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94
교랑의경 494화
새롭게 어사중승 자리에 부임한 풍림의 거처는 인명(仁明) 골목에 위치했다. 경성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저잣거리까지 두 골목을 가로지르면 도착할 수 있고, 저잣거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명 골목은 경성에서 가장 살기 좋고 조용하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인명 골목 곳곳에 매서운 북풍을 타고 온 눈꽃이 내려앉았다.
풍림은 하인 둘과 둘둘 만 이불 한 채만 달랑 들고 상경한 터였다. 아무 가구도 없이 등롱 몇 개만 켜져 있으니 커다란 저택은 더욱 음산하고 쓸쓸해 보였다.
사환이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바깥의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촛불이 거의 꺼지기 직전, 사환은 재빨리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약 드시지요.”
사환이 조용히 말하며 침상 위에서 벽을 보고 돌아누운 풍림을 쳐다보았다.
“됐다.”
풍림이 대답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노야.”
사환이 애원 섞인 목소리로 풍림을 불렀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풍림이 말했다. 윗전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아는지라 사환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훔쳤다.
벽을 보고 누워있던 풍림은 천천히 눈을 뜨고, 촛불로 인해 벽에 그려진 검은 음영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여인이 정 낭자일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풍림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둘이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불꽃이 튀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풍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처럼 느껴지자, 볼 한쪽이 얼얼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내 목숨을 구한 것도, 고마워해야 할 사람도 자신이 아니라던 그 여인이, 백성을 현혹하고 천자를 위협한 그 요부와 어찌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태생부터 달라 보이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일 수가 있느냔 말이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지?
변해?
아니다. 그 여인이 변했다고 하기엔, 실상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한창을 만났을 때처럼, 역참에서 우연히 한 번 마주쳤던 게 내가 그 여인에 대해 아는 전부였으니까.
풍림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던 사환이 화들짝 놀랐다.
“노야.”
사환이 놀란 눈으로 풍림을 부르자, 풍림이 맨발로 바닥을 디디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풍림이 말했다.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환이 풍림의 옷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노야, 노야.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다. 내 직접 물어볼 것이 있어.”
풍림이 대답했다.
“노야,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밖에 눈도 오고요.”
사환이 벌써 문가에 다다른 풍림을 향해 소리쳤다.
풍림이 문을 열자, 거센 찬바람이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그의 온몸을 덮쳤다. 풍림이 주춤하며 발걸음을 멈추자, 뒤에 있던 사환과 다른 사환이 재빨리 풍림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그를 말렸다.
“노야,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 시간에 어찌 거길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이 시간에 여인을 만나러 가는 건 큰 실례지.
풍림은 문을 닫지 않고 잠시 문 앞에 서서 온몸을 덮쳐오는 눈을 그대로 맞았다.
“노야, 오늘은 일단 좀 쉬시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환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환이 서둘러 문을 닫고, 맨발인 풍림을 안쪽으로 모셨다.
어두컴컴한 풍림의 저택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같은 시각, 등불이 환하게 켜진 다른 저택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 바깥의 한기를 두른 사내가 실내로 걸어 들어왔다. 실내에 둘러앉아 있던 네다섯 사람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됐소?”
“알아냈습니다. 3년 전, 풍림이 묵었던 역참에 불이 났던 그날, 강주로 돌아가던 정 낭자가 우연히 풍림과 같은 역참에 묵었다고 합니다. 정 낭자가 역참에 불을 질렀던 방화범들을 현장에서 화살로 쏘아 즉살하고, 불길이 더 거세지기 전에 역참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하더군요. 그중 풍림이 있었기에 풍림이 그 여인을 생명의 은인이라 여기는 거고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말했다. 내막을 알게 된 사람들이 얼른 고개를 돌려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은, 정말로 하늘이 무심치 않았던 게로군. 어찌 그런 우연이.”
일상복을 입고 앉아 있던 고능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막료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감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그런 우연이.”
“누가 보수사에 가서 향불이라도 올렸소?”
막료 중 한 명이 진지하게 물었다.
“향불을 올리진 않았고, 얼마 전에 다리를 지나다가 살코기가 제법 남아 있던 오리목을 비렁뱅이에게 던져준 적이 있소만. 설마, 그때 내가 복을 쌓았나?”
다른 막료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박장대소했다. 천장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그들의 기세는 허공에 휘날리는 눈발마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고능준 또한 탁자를 연신 손으로 내리치면서 웃었다.
“이번에 풍림이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게 다 수포가 될 줄 알았는데,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이번 일로 눈엣가시인 두 사람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게 됐어!”
“사람이 세우는 계획은 하늘의 계산보다 못한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로군.”
진소와 진 노태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마주친 두 부자는 손을 내저으며 풍림에 대해 보고한 수하를 물렀다.
“그때 그 여인이 정말로 정 낭자일 줄이야.”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는 붓으로 동그라미와 점을 그려둔 병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지나가던 행인이 불의를 보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지?
– 정 낭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 그럼 열흘 전에 정 낭자가 지나갔을 지점이 바로.
풍림이 친필로 작성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도움을 주었던 일행은 약 이십 명이고, 경성에서부터 한 여인을 호송해 오고 있었다.’
여인!
현장에서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였다? 설마 정말로 그 강주 바보는 아니겠지?
“넌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난 그때부터 그게 정 낭자일 줄 알았다.”
진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자, 진소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하늘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군요. 일이 이렇게 돼버리면 곤란한데.”
진 노태야도 웃음기를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로 덕분에 실내는 무척이나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얼음장과도 같았다.
