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93
교랑의경 493화
“설마 정 낭자와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고능준이 의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리 일식을 예측했다고 한들, 한창은 눈에 띄지도 않는 인물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오늘 황제를 알현하러 입궐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니 한창이 오늘 대전 안에서 결례를 보인 일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었다.
“당장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수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한창은 그리 중요한 자가 아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풍림이 앞으로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야.”
고능준이 말했다.
“대인, 만약 풍림이 이번 일로 죽는다면, 정 낭자는 아예 끝장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의 의도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여인이 자신의 죄를 벌하겠다고 나선 현임 어사중승을 분통 터트려 죽이거나 놀라게 해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정교랑이 암암리에 손을 썼던 유 교리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벌건 대낮에 벌어진 일이고, 원인과 결과가 명백한 일이 아니던가.
누군가가 이를 정 낭자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다면, 조정에서도 필경 정교랑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백성들도 놀라 두려워할 테고.
“그럼, 풍림이 이참에 죽어버리는 게 더 좋겠군.”
고능준이 말하면서 수하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창이 풍씨 저택을 떠나,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문밖에 서 있던 고능준의 측근이 나지막이 고했다.
수하가 웃음기를 거두고 고능준을 향해 예를 표했다. 고능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하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 저녁에 부는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걸음을 옮기던 한창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한창이 속으로 탄식했다.
“한 대인, 서두르십시오. 폐하께서 거의 반나절이나 기다리셨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내시가 고개를 돌리고 한창을 재촉했다. 한창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잰걸음으로 어가를 가로질러 갔다. 어가를 지나가는 동안, 어가 양쪽에서 자신을 향하는 시선이 곁눈질로도 보였다.
오늘 이후로 경성 조정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어. 내가 유명해지게 된 이유도 참······.
한창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찬바람을 맞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근정전 안은 몹시 따뜻했고, 벌써 등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 대인은 풍 대인과 구면이오?”
황제가 물었다.
“경성으로 오는 길에 한 번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풍 중승의 병은 어떤 병이오?”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태의가 아닌 한창에게 병을 묻는다는 것은, 황제도 풍림이 쓰러진 이유가 병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폐하, 풍 중승께서 앓는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역시······.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풍 중승과 정 낭자도 서로 구면입니다.”
이어진 한창의 말에 황제가 흠칫 놀라며 반문했다.
“구면이라고?”
한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면일 뿐만 아니라, 정 낭자는 풍 중승의 목숨을 구하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뭐라고?
황제가 경악했다.
“어디 알던 사이뿐인가. 풍림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어.”
“무슨 은혜?”
“한창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풍 중승이 그렇게 얘기했다고만 했어. 더 자세한 건 폐하께서 풍 중승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풍 중승이 자신을 구해 줬던 그 생명의 은인을 꿈에서도 찾아다녔다던데, 자신이 때려죽이겠다던 사람이 바로 그 은인일 줄이야.”
“혼절할 만도 하네.”
하늘색이 짙어질 무렵, 바깥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북풍을 타고 문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노사안이 손에 쥔 공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문밖에서 떠들던 사람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노 어사.”
떠들던 이들이 노사안에게 예를 표했다.
“오늘 밤은 바람이 좀 강하군. 경계를 늦추지 마시게. 당직을 설 거면, 당직을 서는 모양새를 보여야지.”
노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로를 밀치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노사안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 아래에 서서 앞에 보이는 궁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도 오늘 침수 드시기는 글렀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한창은 풍림이 정 낭자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잘 몰랐고, 그 일에 대해 떠들던 이들도 몰랐다. 하지만 노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불과 하루 전에 풍림의 입을 통해 그 일을 직접 듣기까지 했다.
– 아직 살아 있다고는 하나, 내 목숨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닐세.
– 그때 나는 결심했네. 앞으로는 결코 생과 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내게 준 여생을 가치 있게 보낼 거라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그 은인께 보답하겠다고.
– 그분은 내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뼛속 깊이 새길 교훈까지 주셨다네.
– 감히 내 은인을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 내 은인은 대의에 초연한 분이야. 귀신을 운운하며 백성을 현혹하는 여인과 비교하다니!
어제 풍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던 노사안은 쓴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실로 하늘이 사람을 놀리는구나.”
노사안이 중얼거렸다.
마차가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어가를 지나쳤다. 어가 양쪽으로 밝혀진 불빛이 은은하게 길을 비췄다. 대낮에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어가는 밤이 되자 더욱 어두워 보였다.
어가에는 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관리들의 마차가 간간이 보였다. 한창이 마차의 휘장을 내리고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
한원조의 다급한 목소리가 한창을 깨웠다. 눈을 번쩍 뜬 한창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환한 등불에 눈이 부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등롱이 치워진 대신 걱정이 가득한 한원조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깜빡 잠이 잠들었구나.”
한창이 한원조의 어깨를 짚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훅 불어오자, 한창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한원조가 서둘러 두봉을 가져와 한창에게 덮어 주고 우산을 펼쳤다.
“눈이 오는 것이냐?”
한창이 물어보고는 고개를 들고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겨울바람에 섞인 차가운 눈송이가 한창의 손과 얼굴에 내려앉았다.
“정말로 눈이 내리는구나.”
한창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어서 들어가시지요.”
한원조가 우산을 좀 더 낮게 세워 들고 온몸을 덮쳐오는 찬바람을 막았다.
