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38
교랑의경 338화
“내가 가면 안 좋은 거 아니오?”
어두운 밤, 정씨 가문의 쪽문이 열리고 등롱을 든 여종 두 명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여종들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좋을 게 뭐 있어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정 이노야의 등을 떠밀면서 걸어 나왔다.
“당신은 그 애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딸을 보러 가는 건데, 얼마나 좋아요.”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의 앞뒤로 여종이 두 사람씩 붙어 불을 밝히며 남정으로 향했다. 불빛이 환하게 켜진 남정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저쪽이 집 짓는 곳이에요.”
정 이부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정 이노야에게 말했다.
“어쩜 저렇게 밤낮으로 일을 해대는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빼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죠.”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마지못해 가지만, 그 아이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소. 내가 그 애랑 할 얘기가 뭐 있다고.”
정 이노야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거예요.”
정 이부인이 기쁘게 말하고는 정 이노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꼈다.
“역시 당신만큼 나를 아끼는 사람은 없어요.”
밤이었지만, 부인의 남사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란 정 이노야는 정 이부인의 품에 있던 자신의 팔을 빼냈다. 정 이부인은 해맑게 웃고는 조용히 정 이노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좁은 골목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리를 들은 주위의 가축들이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부인, 곧 도착합니다.”
앞서 길을 안내하던 여종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런데 여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정 이부인 일행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는 이들이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 이노야의 몸 뒤에 숨어 있던 정 이부인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주씨 가문의 시종들은 다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나?
“나다. 너희는 누구냐.”
정 이노야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종들이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등불을 비췄다. 그들의 눈앞에는 야윈 소년 두 명이 서 있었다. 소년들은 한겨울인데도 손목이 훤히 드러나는 얇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어두운 밤과 한데 섞여 더욱 새까매 보였다.
저건 남정의 거지새끼들이잖아!
여종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꺼지거라, 썩 꺼져!”
여종들이 아이들을 쫓아내자, 아이들은 별말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왔는데, 여종도 네 명 있었어요. 무기는 없어 보였고요.”
“남자는 한 명이에요.”
두 소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남정 골목에 울려 퍼졌다. 정 이노야 일행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저게 뭐야? 정찰하는 거야?
소년들의 목소리와 함께 낮고 까만 집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골목 끝에 있던 정교랑의 거처에도 사람들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 하는 사람들이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지금 우리를 도둑놈 취급하는 거야, 뭐야!
정 이노야가 소매를 홱 내치고 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붙잡아 세웠다.
“우리예요.”
정 이부인이 말했다. 정 이부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제야 정 이노야 내외를 알아보았다.
“썩 꺼지지 못할까!”
정 이노야가 수군대는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쳤지만,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고 길을 막아섰다.
“이노야, 아씨를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아씨께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와도 안 가신다고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정 이부인이 다시 고함을 치려던 정 이노야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 아니. 데려가려는 거 아니에요. 교랑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게 뭐 어때서요. 우린 교랑과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왔어요.”
정 이부인은 자신이 이들 앞에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아부 섞인 웃음까지 지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날이 어두워서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이는 없었다.
정교랑의 집 앞을 막아선 사람들은 조용히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정 이노야가 화를 내려던 찰나, 남정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씨께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그가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 정 이노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버지가 먼저 딸을 만나러 오는 것도 여간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닌데, 딸의 의사까지 물어봐야 한다니!
정 이부인이 서둘러 정 이노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혼수, 앞길.”
정 이부인이 작은 소리로 정 이노야에게 속삭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기회만 제대로 잡는다면 집안의 모든 혼수를 장악할 수 있으며, 평생 닿을 수도 없을 법한 이들과 사돈을 맺을 것이다. 비단 정 이노야 내외에게만 좋은 관계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도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될 게 틀림없었다.
“당신은 우리 희가아(熙哥兒)까지 남 눈치나 보고, 비위 맞추면서 살게 하고 싶어요?”
정 이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희가아는 정 이노야가 제일 아끼는 아들이기에, 정 이노야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저 바보, 아니, 저 아이 눈치를 보고 살 건 아니잖소.”
정 이노야의 말에 정 이부인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정교랑의 집 앞을 지키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노야, 부인, 아씨께서 안으로 들라고 하십니다.”
“이거 봐요. 친딸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은 안 보더라도 당신은 보네요.”
정 이부인이 낮게 속삭이고는 앞장서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친딸이 아니었더라면, 이 많은 일도 없었겠지.
