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55
48. * *
푸른 바다가 펼쳐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알렉은 금연을 결심했다.
‘젠장, 내가 두 번 다시 궐련을 피우나 봐라.’
토라진 로렌은 무려 두 시간이나 말 한마디 섞어 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아기가 생기면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어라. 그런데 애 생기기 전에 뭐부터 해야 하는 것 같던데.’
알렉은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버릇처럼 로렌의 수발을 들어 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로렌을 따라 어느 해안 절벽에 도착한 후였다.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벤치와 테이블이 있었다. 풍경이 아름다우니 누군가 이곳에서 티타임을 즐겼던 모양이다. 저 아래 모래사장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와 소라도 드문드문 보였다.
알렉은 어린 잔디를 밟으며 절벽 쪽으로 천천히 간 뒤 아래를 살폈다.
쏴아. 깎인 돌벽 아래로 푸른 파도가 부딪쳐 하얗게 부스러졌다.
“이곳이다. 내 양어머니 에블린의 유골을 뿌린 곳.”
등 뒤에서 로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말을 걸어 준 것만도 반가웠던 알렉은 곧장 뒤를 돌아 로렌을 품에 안았다.
“답답하다.”
“잘못했어.”
“…….”
“앞으로 그런 장난은 안 칠게.”
“되었다. 화 풀렸어.”
“정말?”
“그래. 늑대는 아량이 넓다.”
로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피식 웃었다.
“역시 수호신 경력이 어디 안 가. 젠장, 귀여워 죽겠네.”
“이만 놓아주거라.”
“조금만 더 안고 있으면 안 될까? 바닷바람이 추워서 그래.”
알렉의 말에 로렌은 날씨가 추운지를 되짚었다. 바람이 쌀쌀하긴 하니까. 로렌은 데이트랍시고 사탕 껍질 같은 옷을 입고 온 알렉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좋은 옷 다 놔두고 이런 얇은 걸 입고 오니까 추운 것이다. 저 봐라. 저 봐. 바람이 자꾸 부니까 셔츠가 몸에 붙어서 남사스러운 꼴이 되지 않나.
“이거라도 덮거라.”
로렌은 늑대답게 자신의 숄을 벗어 알렉에게 건넸다. 알렉은 조금 당황하다가 로렌이 직접 둘러 주는 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로렌은 알렉과 함께 벤치에 앉아서 바다를 감상했다. 과거에는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면 막스웰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저 물결 위로 알렉이 어른거렸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오늘은 에블린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네 양어머니 말이지.”
“응, 내게 로렌이라는 이름을 준 사람이다.”
로렌은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진짜 이름을 되찾았으니 인사를 하고 싶었다. 초상화를 보면서도 말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고 싶었어.”
로렌은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알렉.”
“응?”
“그때 왕궁 지하에서 막스웰이 말한 내 진짜 이름을 듣지 않았나.”
“글쎄. 그런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원래 영물의 이름은 당사자가 알려 주지 않는 이상 들어도 기억이 안 나는 법. 알렉은 고대의 법칙을 이야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용은 영물 중에서도 아주 신비한 영물이라고 하지.”
“하하, 그래? 내가 보기엔 하나같이 멍청하던데.”
“그렇지 않다. 과거 용은 영물의 이름을 알아내 그들을 수족으로도 부릴 만큼 강력했어.”
“이런, 지금은 진화를 잘못한 모양이야.”
“용에겐 가끔 세상의 법칙이 어긋난다고 하니까.”
“오, 그렇군.”
“당신은 알고 있지 않나.”
바다를 바라보던 로렌은 천천히 알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팔을 벤치에 올리고서 거만하게 앉아 있던 알렉 또한 로렌을 마주 보았다. 그에게 덮어 주었던 숄은 어느새 로렌의 어깨를 따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뭘 알고 있다는 건지.”
“내 진짜 이름.”
로렌이 알렉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햇빛을 받아 산란한 은빛 눈동자가 오색빛깔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래서 내게 그날의 기억을 지워 달라 했던 거 아닌가.”
알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짓말로 대충 넘어가려 했으나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챈 것이다.
