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72
교랑의경 272화
마차가 흔들흔들 경성 거리를 지나갔다.
“여긴……?”
마차에서 내린 정사낭이 눈앞에 있는 점포를 보며 물었다.
이춘당. 평범해 보이는 약포지만 오가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시녀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고, 정사낭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뒤따라 들어갔다.
“정 낭자의 약은 아직도 없어요?”
“없으면 할 수 없죠. 그럼 여기 의원한테 진료를 받을게요. 약 좀 지어 줘요.”
“정 낭자의 약포잖소. 정 낭자가 직접 진료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집보단 낫겠지.”
약포에 있는 일고여덟 명 정도의 손님들이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그들은 의원에게 차례로 진료를 받았다.
“반근 낭자.”
약을 짓고 있던 점원이 시녀에게 인사하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내를 둘러봤다.
“약은 아직 다 있지?”
시녀의 물음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약을 지으려는 건가? 정사낭은 여전히 영문을 몰랐지만, 시녀는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또 밖으로 나갔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정사낭은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수 없이 시녀를 뒤따라 나왔다.
마차가 신선거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정사낭은 묻는 것도 입이 아픈지 잠자코 시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녀가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별실로 들어갔다.
정사낭은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공자님, 여기 어떠세요?”
시녀가 물었다.
“좋네. 전에 얘길 들어 본 적 있어. 여기가 그렇게 비싸다던데, 보니까 비쌀 만하네.”
정사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반근 낭자, 자주 오는 곳이야?”
정사낭이 물었다.
보아하니 꽤 익숙한 곳 같네. 눈 감고도 척척 걸어 다닐 것 같아. 주씨 가문에서 누이를 이런 데 자주 데려오나? 이리 비싼 곳을…….
하지만 세상엔 비싸다는 것으로 신분과 정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있다. 신선거가 문을 닫기는커녕 점점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주씨 가문에서 누이를 그리 잘 대우했나?
시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장부 세 권을 든 노인 하나가 들어왔다.
“오 관리인, 이분이 사공자세요.”
시녀가 말했다. 오 관리인은 웃으며 꿇어앉아 정사낭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공자님을 뵈옵니다.”
정사낭은 얼른 답례를 올리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분은 오 관리인이세요. 태평거와 신선거, 이춘당의 총관리인이죠.”
시녀의 말에 정사낭은 흠칫 놀랐다.
“공자님, 세 점포의 장부입니다.”
오 관리인이 장부 세 권을 내밀었다. 정사낭은 멈칫하며 고개를 숙여 장부를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공자님, 오 관리인은 세 점포의 총관리인이고, 저희 아씨는 세 점포의 주인이세요.”
시녀가 말했다.
누가? 정사낭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시녀를 쳐다봤다.
“누가?”
정사낭이 소리쳤다.
“저희 아씨요. 공자님의 누이, 교랑 아씨가, 이 세 점포의, 주인이세요.”
시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사낭은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날 데리고 세 곳을 차례로 돌았구나.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랑 잘 아는 사이였구나. 이들 것이었어! 이들 것이었다니!
도, 돈을 긁어모으는, 이 유명한 점포가, 누이 것이었다니…….
정사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전대를 쳐다봤다.
그래서 아까 시녀가 돈은 부족하지 않다고 했구나. 그래서 누이에게 돈을 주어도 시큰둥한 표정이었구나. 몇 푼 안 되는 내 돈은 누이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 세 점포는 아씨 거예요.”
시녀는 정사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공자님께 맡기려고 해요.”
정사낭은 또다시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정사낭이 물었다.
“네. 저희 아씨께서 병이 나셨어요. 공자님은 아씨의 오라버니이시니, 수고스럽겠지만 이 점포를 맡아 주세요.”
시녀는 손을 뻗어 정사낭 앞으로 다시 장부를 밀었다. 정중하면서도 긴장되는 표정이었다.
정사낭이 벌떡 일어났다.
“누이한테 병이 났다고?”
정사낭은 방금 전보다 훨씬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그저 놀라기만 한 게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무슨 병이더냐? 왜 병이 났어? 언제 병이 난 것이냐? 너도 참, 진작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왜 이리저리 사람을 끌고 다녀? 이딴 건 또 뭐고? 지금 이런 걸 따질 때더냐!”
정사낭은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장부가 발에 차이자 그대로 걷어차 버리고는 황급히 달려나갔다.
시녀는 발에 차여 저쪽으로 날아간 장부를 보며, 맥이 탁 풀린 듯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세상살이가 힘겹고 야박하다지만,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어.
갑자기 병이 나다니? 무슨 병이기에 갑자기 이렇게 돼?
정사낭은 침실 앞에 꿇어앉아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한나절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정사낭이 불쑥 입을 열었다. 깊이 잠든 듯 보이는 여인은 가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시녀는 고개를 숙였다.
“아씨께서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세요.”
“그럼 왕십칠 때문에…….”
정사낭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십칠이 어떤 인사인지는 정사낭 자신이 똑똑히 알았다. 설마 그 자식 때문에 화병으로 앓아누운 건가?
“아니에요.”
시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일이에요. 그건 묻지 마세요.”
정사낭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럼 의원을 더 찾아봐야겠다. 의식이 있으니 구할 수 있을 거야.”
