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54
교랑의경 254화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올 무렵, 문을 열던 시녀는 깜짝 놀랐다.
“공자님은?”
시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공자님 못 봤어?”
나머지 시녀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대청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이불은 한쪽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연무장에 가셨나?”
“왜 못 들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계셨는데.”
“오늘 군영으로 들어가시는데도 연무장에 가시다니, 정말 열심이시네.”
같은 시각 주육낭은 옥대교 저택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공자님,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금가아가 졸린 눈으로 문을 붙잡고 말했다.
“새벽은 무슨. 대문 앞이나 쓸지, 아직도 자빠져 자냐!”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금가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손에 쥐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육낭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일 때처럼, 주육낭은 마당에서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데요? 다들 일어나지도 않으셨다고요.”
금가아가 따라와 기분 나쁜 투로 물었다.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한 마당을 둘러본 후, 뒤돌아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너희 아씨한테, 나 떠난다고 해라.”
주육낭은 걸어가며 금가아에게 말했다.
“앞으론…….”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앞으로 뭐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심호흡을 하고 돌아섰던 주육낭은 여인이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문 앞에 선 모습을 보고 얼른 다시 돌아섰다.
“앞으로, 앞으론 말썽 그만 피워.”
뒤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육낭이 발을 들어 두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아, 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 왔군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생각해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경성은 만만치 않은 곳이야. 조심하는 게 좋아.”
웃는 듯 아닌 듯한 여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반근, 간식 좀 가져와.”
정교랑이 말했다.
망할 여인 같으니라고! 주육낭은 홱 돌아서서 정교랑을 노려봤다.
대청 안은 어두웠고, 밝아오는 새벽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소녀는 짙은 무채색 옷차림에, 머리는 칠흑처럼 새카맸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주육낭은 자신이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대로변에 서 있었고, 손에는 간식이 든 함이 들려 있었다.
주육낭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서 빨리 함에 든 간식을 길가의 거지들에게 던져 주거나 냇물에 처박아 버려야 했다.
벌써 성문이 열린 후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수레를 미는 사람, 말을 끄는 사람, 말을 탄 사람 등등이 분주하게 오갔다.
주육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은 함을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이야.”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뭘 그렇게 주섬주섬 챙겼어?”
당황하던 주육낭은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공자가 말을 탄 채 휙 지나가고 있었다.
“어이.”
주육낭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진십삼이 놀란 듯 물었다. 주육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십삼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일 보러 나가.”
진십삼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간다.”
말하면서도 진십삼은 말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말을 마쳤을 때 진십삼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고, 고개를 돌리며 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주육낭은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먼저…… 간다니…….
진십삼과 말은 인파 속을 헤치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 자식이, 저 망할 자식!”
주육낭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고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인지라 진십삼의 말은 빠르게 내달릴 수 없었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육낭에게 따라잡혔다.
“아니, 뭐가 그리 바빠? 빨리도 뛰었네.”
진십삼이 말 위에서 웃으며 물었다. 주육낭은 진십삼 옆에 멈춰 서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시치미 작작 떼고, 냉큼 내려와.”
주육낭이 노려보며 말하자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욕을 하고 이래?”
“욕이 대수냐? 팰 수도 있어!”
주육낭은 진십삼을 움켜잡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람을 팬다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그래, 그래. 내가 알아서 내려갈게. 어휴, 이 창피한 인간.”
두 소년이 싸우기는커녕 어깨를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거리의 행인들은 실망스러운 듯 흩어졌다.
“나 진짜 바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바쁜 사람이 꼭두새벽부터 날 미행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얼씨구, 꿈도 야무지네. 내가 자네를 미행해서 뭐 하려고?”
진십삼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만해. 난 거짓말 못 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본인이 잘난 줄 아나 본데, 전엔 내가 비위 맞춰 줬던 것뿐이야.”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내게 네 마차랑 부딪쳤을 때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너 속으론 나 엄청 욕했잖아. 그게 안 보일 줄 알아?”
진십삼이 하하 웃었다.
“아, 진짜 그게 보였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약조대로 한 거야?”
“일개 절름발이를 내가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절름발이라. 전엔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는데.”
“널 속인 거였어. 그걸 믿냐?”
그러더니 주육낭이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내놔. 나 바빠, 빨리.”
“무슨 소리야? 내놓으라니 뭘?”
진십삼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은 후 손을 훅 뻗어 진십삼의 허리춤에 있는 비수를 낚아채려 했다. 진십삼이 얼른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 거야, 내 거.”
다리가 다 낫긴 했지만 걸음마를 떼자마자 무예 단련을 시작한 주육낭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진십삼은 금세 비수를 빼앗겼다.
눈에 띄는 비수는 아니었다. 칼집도 수수하고 보석이나 금은을 박아 둔 것도 아니었다. 주육낭이 비수를 뽑아 보더니 혀를 찼다.
“위주(涠洲) 단(段)씨의 칼이네.”
