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53
교랑의경 253화
천천히 층계를 내려온 정교랑은 기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활을 들고 있는 형제들을 죽 둘러봤다.
“오라버니들은, 늘 반지를 지니고 다니죠.”
정교랑이 앞에 있는 한 형제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구리 반지를 보며 말했다. 이미 누렇게 마모되어 반들거리는 반지였다.
“나, 난 습관이 돼서…….”
형제가 쑥스러워하며 쭈뼛쭈뼛 말했다.
“네, 습관이 됐겠죠.”
정교랑이 형제들의 앞을 쭉 걸었다.
“오라버니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단련하는 데 습관이 됐어요. 무기를 손에 들고 언제든 싸울 태세를 취하는 게 습관이 됐죠. 춤과 노래가 있는 곳에 누워 있어도, 공격을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는 데 습관이 됐어요.”
그 말에 서무수 형제는 물론이고 오 관리인과 이대작도 호흡이 거칠어져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뼛속 깊이 흐르는 혈기야말로 가장 없애기 힘든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는, 군영의 소집 명령도 없고, 동포들이 싸우고 맞서며 내지르는 비명도 없는 곳이에요. 적군이 쳐들어올 때 나는 말발굽 소리도 안 들리죠.”
정교랑은 서봉추 앞에 서서, 그가 꼭 쥐고 있는 장궁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여기에서 활은 벽에 걸어 두는 장식품일 뿐이고, 누이인 나와 함께 갖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에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활을 손에 넣었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죠.”
정교랑이 손을 풀고 돌아서서 천천히 돌아왔다.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 맹수고, 용은 깊은 못에 있어야 영물인 법이죠. 오라버니들의 활은, 전장에 있어야 해요. 전장에서 적의 가슴을 쏴야, 천금의 가치가 있는 활이 되죠. 그래서 오라버니들은 값비싼 활을 사러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 활을 여기 걸어 두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정교랑은 층계 앞에 똑바로 서서 서무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오라버니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이게 선물이었구나. 이게 선물이었어.
형제들은 정교랑의 말에 심취해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여인의 갈라지고 거친 음성이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탈영병.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도망쳤다고는 하나, 도망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도망치는 길에 싸우다 다쳐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에도, 겁이 난다기보다는 꺼림칙한 마음이 컸다. 병사라면 전장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하게 지낼 땐 그렇게까지 마음에 걸리진 않았다. 언젠가는 가난을 벗어나리라는 생각에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돈이 풍족해지자, 밤에 자다 깨기라도 하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어느새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이. 도망치기 시작한 그날, 형제들의 혼은 반쯤 서북에 두고 왔는지도 몰랐다.
– 호랑이는 산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우리 속에서 배불리 먹는 걸 원치 않아요.
– 그래서 오라버니들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 금산에 앉아 한평생 태평하게 사느니, 가서 공훈을 세우고 치욕을 씻어요.
– 오라버니들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거기서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 버려요.
실패한 곳에서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자.
마당 안은 고요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전부 새로 시작하는 거야! 죄를 씻고, 다시 시작하자!
본디 도망친 것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의지할 곳도 없는 일개 병정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푼단 말인가. 이제 억울함을 풀고 누명도 벗었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게 됐다.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
이번엔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죽기는커녕 소원을 이루게 됐다. 인생에 어찌 이리 놀랍고 기쁜 일이 많은지.
서무수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어쩌다가, 이렇게 운이 좋아진 걸까? 우리 따위가 뭐라고, 하늘이 이리 어여삐 여기시는지.
“선물 두 개가, 다들 마음에 들어요?”
정교랑이 재차 물었다.
“마음에 들어.”
서무수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정교랑은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서무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좋다고.”
서무수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뭐라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서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무수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따라 웃었다.
“좋아!”
“좋아!”
“좋아!”
마당에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대작은 코끝이 찡한지 코를 비볐다.
“주인어른들께서 정말 떠나시네요. 이거 섭섭해서 어쩝니까.”
이대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울긴 뭘 울어. 못난 사람 같으니.”
옆에서 오 관리인이 대꾸했다.
“이건 큰 경사야. 주인어른들께서 무공을 세우고 영웅이 되게 생겼잖아.”
이대작이 네, 네, 하며 끄덕이고, 고개를 들어 오 관리인을 쳐다봤다.
“형님, 뭐 하는 겁니까? 왜 고개를 그리 들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닐세. 하늘을 보는 거야.”
오 관리인은 뒤로 돌아서더니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참 좋네…….”
날이 어둑해지자, 마당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권하던 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점심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탓에, 주량이 뛰어난 형제들도 거의 만취해 곯아떨어졌다.
“술이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거야.”
취기가 오른 오 관리인은 알딸딸한 채로 중얼거리며 이대작, 금가아와 함께 곯아떨어진 형제들을 방 안으로 옮겼다. 이들은 형제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혀 준 다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정교랑이 회랑 아래에 서서 배웅했다.
“고생이 많아요, 관리인.”
“고생은요. 아닙니다. 고생할 수 있는 것도 복이죠.”
오 관리인이 껄껄 웃었다. 방금 전 형제들을 방으로 옮긴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앞으로 식당을 운영할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 말이 통한 듯했다.
이대작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아니지, 고생도 아니야. 이런 걸 고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진짜 복이지.
정교랑 저택의 연회가 파할 무렵, 주씨 저택의 연회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주육낭의 짐은 벌써 서북으로 떠난 후였다. 주육낭은 서북으로 새로 부임할 이들과 함께 사흘 후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내일은 주육낭이 군영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어린 아들과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친과 달리 주씨 가문 사내들은 딱히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에선 이런 작별이 대대로 이어졌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는 겪을 운명이었고, 이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 가면 숙부님과 백부님 말씀 잘 듣고.”