추운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와 따뜻한 기운이 훅 느껴지자, 한창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우산을 정리한 한원조는 사환이 올린 뜨거운 차를 한창에게 건넸다. 한창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는 편안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원조는 서둘러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선 한창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부터 도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탁자 위에는 저녁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기로 했던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던지라, 그는 조식도 먹지 않고 황궁으로 향했었다. 행여나 황제 앞에서 결례를 보일까 염려해서였다. 점심은 풍림을 마주쳐 한바탕 사달이 나는 바람에 먹지 못했고, 부랴부랴 황궁으로 다시 불려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당연히 황제가 한창에게 저녁을 함께 들자고 할 리는 없으니, 한창은 쭉 공복일 수밖에 없었다.
한창은 뒤늦게 허기가 졌지만 통 입맛이 돌지 않아 술만 한 잔 마신 뒤, 반찬만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먹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원조가 물었다.
황제가 관례에 따라 관리를 대면하는 시간은 대개 일각, 길어야 한 시진이었다. 따라서 다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는 데 걸릴 시간은 일각도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한창이 황제를 알현한 시간은 족히 반나절이었고, 심지어 하루에 무려 세 번이나 용안을 뵌 터였다.
한창이 한숨을 푹 쉬면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원조, 일이 생겼다.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일이야.”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일?
한원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창을 쳐다보았다.
“듣기로는 풍 중승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던데요?”
한원조가 물었다.
“풍 중승의 일은, 우리가 겪은 일과 똑같다. 내 추측이 맞았어. 정 낭자가 바로 내게 일식 시간을 알려 줬던 그 낭자였다. 오늘 황궁에서 그 여인을 봤다.”
한원조가 흠칫 놀라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한원조는 자신의 부친이 그 낭자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원조는 시녀가 반강현을 지나간 적이 없다는 말에, 부친을 도왔던 사람이 정 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마음을 놓은 터였다.
하필 아버지가 황궁에서 정 낭자와 마주치고, 그 은인이 바로 정 낭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니. 내가 태평거 주인장 자리를 내놓기 전이라면 모두에게 즐겁고 반가운 일이었겠지만, 내 이미 정 낭자의 면전에서 주인장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하셨을까. 만감이 교차하셨겠지.
“아버지, 이 불효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한원조가 탁자를 밀고 한창에게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소자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정 낭자께 사죄하러 가겠습니다.”
한창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한원조를 쳐다보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그 말을 정 낭자에게 똑같이 했더니, 정 낭자가 뭐라고 한 줄 아느냐?”
한원조가 고개를 들고 머뭇거렸다.
“원조 네가 정 낭자를 악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사죄할 필요 없다고 하더구나.”
한창이 말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한원조는 말문이 막힌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이로군.
등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사죄가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하러 가야겠군요.”
긴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든 한원조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창은 한원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창의 눈가에 씁쓸함과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추구하는 도의가 다르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의 신념이 있고, 선택권이 있다.
자신이 따를 신념을 결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
“아 참, 그리고 정 낭자가 네게 큰 은혜를 입었다던데? 그건 무슨 소리냐?”
한창이 무언가 생각난 듯 한원조에게 물었다.
“정 낭자가 제게 은혜를 입었다고요?”
한원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껏 정 낭자와 마주친 적도 없습니다. 태평거에 관한 일도 모두 정 낭자의 시녀가 나서서 처리했는걸요. 저는 몇 년 동안 숙주를 떠난 적이 없고, 간혹 왕래하는 지인들 외에는 다른 이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과거 시험 때문에 경성에 온 것이고요. 정 낭자는 강주 출신이고, 신의 낭자라고는 하나 저와는······.”
한원조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외쳤다.
“정씨! 신의 낭자! 아버지! 정 낭자가 고모님의 목숨을 구해 준 그 신의입니다!”
고모님이라니?
“그 신의가 바로 정 낭자였다니. 정 낭자였다니!”
문득 무언가 깨우친 듯한 표정의 한창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한창이 흥분한 표정으로 손을 높이 들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이고, 아이고. 정 낭자가 내 은인일 뿐이 아니라, 네 고모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구나. 정 낭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은인이었다니, 참으로, 참으로······.”
한창이 문득 멈칫했다.
“잠깐만, 정 낭자 말로는 네가 정 낭자의 은인이라던데?”
내가 정 낭자의 은인이라고?
한원조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언제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었나?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은혜? 고모님의 병을 고쳤을 때는 그 여인이 고모님께 은혜를 베푼 것일 테고.
– 공자님까지 우리 아씨께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다들 아씨를 이렇게 모질게 대하냐고요!
한원조는 문득 반근이 울부짖으며 외쳤던 말과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 공자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순간 몇 년 전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아오면서 연신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외치던 앳된 몸종의 얼굴과 태평거에서 마주친 반근의 얼굴이 한원조의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그 여인이었어!
한원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 존함을 여쭈어라. 훗날 은혜를 갚아야지.
허약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한원조의 귓가를 희미하게 스쳤다.
그 여인이었어!
세상에, 전부 그 여인이었어!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때 그 여인이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니!
– 공자님,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 그럼 ‘원조’는 공자님의 자(字)고요?
– 공자님의 의협심에 탄복했습니다.
다, 모든 게 다, 그렇게 된 일이었어!
– 공자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이 한원조의 눈앞에 떠올랐다.
어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 은혜를 이렇게까지 갚는단 말인가!
한원조는 온몸에 전율이 일고 두피가 저릿해져 왔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탁자를 세게 움켜쥐었다.
어찌 이렇게까지 은혜를 갚을 수 있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