정 이노야는 걸음을 옮기기 전, 새까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언뜻 여인의 얼굴 하나가 스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정말 재수 없어. 애초에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정 이노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마당에는 등롱 두 개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등롱이 흔들거릴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던 정 이부인이 등롱을 자세히 쳐다보니, 등롱 아래에 달린 풍경이 보였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비좁고 허름한 집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있던 반근이 예를 올리고 문을 열자, 정 이부인이 얼른 시선을 거두고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울먹였다.
“우리 아가,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다니.”
정 이부인이 걸음을 옮기자, 정 이노야도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비좁은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서 있을 만한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여기서 지내지 말고, 돌아가서 지내거라. 이게 다 무슨 꼴이더냐.”
정 이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정 이노야는 흠칫 놀랐다.
은은한 등불 아래 깃털 실로 짠 병풍 앞으로 품이 넓은 비단옷을 걸친 소녀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이 방 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저, 저게 그 바보라고?
정교랑의 자태에 정 이노야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경성의 그 수많은 집안에서 혼담을 넣으러 온 거였군!
“이 얘기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교랑의 목소리에 정 이노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귀찮음이 한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인지라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친딸? 세상 어느 친딸이 아버지한테 이따위로 얘기해?
정 이노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정 이부인이 재빨리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널 아껴서 그래. 교랑, 이런 곳에서 지내기에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교랑이 정 이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공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초장에 분위기를 띄우려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예의거늘, 이게 지금 무슨 태도야!
정 이노야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집안을 고발해? 어찌 감히!”
정 이노야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손님 배웅하거라. 난 좀 쉬어야겠어.”
정 이노야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정 이부인이 꽉 붙잡아 눌렀다.
“교랑, 교랑. 우리는 너한테 따지러 온 게 아니란다. 이번 일은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정 이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게 지금 잘하는 짓이라고?
정 이노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건 없잖아! 저 아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뻔히 알면서!
저 애가 고발한 사람은 정씨 가문의 손윗사람이야. 무려 나의 친형님인데, 이걸 잘했다고 하는 건 내 따귀를 때리는 것과 다름없잖아!
“당신······.”
정 이노야가 부인을 향해 벌컥 화를 내려던 그때, 정 이부인이 먼저 그의 팔을 탁 치며 말했다.
“가족끼리 못 할 말이 뭐 있어요. 교랑, 힘들면 먼저 쉬렴.”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에게 눈짓했다.
이미 정교랑의 하인들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을 뻔한 적이 있는 정 이부인이었다. 정 이부인은 한시라도 빨리 태도를 밝히지 않으면, 저 바보가 사람들을 시켜 자신들을 내쫓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 이부인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가 바라는 건 올바른 판결일 뿐이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정 이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정 이노야의 소매를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올바른 판결을 얻어내야지.”
“제가 시집갈 때, 혼수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거에 동의하셨었죠?”
정교랑이 물었다.
“그, 그건 다 그 사람들 마음대로 정한 거야. 집안에서는 네 아버지의 말이 먹히지 않아.”
정 이부인이 서둘러 변명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청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어요?”
뭐라고? 증언?
정 이노야와 정 이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
“이에 대한 판결을 내고자 해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비좁은 실내에 울려 퍼졌다.
“내가 혼수도 없이 시집가는 데다가, 그 혼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남긴 혼수라는 것에 대해서요. 그러니 공당(公堂)에서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증언이라고?
정 이부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순간 자신이 이 야밤에 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점포와 농토들을 빼앗아 가려 한다는 말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뺏고 싶다고 해서, 정말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 이부인은 그 후에 들은 소식에 훨씬 놀랐다. 주씨 가문에서 혼수 건으로 정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이었다.
주씨 가문이 혼수를 요구하는 것은 정 이부인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 이유가 뭐겠어, 다 돈 때문이지. 솔직히 주씨 가문에서 혼수를 달라고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정 이부인은 일찌감치 결정을 내렸다. 대방에서 주는 국물이나 얻어먹을 바에는, 주씨 가문과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게 낫다고.
따지고 보면, 정교랑의 혼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교랑의 부모인 이노야와 자신뿐이라고 정 이부인은 생각했다. 정 대노야 내외와 대판 싸울 배짱만 있다면, 그들 내외 쪽에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노야 내외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던 찰나, 정교랑이 대노야를 관청에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이방 내외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을 본 어부가 될 수 있었다. 혼수와 정 대노야에 관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위해 그들 내외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바로 정교랑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들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 이노야 내외가 오늘 정교랑을 찾아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교랑이 내쫓긴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분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정교랑을 위해 좋은 혼처를 알아보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방 쪽에서 오가는 혼담은 신경 쓸 것 없으니 마음껏 일을 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