“풍림이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몬 셈이구나. 이번 일로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덮는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충으로 여겨질 거다. 사적인 일로 대의를 포기하는 것이니, 어사대 관리들은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 테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정 낭자의 죄를 묻고, 정 낭자를 경성 밖으로 내치거나 형을 내린다면, 평생 배은망덕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거야.
충과 효를 동시에 행할 수 없다고들 한다. 충을 행하고자 하면, 효를 잃을 것이고, 효를 행하고자 한다면, 충을 배반해야 하지. 이번 일로 풍림은 충과 효,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얻을 수가 없게 됐어. 결국 모든 걸 잃게 되는 셈이지.
황제 폐하가 인자한 성군이시긴 하다만, 풍림이 이번 일에 충을 따른다 해도, 그의 배은망덕함은 폐하의 마음속에 영원히 뽑히지 않을 가시를 찔러 넣을 것이야.”
진소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의 죄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두 사람의 명성에 크나큰 오점이 남을 겁니다. 그렇다고 정 낭자의 죄를 묻지 않고 황제께 사죄하며 제 발로 경성을 떠난다 해도, 이 일은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니 정 낭자는 언제든 같은 죄목으로 대신들에게 공격받을 테고요.”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고 탄식했다.
“정말로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계산에 미치지 못하는군요.”
실내의 등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창가에 길게 늘어뜨렸다. 창밖의 눈꽃이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그림자 위를 날아다녔다.
간밤에 내린 눈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였다. 곳곳을 뒤덮은 새하얀 눈 덕분에 아침 햇살이 더욱이 밝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온 장 노태야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던 찰나, 노복이 그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려던 장 노태야는 하마터면 허리에 담이 걸릴 뻔했다.
“만평, 무슨 짓이냐?”
장 노태야가 자신의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노야, 풍림의 일에 관해서 들으셨지요?”
노복이 물었다.
“어제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또 왜?”
장 노태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러더니 노복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아차차, 병풍에 그린다는 걸 깜빡했네. 정 낭자가 풍림도 구했지.”
노복이 기가 찬다는 듯이 허, 하고는 장 노태야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애초에 정 낭자가 풍림을 구했기 때문에, 지금 둘 다 사지에 놓인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장 노태야가 태연하게 붓에 먹을 찍었다.
“그럼 아닙니까? 풍림이 자신과 자신의 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잖습니까. 풍림이 정 낭자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야기를 안 했으면 모를까요. 풍림 그자가 배짱이 손톱만 해서 정 낭자를 보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혼절해 버리는 바람에, 그 사실을 숨길 수도 없게 됐고요.”
노복은 말하다 말고 버럭 화를 냈다.
“정 낭자가 자기 목숨을 구해 준 게 남에게 말 못 할 창피한 것도 아닌데, 숨길 필요가 뭐 있다고.”
장 노태야는 붓을 들고 병풍에 한 획을 그려 넣은 뒤, 잠시 감상을 하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노야, 정 낭자가 풍림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진 이상, 풍림은 정 낭자를 놓아주고 싶어도 못 놓게 되는 꼴이 됐습니다. 양쪽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지요. 반근은 정 낭자 걱정에 매일같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장 노태야의 모습을 본 노복은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반근? 아둔하기는.”
장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 낭자가 그 애를 팔다시피 했는데도, 반근은 아직도 정 낭자를 잘 모르는 모양이야.”
“노야.”
노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장 노태야를 불렀다.
“양쪽이 함께 망한다?”
장 노태야가 붓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난 그 여인의 계략에 한 번 놀아나 봤다. 그 후로 난 절대 그 여인이 그리 망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노야, 속이 너무 좁으신 거 아닙니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세요?”
노복이 장 노태야를 탓하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이전에 겪었던 일을 교훈 삼아 마음속 깊이 새기는 게다.”
장 노태야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노야,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이 같습니까?”
노복이 초조한 투로 말했다.
“당연하지. 다 똑같아.”
장 노태야가 노복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다 똑같다고?
바보의 아비가 바보의 몸종을 뺏다시피 하여 노야께 드렸던 일과 어사중승이 유명한 여인을 심문하겠다는 일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무정하게 굴 뿐이지. 뭐가 다르다는 게냐?”
장 노태야가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사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풍 중승께서 정 낭자 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사환이 머리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역시 갔군!
왜 갔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 좋은 결과를 보긴 힘들 것이다. 다만 누가 먼저 험한 꼴을 볼지는 정해지겠지.
풍림이 옥대교 저택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풍림의 결정을 추측하고,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대했다.
풍림은 말에서 내려 옥대교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 앞에 쌓였던 눈은 벌써 깨끗하게 치워졌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풍림은 그들이 거리에서 자신을 몰래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정 낭자와 함께 글씨를 쓰러 온 자들이겠지.
풍림이 심호흡을 하고 사환에게 손짓했다.
“노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한동안 요양을 하시다가 다시 오심이······.”
사환이 주저하면서 풍림을 만류했다.
병 때문에 요양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변명거리였다. 병이 낫는 속도가 더디면 더딜수록,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날도 점점 더 뒤로 밀릴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일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거나 아예 잊히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긴 하겠지만, 지금처럼 풍랑 끝에서 칼을 겨누고 정면승부를 할 필요까지는 없게 될 터였다.
시간이 약이야.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거든.
사환이 속으로 생각했다. 풍림이 굳은 표정으로 사환을 노려보았다.
“나 풍림은 언제나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비겁하게 피하거나 숨지 않아.”
사환이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숙이고 옥대교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문지기가 문을 살짝 열고 풍림과 사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풍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문지기에게 양손으로 명첩을 건넸다.
“풍림, 정 낭자를 뵙고자 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