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90
교랑의경 390화
“잘 생각해 봐요. 낭자가 아는 일이니, 이건 낭자의 일이에요. 나와는 무관해요.”
정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다 못한 반근이 끼어들었다.
“사람이 어쩜 그래요!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어디 덧나요? 알겠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고요!”
반근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래도 군자가 함부로 허언을 하면 안 되지.”
정평이 억울한 듯 대꾸했다. 이때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정평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군자는 개뿔. 풍수를 봐 주기로 한 걸 없던 일로 치고 싶어?”
눈을 부릅뜬 조 집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호통쳤다. 정평은 그제야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교랑에게 말했다.
“좋아요, 알겠어요. 내가 꼭 더 강해지도록 노력할게요.”
정교랑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꼭 더 강해지셔야 합니다. 제게 뭘 시켜도 다 해내겠습니다.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가진 돈을 다 드리겠습니다. 전부 다요. 더 필요하시다면 더 벌어 올게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알겠어요. 알겠으니 일단 일어나서 얘기해요.”
정평이 어색하게 웃으며 정교랑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일단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요.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
반근이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조 집사와 시종들이 주위의 구경꾼들에게 물러나라고 호통을 쳤다.
정교랑이 인파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자, 정평과 점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미친 사람이었구나.”
점원이 중얼거렸다. 정평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미친 사람이야.”
정평이 멀어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정교랑은 더 이상 반근의 부축 없이 곧은 시선으로 앞을 보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뒤로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교랑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웅성대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며 비웃었다.
그들은 정교랑이 걸어온 눈물겹고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고단한 여정을 알 턱이 없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정월이 된 남정에는 새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골목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여인들도 하나둘씩 집 밖을 나섰다.
“정 아씨께서 돌아오셨대!”
“진짜? 드디어 돌아오셨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새로 지어진 정교랑의 저택을 쳐다보았다.
골목의 떠들썩함에 비해 저택 안은 몹시 조용했다. 정교랑을 보러 온 정계와 다른 사람들을 조 집사가 예의 있게 막아섰다.
“아씨께서 피곤해하시오. 오늘은 그만 쉬셔야 하니, 다음에 다시 오시구려.”
조 집사가 조용히 말했다.
정교랑이 먼 길을 다녀와서 쉬어야 한다는 것쯤은 정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을 만나지 못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보여야 할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 했다.
정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어른께서는 몸종을 따로 두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이들이 여기서 물을 끓이고 밥 짓는 것을 도우면 어떨지요?”
정계가 뒤에 서 있는 아낙들을 가리키자, 아낙들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아니오. 아씨의 원칙을 다들 알고 있잖소.”
조 집사는 정계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 아씨는 절대 우리를 아랫것으로 대하지 않는다니까. 도리어 우리를 손님 모시듯이 한다고.”
지난번에 정교랑을 따라 나들이를 갔던 두 아낙이 골목 안에서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의 거처에 갔다가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캬,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그 아씨를 따라 나들이 다녀온 것만으로도 이번 생엔 더 이상 여한이 없어. 거기서 먹은 것이며, 마신 것이며.”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고 경청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야기 속의 두 아낙의 자리에 자신들을 대입해 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두 아낙을 그렇게 대했으니,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있었어도 똑같이 손님을 모시듯이 대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을 그리 살뜰히 챙겨 주는 아씨가 이 세상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춘란이 부채질을 열심히 해댄 덕에 화로에 지핀 불이 더욱 거세졌다. 불 위에 올려둔 솥에서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너무 센 불로 하지 말고, 천천히 우리면 돼.”
반근이 걸어들어오면서 말했다. 춘란은 당황해하며 서둘러 부채를 내려놓았다.
“반근 언니.”
춘란은 자신에게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반근을 불렀다.
– 나랑 아씨는 여기서 낚시 중이었어. 갑자기 달려와 놀라게 한 사람은 너잖아.
– 나한테 넷째 공자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있어.
춘란의 귓가에 반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불러 놓고 왜 멍하니 있어?”
반근이 웃으면서 춘란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동생을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
정신을 차린 춘란이 반근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네가 그때 우리 아씨를 살펴 줬던 게 고맙지.”
반근이 말하자 춘란은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아휴, 그러지 마. 언니가 먼저 날 도왔잖아. 언니가 아니었다면, 공자님은 벌써 돌아가셨을 거야.”
“우리 아씨께서는 사소한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하셨어. 그러니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귀하게 여기고 감사해야지.”
반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이, 둘이 무슨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다 밥 다 타겠다.”
금가아가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서로에게 깍듯하게 예를 표하던 두 몸종이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아씨께서 일어나셨다.”
조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근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춘란과 함께 밥상을 차려 안쪽 마당으로 걸어갔다.
저녁이 되자, 등롱이 마당 안을 밝게 비췄다. 천천히 열리는 대청 문틈 사이로 단정히 앉아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아직 이른 봄의 경성은 다소 쌀쌀했다. 진안 군왕은 커다란 두봉을 두르고 있었다.