주육낭은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쓸만하군. 선물에 성의도 있고.”
옆에 있던 진십삼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 건?”
주육낭은 비수를 잘 집어넣고 진십삼을 힐끔 쳐다봤다.
“내가 선물 받아주는 게 자네한텐 최고의 선물 아닌가?”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먹을 뻗어 주육낭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누이를 닮아 점점 영악해지네!”
“잘 나가다가 그 애 얘긴 왜 꺼내? 단념하는 게 좋아. 종일 그 애 생각만 해 봤자, 소용없다고.”
진십삼은 웃으며 대꾸하지 않고 배를 두드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밥도 못 먹고 나왔어.”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런데 자네는 간식까지 싸 왔군. 좋아, 좋아. 어서 꺼내 봐.”
진십삼이 손을 뻗었지만 주육낭이 한발 먼저 몸을 피한 후였다.
“먹긴 뭘 먹어.”
“그 낭자가 준 건 별로라며? 눈에 거슬려서 심란하기만 할 텐데,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피했다.
“나 가면, 그 애 잘 보살펴.”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살필 필요나 있나. 난 은혜를 갚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주육낭이 걸음을 내디뎠다. 진십삼이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진십삼은 아직 주육낭처럼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도 없고 믿음도 안 가. 자네밖에 없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맡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지.”
진십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치켜세우는 거야? 깔보는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주육낭이 팔을 들어 막고, 다시 진십삼에게 주먹을 날렸다.
“부실한 몸이나 좀 단련해. 나중에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쯤엔 내 주먹을 막을 수 있나 봐야겠다.”
“걱정 붙들어 매. 난 자네보다 십 년 늦었을 뿐이야. 자네가 돌아왔을 때 누가 누구한테 맞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주육낭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느덧 길 어귀에 다다르자 진십삼이 걸음을 멈췄다.
“그럼 이만 갈게.”
주육낭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일이 있는 거야?”
“응, 아버지께서 선생을 소개해 주셨어. 근데 이 선생을 모시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말이지. 매일 아침 일찍 가서 문 앞에서 대기해야 해.”
진십삼의 말에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자네를 배웅 나온 것도 사실이고.”
진십삼은 웃으며 주육낭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고는 진십삼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급제하길 기도할게.”
“기도까진 필요 없어.”
진십삼이 웃음을 지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소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주육낭을 향해 공수했다.
“적진을 휩쓸며 하루빨리 전공을 세우길 기도할게.”
“뭘 기도씩이나. 당연한 일인데.”
주육낭이 턱을 치켜들며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훌쩍 날려 말 위에 올라탄 진십삼은 서쪽으로 향했고, 주육낭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말을 타고 시끌벅적한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잔뜩 흐려지자 경성 군영에 있던 몇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비가 오면 출발이 지체될 텐데.”
“며칠 지체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근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서 환호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영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군졸들이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훌륭한 궁술이군!”
“전장에 나가면 혼자서 열 명은 죽이겠어.”
여기저기서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오자 서봉추는 득의양양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정도 실력이야 뭐. 당초 이 궁술로 군공을 세웠는데, 그 망할 자식이 공을 가로채려 했지 뭔가. 열 받아서 활을 쐈더니 그놈이 지레 겁먹고 놀라 자빠져 죽었지…….”
서봉추가 한창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데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이 무슨 짓이냐!”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노기등등한 유규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탈영병을 잡은 공을 세운 유 대장이라지만, 집안에서도 조정에서도 성가신 존재였다. 결국 유 대장은 바람대로 다시 서북으로 가게 됐다.
일개 대장에 불과했지만 엄연히 관청 소속이라 평범한 군졸들보다는 신분이 높았다. 모두가 유규에게 예를 표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긴 경성 군영이다!”
유규는 특히 서봉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묘기를 보이려거든 거리에 나가서 해!”
서봉추는 콧방귀를 뀌고 활을 거둔 후, 다른 군졸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고 했다.
“서라. 활은 두고 가야지.”
유규의 말에 서봉추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질렀다.
“뭐요?”
“군에서 활을 나눠 주지 않았느냐? 누가 그걸 쓰라 했지? 사사로이 무기를 소지하면 군의 기강이 어지러워진다. 냉큼 내놔라.”
이제 서봉추에게 삼석궁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잘 때도 끌어안고 잘 정도였으니까. 좀 거칠긴 해도 바보는 아닌지라 서봉추는 유규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며칠 굶었다가 살찐 양을 만난 늑대처럼 눈을 반짝이는 유규의 모습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퉤. 좋은 무기를 소지하지 말란 말은 못 들었소이다. 군의 돈을 아낄 수 있는 좋은 일을 왜 막으려 하는지 모르겠소.”
“좋은 무기? 좋은 무기도 너희 손에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놓으라면 내놔.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겠단 거냐? 이리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써? 노역도 못 시켜 먹겠다!”
안하무인인 자를 누가 쓰냐고?
서봉추 같은 일개 병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