤다. 말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또 왜 저리 화가 났어?”
진 공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사환이 물었다. 진 공자는 주씨 저택의 대문과 주육낭이 사라진 방향을 차례로 쳐다봤다.
“금방 들어올 것 같진 않구나. 이만 돌아가자.”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휘장을 내리고 말 머리를 돌렸다.
진 공자의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사환이 가마 의자를 가져와 진 공자를 부축해 태운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다가 진 공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십삼이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지?”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그러게요. 방금 육공자를 뵈러 주씨 저택에 간다며 나가셨는데요.”
여종이 대답했다. 부인은 웃음을 띤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주육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인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말했다.
“어디서 우연히 들었다. 주씨 가문에 십삼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지?”
대청에 앉은 진(秦) 부인은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아 천천히 마셨다. 시선은 문밖 회랑에 꿇어앉은 사환에게 가 있었다.
“네가 십삼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지?”
진 부인이 물었다. 일반적으로 공자를 모시는 사환은 심부름을 시키는 용도로 썼지만, 진 공자는 몸이 불구인 탓에 사환이 심부름꾼 외에 지팡이 노릇까지 했다.
이들은 진 공자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앉고, 눕고, 걷는 일을 도왔다. 밖에 있던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일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더냐. 소상히 말해 봐라.”
진 부인의 명에 사환은 몸을 떨며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네가 뭐라고 할지 안다. ‘소인은 모릅니다’라고 하겠지.”
진 부인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태도로 천천히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십삼이 너희에게 뭐라고 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안다. 그 애의 말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마 그 애도 자신의 당부가 소용없다는 걸 알았을 게야. 난 그 애의 어미다. 그 애에 대해 알아야 해. 그 애는 날 속일 수 없다. 너희 아랫것들은 더더욱 그렇지. 걱정할 것 없다. 그냥 아는 대로 말하면 돼. 십삼도 너희에게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명한 건 아닐 게야. 그 일은 잊으라고 했겠지. 그저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네 하고 대답했다. 똑똑한 어머니에 똑똑한 자식이네. 뭐하러 아랫것의 입을 빌리는 거야. 그냥 두 모자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시지.
“너희에게 묻고 나서 얼추 알게 되면, 그 애한테 가서 직접 물어볼 것이다.”
진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괜히 넘겨짚으며 말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재미없게.”
사환은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릅니다. 며칠 전에 공자께서 주씨 저택에 가셨다가 그 댁 육공자와 사촌 누이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셨습니다. 그때 육공자의 사촌 누이가 불쑥 말했어요. 공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요.”
“주육낭의 사촌 누이?”
진 부인은 호기심 어린 말투로 웃으며 물었다.
“그냥 해 본 말이겠지.”
“아닙니다, 부인. 주씨 저택에 신선을 만난 낭자가 산다는 소식이 경성에 파다한데, 못 들으셨어요?”
사환은 흥분한 어조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종 하나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몸을 숙이고 진 부인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진 부인이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지어다.
“그래?”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성에 소문이 파다하고 이 태의도 증언했대요.”
진 부인은 웃는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 내한이 회춘했단 말이지? 그럼 첩실을 또 들이겠구나.”
진 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에 잠겼던 부인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 여종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종 둘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부인에게 언행을 주의하라고 일깨워 주었다.
문밖에서 고개를 들었던 사환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인의 말이라면 필시 고칠 수 있겠지. 여봐라, 주씨 저택으로 가야겠다.”
진 부인이 일어서려 하자 여종들이 얼른 말렸다.
“부인, 그 말을 정녕 믿으세요?”
“당연히 믿지.”
진 부인의 말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우리 십삼의 다리만 고칠 수 있다면 신선을 만나 득도한 게 아니라, 그 여인이 구천현녀(九天玄女: 중국 신화 및 도교의 여신)라 해도 믿을 거다. 기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향불을 올릴 거야.”
십삼공자의 다리는 진 부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즐겁게 지내지만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는지 모른다. 여종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듣기론 그 낭자가 십삼공자께 화풀이를 하며 안 고쳐 준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다른 때라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해도 그냥 넘겼겠지만, 그 낭자는 정말이지……. 누가 2만 관을 가져와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도 딱 잘라 안 고친다고 했대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요.”
진 부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이였구나.”
진 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만한 재주를 가졌는데, 돈 따위가 대수일까.”
진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음을 지었다.
“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면, 일이 쉬워지지.”
진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봐라, 주씨 저택에 혼담을 넣으러 가야겠다.”
여종들은 오랫동안 진 부인을 모신 이들이었다. 평생을 모셨건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부인의 심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의원을 청하러 가겠다더니 이젠 갑자기 혼담을 넣으러 가겠다고? 안에서 시중을 들던 여종들이 멈칫하여 진 부인을 쳐다봤다.
“누구한테요?”
진씨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서 깊은 명문 귀족으로, 혼사를 맺으려면 동등한 가문이거나 약간 낮은 정도의 가문이어야 했다. 진씨 가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주씨 가문은 약간 낮은 정도가 아니라 낮아도 한참 낮았다.
진씨 가문의 방계와 맺어 주시려나? 그렇다면 그럭저럭 성사될 만하지만.
“우리 십삼 말이다. 그 정씨 가문 낭자에게 혼담을 넣을 거야.”
진 부인이 웃으며 말하자 여종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