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91
교랑의경 391화
“현비마마의 본가는 영주(寧州)인데, 낭자도 거기서 지냅니까?”
진안 군왕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오 낭자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소년의 준수한 옆태를 비추었다. 진안 군왕의 얼굴을 보던 오 낭자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괜찮습니까?”
진안 군왕이 재빨리 손을 뻗어 오 낭자의 어깨를 감싸며 부축했다. 소년의 손에 어깨를 맡긴 오 낭자는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궁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니에요. 마마들께서도 상냥하게 대해 주실 겁니다.”
진안 군왕은 곧바로 오 낭자를 부축했던 손을 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진안 군왕이 오 낭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뒤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궁 안에서 저렇게 소리를 크게 질러도 되나?
오 낭자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뚱뚱하고 키가 작은 아이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거의 구르다시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뒤집힌 채 침을 질질 흘리는 아이의 모습은 꼭 정월 꽃등 놀이에 쓰이는 귀신 가면과 흡사했다.
오 낭자가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숨으면서 손으로 아이를 때리려고 했다. 이때, 누군가가 오 낭자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괜찮아. 무서워할 거 없어요. 아이가 철이 없어 낭자를 놀라게 했군요. 내가 바로 데리고 갈게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낭자의 손목에는 아직 진안 군왕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햇살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탓에 오 낭자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진안 군왕과 귀신 가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 낭자는 꿈을 꾼 듯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
태후가 금잔을 탁 하고 세게 내려놓자, 귀비와 주 현비는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태의를 보내거라. 그 아이가 많이 놀랐겠구나.”
태후가 천천히 말했다.
“아닙니다, 마마. 아운은 괜찮을 겁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누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을 거예요.”
주 현비가 서둘러 대답했다.
“장난이라고 한들, 경왕이 정말 그 애를 때리기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태후가 주 현비를 쳐다보면서 냉담하게 말했다. 귀비는 주 현비를 노려보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마마, 이번 일은 뜻밖에 일어난 일입니다. 경왕이 갑자기 그렇게 뛰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갑자기?”
태후가 귀비를 쳐다보았다.
“귀비의 말인즉슨, 이게 다 군왕이 미리 계획이라도 했다는 게야? 군왕이 일부러 그 아이를 놀라게 하려고?”
귀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태후가 내시에게 명했다.
“얘기해 보거라.”
“군왕과 오 낭자는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진안 군왕께서 먼저 오 낭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고요. 낭자에게 나이는 몇이냐 물어보고, 키가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고는 황궁 안에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까지 하셨지요.”
이게 어딜 봐서 군왕이 오 낭자를 싫어한다는 거야? 마음에 드니까, 군왕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거겠지.
“마마, 제 말씀은 그게 아니오라, 경왕이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아이들은 놀라기 마련이라는 뜻이었어요.”
귀비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태후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놀라지 않을 사람을 찾았어야지. 진정 교양이 있는 사람은 단정하고 예의가 있는 법이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는 옹졸한 게지.”
주 현비는 태후궁에서 나온 뒤로부터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긴 뭘 울어. 자네가 옹졸하다는 것도 아닌데.”
귀비가 귀찮다는 듯 한마디 했다.
“마마, 태후께서 제 욕을 하신 거잖아요. 저희 집안이 옹졸하다고요.”
주 현비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소리 들어도 싸지!”
귀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주 현비를 다그쳤다.
“자네는 왜 경왕 일을 귀띔도 안 했어? 경왕과 군왕이 서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는 걸 왜 말해 주지 않았냐고!”
“이, 이럴 때조차 경왕을 데리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집안에 알려······.”
주 현비는 눈물을 훔치면서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했지만, 귀비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됐네. 설령 알린다 해도 이미 늦었어. 이번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
경왕의 궁 안, 수심이 깊어 보이는 진안 군왕이 곤히 잠든 경왕을 토닥였다.
“전하, 현비마마께서 향음자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는 밖으로 물러났다.
경왕에게 시선을 돌린 진안 군왕은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육가아, 내가 너를 무기로 쓰게 됐구나. 가만 생각해 보니, 너를 비웃고 피하는 자들과 내가 다를 바 없어.”
진안 군왕은 잠시 뜸을 들이고 경왕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도 우린 이대로 나아가야 해. 퇴로가 없거든.”
경왕이 칭얼거리며 잠꼬대를 하다 몸을 뒤집자, 진안 군왕은 잠든 경왕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전하도 좀 쉬시지요.”
어두운 구석에 서 있던 내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다. 난 조금 걷고 싶구나.”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또 걷겠다고? 군왕께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겠네.
내시는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두봉을 걸쳐 주고 그를 따라 문을 나섰다.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진안 군왕은 일부러 한산하고 외진 곳으로 경왕의 거처를 골랐다. 그는 어화원이나 산책을 즐길 만한 곳을 걷는 게 아니었다. 고작해야 경왕의 궁 주위를 몇 바퀴 돌 뿐이었다.
주위에 서 있던 내시들은 군왕의 이런 모습이 이미 익숙한지, 경왕의 궁 안을 몇 바퀴씩 돌고 있는 진안 군왕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끝이 없는 길을 걷는 사람처럼, 진안 군왕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르자 대문이 열리고 정교랑이 밖으로 나왔다. 반근과 두 몸종도 바구니와 낚싯대를 들고 정교랑의 뒤를 따랐다.
“이쪽 강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아요. 아씨, 낚시하려면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게 더 낫습니다요.”
대문 앞에 있던 이웃이 낚싯대를 보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정교랑은 웃으면서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정교랑이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정평이 튀어나왔다. 조 집사와 반근은 깜짝 놀랐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낭자와 제대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정평이 말했다.