정사낭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찾아봐야죠. 여러 분들이 도와주고 계세요.”
정사낭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 나는 서원에서 알아볼게. 명의를 아는 이가 있는지 수소문해 봐야지.”
정사낭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에요.”
시녀가 정사낭을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춘 정사낭은 불안한 표정으로 시녀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정사낭이 물었다.
너무 유약한 성격이야. 좋으면서 좋지 않기도 해.
시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아씨의 점포를 지킬 사람이 필요해요.”
시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점포. 아, 그렇지. 점포가 세 개 있었지. 점포를 떠올린 정사낭은 순간 가슴이 쿵쾅댔다.
그 유명한 점포가, 자신에게 주는 상으로 한번 다녀왔다며 동창들이 떠들어대던 그 점포가, 놀랍게도 누이의 것이었다니! 그걸, 어떻게 이룬 거지?
“공자님.”
시녀가 다시 한번 정사낭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정사낭은 상기된 얼굴로 시녀를 어색하게 쳐다봤다.
“나더러 뭘 해 달라는 건데?”
정사낭이 물었다.
정사낭은 다시 신선거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호기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을 보며 정사낭은 긴장도 되고 어색하기도 해서 경직된 모습이었다.
“여러분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정사낭 옆에 꿇어앉은 시녀가 입을 열었다.
“아씨께서 병이 나셨어요.”
오 관리인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태평거와 이춘당의 관리인과 태평 두부를 맡고 있는 손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럼 괜찮으신 겁니까?”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다만 점포의 일은 당분간 여기 계신 사공자께서 맡아 주실 거예요.”
시녀가 정사낭을 보며 말했다.
“넷째 도련님을 뵈옵니다.”
새로 데려온 두 관리인은 세상 물정에 밝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시녀의 소개에 얼른 큰절부터 올렸다. 손재도 뒤질세라 얼른 절을 올렸다.
“별, 별말씀을.”
정사낭은 더욱 경직된 모습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오 관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장부 몇 권을 내밀었다.
“세 점포의 장부입니다. 공자님께서 확인해 보시지요.”
정사낭은 또다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집에 계신 부친이 떠올랐다. 집안에 있는 집사와 바깥 점포를 맡은 관리인들은 매달 한 번씩 모여 부친 앞에서 장부를 보고하곤 했다. 그때 본 부친의 얼굴엔 위엄이 서려 있었고, 흐뭇해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산처럼 정씨 일가를 든든히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런 부친에 대해 존경의 마음은 있었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가진 일은 없었다. 정씨 가문의 법도에 따르면 넷째인 자신이 장부를 만져 볼 일은 평생 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오다니!
정사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장부 하나를 들고 펼쳐 보았다. 정사낭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정사낭은 또다시 반사적으로 장부를 덮었다. 너무 놀라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야!
정사낭이 관리인들 앞에서 놀라고 겁먹은 표정을 티 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사낭은 관리인들이 물러가고 시녀만 남자,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옷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난 이런 거, 볼 줄 모르는데.”
정사낭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부끄럽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시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소인이 볼 줄 알아요.”
정사낭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곧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그럼, 난 뭘 도우면 되지?”
정사낭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난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이라……. 사실 공부도 썩 잘하는 건 아니지만.”
시녀는 정사낭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자님, 공자님은 아씨를 대신해 세 점포를 잘 지켜 주시기만 하면 돼요. 다른 사람이 못 빼앗게요. 공자님, 이 점포들은 아씨께서 심혈을 기울여 이루신 거예요. 아씨께서 병이 나아 의식을 되찾으셨을 때, 아무것도 없는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시녀는 목멘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며 엎드려 절을 올렸다.
“어서 일어나, 어서. 그야 당연하지.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 걱정 마라. 내가 누이를 대신해 잘 보고 있을게. 누이가 깨어날 때까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멈칫했다.
만에 하나, 깨어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스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그러다 안 깨어나면? 또 바보가 되면?”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마시지도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그 천것이 감히 정씨 가문 사람을 끌어들여 막다니. 정씨 가문 사람 치고 좋은 물건이 있기나 해?”
“그러니까요. 우리 집 혼수를 가져가 놓고 교랑이 굶어 죽도록 내팽개쳐 둔 게 누군데요. 그 재산은 절대 그 사람들한테 못 넘겨요!”
주 부인은 더욱 씩씩거렸다.
“그 천것은 정씨 가문 사람이니 당연히 정씨 가문 편이겠죠. 내가 당장 가서 내쫓아야겠어요.”
주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서두를 것 없소.”
주 노야가 손을 들어 주 부인을 제지했다.
“지금 이 판국에 안 서두르게 생겼어요?”
주 부인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그래 봤자 어린애들 둘인데, 겁낼 게 뭐 있어?”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 경성 바닥에서 제깟 것들이 감히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실컷 놀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래도 빨리 우리 손에 넣어야 마음이 편하죠. 정씨 가문의 그 고양이 같은 것들이 비린내라도 맡고 달려오는 날엔 일이 성가셔져요.”
“올 테면 오라지, 겁날 게 뭐 있소? 여기가 강주도 아니고.”
주 노야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가 놈이 오거든, 내가 통곡하며 돌아가게 만들어 주지!”
주 노야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차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뜨거운 차 때문에 손을 놓치며 차를 엎는 바람에 대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