태후궁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은 곧바로 몸을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태후궁 앞에 있던 내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을 붙잡았다.
“전하,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진안 군왕은 어쩔 수 없이 태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궁 안은 향기롭고 포근했다. 궁 안에는 태후와 귀비, 비빈들과 낯선 낭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진안 군왕이 들어오자, 낯선 낭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마마께서 주셨던 향음자(香飮子: 고대의 우유차)를 얻으러 왔습니다. 육가아가 무척 좋아해서요.”
진안 군왕이 태후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태후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저, 육가아를 혼자 두면 안 돼서요.”
진안 군왕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위낭, 앉거라.”
태후의 단호한 태도에 진안 군왕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에 야윈 것 좀 봐라.”
태후가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비빈들에게 말했다. 비빈들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낯선 낭자도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에이, 야위긴요. 훤칠해진 거죠. 마마께서는 제가 더 준수해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대전 안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낯선 낭자도 소매를 들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준수하다는 것쯤은 잘 알지.”
태후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육가아는 네 아우고 너는 육가아의 형이다. 네가 육가아를 아낀다고는 하나, 꼭 네가 직접 수발을 들 필요까지는 없지. 수발을 드는 아랫것에게는 아랫것의 본분이 있고, 너에게도 너의 본분이 따로 있는 법이야. 위낭, 설마 평생 육가아의 곁을 지킬 셈이냐?”
“당연하죠. 전 평생 육가아의 곁을 지킬 겁니다. 마마, 저는 봉작도 필요 없고,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경성에 남아 있고 싶을 뿐입니다. 마마,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아무도 너를 내쫓지 않는단다.”
태후가 서둘러 아니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토닥였다.
“육가아만 챙기지 말고, 너 자신도 챙기란 말이었어.”
진안 군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태후에게 예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태후는 못 말리겠다는 듯 진안 군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낭이 하나밖에 모르는 성격이라, 누구를 좋아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애야. 애가가 몸이 한창 안 좋을 때 부득이하게 궁을 따로 내주고 위낭에게 나가서 지내라고 했더니, 위낭이 가기 싫다고 어찌나 울고불고하던지. 애가는 그때 위낭이 아주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태후가 웃으면서 비빈들에게 말했다.
“전하는 정이 많은 분이죠. 보기 드물어요.”
귀비가 웃으면서 뒤에 앉아 있던 소녀를 슬쩍 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짓했다.
“이런, 실례를 했네. 아운(阿云), 어서 전하께 인사 올려야지.”
낯선 낭자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진안 군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소녀 오(吳)씨, 전하를 뵈옵니다.”
소녀는 가녀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쪽은 현비 주씨의 조카예요. 모친과 같이 경성에 올 일이 있다길래, 현비가 이 아이더러 궁에 들르라 했대요.”
귀비가 미소 띤 얼굴로 진안 군왕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진안 군왕은 대답 대신 가벼운 목례로 답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소매를 들어 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문가에 꿇어앉아 있던 내시 하나가 조용히 물러났다.
“숙혜 공주가 주 현비의 거처로 옮겨갔는데 어찌나 좋아하던지. 주 현비의 한 살배기 어린 공주도 숙혜 공주를 그렇게 좋아해서, 둘이 매일 잠도 같이 잔다네요.”
귀비가 웃으면서 주 현비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아이들은 많을수록 좋죠.”
비빈 한 명이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진안 군왕은 물러가겠다고 예를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향음자는 주 현비한테 있어요. 전하께서 직접 받아가시지요.”
귀비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옆에 앉아 있던 오 낭자를 쳐다보았다.
“아, 가는 김에 아운을 주 현비 처소로 데려다주시면 더 좋겠네요.”
귀비의 말에 바짝 긴장한 오 낭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당치 않습니다. 전하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순 없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에이, 수고랄 것도 없죠.”
귀비가 재빨리 오 낭자를 재촉했다.
“어서 가 보렴.”
오 낭자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옮기자, 오 낭자도 고개를 숙인 채 좁은 보폭으로 뒤따라갔다.
소년과 소녀가 자리를 뜨자, 대전 안에 있던 비빈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죠?”
귀비가 웃으면서 물었다.
“주씨 가문 사람이니, 교양도 있는 아이겠지.”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의 말이 맞다. 위낭의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되겠어. 이렇게 지내다가는 폐인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마마, 너무 염려치 마세요. 혼례를 올리고, 챙겨줄 아내가 생긴다면 달라지겠죠. 경왕은 군왕이 챙기고, 군왕은 아내가 챙기도록요.”
귀비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그래야지.”
근심을 걷어낸 태후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대전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었을 리 없는 진안 군왕은 오 낭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올해 몇 살이에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 낭자는 진안 군왕이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입을 열자마자 대뜸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니, 오 낭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3월이 지나면 열여섯입니다.”
오 낭자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 그래요?”
진안 군왕은 또 한 번 고개를 돌려 오 낭자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네요.”
길고 가녀린 체형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오 낭자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