거리에서 마주쳤던 그날 이후로 정교랑은 정평을 찾지 않았고, 정평도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 거리에서 있었던 일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되어 버렸다.
정교랑이 자세를 낮춰 예를 올렸다.
“말씀하세요.”
“낭자가 강해져야 해요. 다른 사람이 강해져 봤자, 그건 소용없어요. 낭자의 위기는 낭자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정평의 말을 들은 조 집사와 반근의 눈이 뒤집혔다.
“이 망할 놈이!”
조 집사는 욕을 해대며 정평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정평이 말을 끝내자마자 잽싸게 도망치는 바람에 그를 잡지는 못했다.
“군자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멀리서 정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받은 조 집사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저놈 성격도 참 이상하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누가 정씨 핏줄 아니랄까 봐.
그런 생각을 하던 조 집사는 다급하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우리 아씨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내가 강해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정씨 일족은 더 이상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걸.
“가자.”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정교랑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른 봄이어서 강가는 제법 쌀쌀했다. 반근이 나무 의자를 내려놓자, 정교랑이 강 쪽으로 낚싯대를 휙 휘두르고는 의자에 앉았다.
정교랑의 행동을 본 주위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언제부터 이 강에 물고기가 살았지?”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면서 강 안을 살폈다.
“이 강에 물고기가 있겠냐? 저 사람, 정씨 가문의 바보잖아. 바보가 낚시하는 건데 물고기가 필요하겠어?”
다른 사람이 팔짱을 끼면서 혀를 찼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씨 가문의 바보가 정 대노야를 관청에 고소했다는 소문은 이미 강주 전역에 퍼졌다.
저 바보가 어머니의 혼수를 되찾으려고 자기 큰아버지를 고소했다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기 어렵지. 무엇보다도 저 바보가 승소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야.
그들은 정교랑이 관청에 정 대노야를 고소했다는 이야기의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일부 똑똑한 사람들만이 그 일의 내막을 추측해 볼 뿐이었다.
조 집사가 강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고는 주위의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조 집사와 시종들이 한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조 집사가 묻자 시종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조 집사는 세 사람의 머리를 차례로 내리쳤다.
“잘났어, 아주! 이젠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느냐?”
조 집사가 소리를 낮춰 호통치자, 시종들은 헤헤 웃으면서 대답했다.
“집사 어른께 일부러 숨기려는 게 아니고요. 잠깐 빼고는, 대개 평소와 같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그럼 그 잠깐은 어땠는데?”
시종들이 다시 한번 눈빛을 교환하고는, 머뭇거리며 조 집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게, 아씨께서 엄청 커다란 호수를 찾아낸 뒤로부터 그랬지 아마?”
시종 하나가 옆에 있는 시종에게 묻다시피 입을 열었다.
“맞아요. 커다란 호수 하나를 보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그 뒤로 아씨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뭐 딱히 이상해졌다기보다는, 며칠 내내 호수 앞에 가만히 앉아만 계셨어요.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긴 했는데.”
“있긴 했는데, 그때처럼 갑자기 난폭해지시지는 않았죠.”
시종 둘이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정교랑의 이상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난폭해졌다고?
조 집사가 시종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난폭해졌다니?”
시종 몇이 주위를 살피면서 조 집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집사 어른, 한동안 저희는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지냈습니다.”
시종들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말했다.
뒷마당의 마구간 안에는 양주에 갔다 왔던 마차들이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두 시종이 마차 앞으로 다가가 천막을 들어 올리자, 조 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쓰지 않는 마차에 천막을 씌워 놓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마차를 밧줄로 꽁꽁 묶어 놓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밧줄을 풀고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마차 안을 들여다보던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눈이 휘둥그레진 조 집사가 마차를 가리키며 외치려고 하자, 시종 하나가 재빨리 조 집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집사 어른, 목소리를 죽이십시오!”
정신을 차린 조 집사가 시종들을 밀쳐내고 마차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차 안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긴 쇠뇌(발사장치가 달린 활)가 놓여 있었다.
주씨 가문은 무장 가문인지라 조 집사는 무기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쇠뇌는 여태 봐왔던 쇠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철로 만들어진 등(쇠뇌 앞부분에 둥그런 고리 모양으로 나와 있는 부분)과 구리로 만들어진 발사장치, 마(麻)로 만든 현. 활의 몸체는 3척 하고도 2촌, 현은 2척 하고도 5촌 길이었다.
조 집사는 활을 손에 쥐기도 전부터 좋은 쇠뇌라는 생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팔을 뻗어 활을 들려던 조 집사는, 활의 무게 때문에 온몸을 휘청거렸다.
“이건 족히 4석은 되겠구나!”
조 집사가 놀라워하며 활시위를 당기려던 찰나, 시종이 그를 제지하고 활을 가져갔다.
“집사 어른, 이건 이렇게 쓰는 겁니다.”
시종이 쇠로 된 고리를 밟아서 화살을 장전했다.
시종이 화살을 발사하자, 조 집사는 깜짝 놀랐다. 일반적인 쇠뇌와는 달리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쇠로 된 고리를 밟는 시종들의 얼굴에서는 현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화살을 장전하는 모습만 보고도, 조 집사는 이 쇠뇌의 힘이 무척이나 셀 것이라고 예상했다.
텅 하는 진동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화살은 순식간에 반대편 나무에 팍 하고 꽂혔다. 얼마나 세게 꽂혔는지, 화살은 나무를 거의 뚫을 기세로 단단하게 박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