“전장은 연무장과 달라. 많이 보고 익히도록 해라.”
부친과 사촌들이 경험을 나눠 주었다.
“이거 내가 비싸게 주고 산 병서입니다. 천금을 줘도 못 구한다고요.”
“오라버니, 이거 오라버니를 위해 구한 호신용 부적이에요.”
형제자매들이 작별 선물을 건넸다.
푸짐하게 차린 연회 음식에 술과 노래가 곁들어지면서 주씨 저택의 대청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고, 연회는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씻고 나자 취기가 어느 정도 가신 주육낭은 쉬러 가는 대신 대청에 앉았다.
“공자님, 늦었습니다. 일찍 쉬세요.”
시녀들이 말했다.
주육낭은 대청에 놓인 선물들을 죽 훑었다. 형제자매가 준 것도 있고, 친구들이 준 것도 있었다. 대부분 평안과 축복을 비는 뜻을 담은 것이어서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는 게 전부냐?”
주육낭이 물었다. 시녀들은 영문을 모르겠는 듯 대답했다.
“네, 공자님. 요 며칠 받은 건 전부 여기 있어요. 가져가시려고요?”
주육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시녀들은 더 묻지 않고 예를 표한 후 물러났다.
잠시 홀로 앉아 있던 주육낭은 탁자 앞으로 와서 크고 작은 선물들을 하나씩 뜯어 보았다.
없군, 없네, 없어.
저번에 가장 마음에 드는 화살을 고르라 하지 않았다고, 토라져서 이젠 왕래도 안 하겠단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주육낭이 손을 멈췄다. 그건 아니겠지.
더는 왕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한 건 자신이었다. 그 똑똑한 사람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주육낭은 팔베개를 하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가 고개를 들이밀고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공자님께서 많이 취하셨나? 왜 여기서 주무시지…….”
“일단 좀 기다리자.”
다른 시녀가 말했다. 하지만 대청에 있던 소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앉더니 계속해서 선물들을 열었다. 두 시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눈짓을 주고받고는 회랑 아래에 앉았다.
주육낭의 손이 멈췄다.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여인은 내가 떠나는 것도 모르는데. 안다 해도, 모르는 것처럼 굴겠지.
주육낭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벌러덩 누웠다. 발을 휘둘러 탁자와 선물들을 차 버리고는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안에 있는 소년이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자 시녀들은 가볍게 불러 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시녀들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누운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울 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어 시녀들은 이불을 가져다 덮어 주고, 안에 있는 불을 전부 끈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실내에서 눈을 뜬 소년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깊은 밤, 만물은 고요하기만 했다.
한편 정교랑의 대청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안에서 시녀가 소곤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약 냄새도 났다. 얼마 안 가 종이 문이 열리더니, 시녀와 반근이 각자 바구니를 끼고 정교랑을 따라 나왔다.
통로를 지나 뒷마당으로 가자 산석처럼 우뚝 서 있던 사람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셋째 도련님, 깨셨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깜빡 잠들었네.”
서무수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멋쩍게 웃다가 곧 흠칫 놀라며 물었다.
“아니, 누이는 왜 안 자고?”
“차를 말리려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시녀와 반근이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서무수에게 보여 주었다.
“아씨께서 직접 하신 거예요.”
“진 공자께서 가져다주신 차나무에서 마침 잎을 딸 때가 됐거든요.”
시녀와 반근의 말에 서무수는 고개를 숙여 바구니에 있는 찻잎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누이는 정말 대단해.”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이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마음 푹 놓고 가서 자요. 이 누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서무수가 따라 웃으며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정교랑은 잠자코 있는데, 서무수가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사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 알아.”
서무수가 말했다.
그래서 걱정을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몇 걸음 뒤에 있던 시녀와 반근이 눈을 마주치며 입을 삐죽거리고 웃었다.
“저기, 앞으론 밖에 자주 놀러 나가. 갑갑하게 혼자 집에만 있지 말고.”
“난 외롭지 않아요.”
정교랑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요, 오라버니.”
서무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금가아가 깔아 놓은 대나무 자리 앞에 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서무수가 손을 뻗자 시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건넸다.
“남들 눈엔, 내가 가엾어 보이겠죠.”
정교랑은 소매를 걷고 서무수가 건넨 바구니에서 차를 꺼내 널며 말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무서울 수도 있고요.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일 뿐, 내 삶이 아니에요.”
그래. 그건 남들 생각이지. 이 여인은 스스로가 가엾지도, 무섭지도 않으리라.
서무수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틀에 박힌 사람이라 그래.”
“그러니까 걱정 마요, 오라버니. 잊지 마요. 오라버니들을 만나기 전에도, 난 늘 이렇게 지냈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들이 떠나도 변함없이 이렇게 지낼 것이다. 어쩌면, 오라버니들이 없는 삶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지.
너무나도 솔직한 말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솔직한 말.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변함없는 사실이리라.
오라버니들을 만난 것도 기껏해야 일 년밖에 안 되지 않았는가. 일 년은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그녀에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지만, 서무수 형제들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서무수는 말이 없었고 정교랑 역시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은 차를 널고, 한 사람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바구니에 있던 찻잎을 금세 다 널었다.
“그래. 앞으로의 일은, 누이 혼자 해. 이 오라비는 못 도울 것 같아.”
서무수가 손을 털며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어서 가서 자. 요 며칠 많이 고단했겠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시녀와 반근도 예를 올린 후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등롱을 들고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며 멀어지는 여인의 모습을, 서무수는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