“내 비록 지금은 수인이나 타고나길 영물로 태어나 이름의 효과는 여전하다. 어째서 내 이름을 이용하지 않는 거지?”
다른 이라면 즉시 맹약을 맺고 로렌을 이용하려 들 텐데. 이 사내도 맹약을 통해 막스웰처럼 저를 묶어 둘 수도 있었다.
“난 그대의 자유를 소유하고 싶지 않아.”
알렉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물론 그대가 욕심나고 어느 때는 미치도록 탐이 나. 나만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지금도 그래. 바다에서 보니까 젠장맞을 정도로 예뻐.”
알렉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듯이 상체를 푹 숙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내가 각인했잖아, 그대에게.”
알렉이 로렌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그대의 냄새만 맡고 그대만 바라보면서 그대에게만 사랑을 속삭이도록.”
“…그걸로 만족하느냐.”
로렌이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벤치를 맴돌았다.
“만족? 그대에 한해서는 만족하는 게 없지. 알면 알수록 오히려 더 목이 말라.”
알렉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로렌의 몸을 끌어와 진득하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면 야외에서 망측한 짓을 했다고 로렌이 화를 내겠지.
“내가 더 노력해야지 뭐.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인내심이 엄청 늘었다고.”
“그 인내심 더 늘리거라.”
알렉의 등 뒤로 걸어간 로렌이 앉아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렉은 반대편 팔을 들어 로렌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나의 늑대님 분부대로.”
“너무 나태하게 살지 말고.”
“알겠습니다. 노력하죠.”
“돈보다는 사람을 중히 여겨라.”
“하, 어려운데.”
“…….”
“알았어. 그것도 조금은, 노력하지.”
“낭비벽도 줄이거라. 너무 과하다.”
“많이 버는 사람이 많이 써야 시장이 돌아가는 거야, 늑대님.”
“…….”
“알았어, 알았다고. 노력할게. 젠장맞을.”
“바른말을 쓰도록 해.”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아파도 잘 참고.”
“뭐?”
알렉이 반문하려던 때. 로렌이 그의 헐렁한 셔츠 깃을 뒤로 잡아당겼다.
로렌은 알고 있었다. 알렉이 저에게 각인을 조르게 된 후 저를 만날 때면 이렇게 목이 헐렁한 셔츠만 입고 다닌다는 걸. 정장 대신 깃이 없는 튜닉도 즐겨 입어서 수도에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로렌은 훤히 드러난 길고 단단한 목덜미를 내려보면서 허리를 숙였다. 작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의 목덜미를 콰드득 깨물었다. 늑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알렉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윽!”
알렉이 눈을 부릅떴다. 목덜미에서 시작한 짜릿한 고통과 쾌감이 핏줄을 타고 발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렌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피 묻은 입가는 사냥에 성공한 늑대 같았다.
벌떡 일어난 알렉이 로렌을 돌아보았다. 그는 신이라도 영접한 사람처럼 팔을 부르르 떨었다.
“너, 너, 지금 나, 가, 각인, 각인해 준 거야?”
“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나.”
“하, 하하. 하하!”
알렉은 미친 사람처럼 웃더니 로렌에게 달려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나 각인당했다!’하고 외쳤다.
얼굴이 빨개진 로렌은 이거 놓으라며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쳐 댔다. 하지만 알렉은 이번만큼은 로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보다도 해맑게 웃는 모습에 로렌은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뭐가 그리 좋으냐. 나는 당신보다 수명도 짧은데.”
“그게 뭐 어때서.”
“내가 당신에게 그런 자국을 남기고 먼저 떠나면 당신은 혼자서…….”
“로렌. 나의 늑대.”
알렉은 빙글 돌던 몸을 멈추고 한 손을 들어 로렌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각인이 없어도 난 평생 그대를 그리며 기다렸을 거다.”
“흐윽. 안 돼. 긴 시간을 어떻게…….”
“우린 이미 긴 시간을 버티는 법을 알고 있잖아.”
알렉은 로렌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치면서 활짝 웃었다. 하아.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정말 죽도록 사랑해, 로렌!”
알렉은 다시 로렌을 꽉 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읏, 어지럽다.”
“나는 이다음 생애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널 찾아낼 거야. 그러니까 날 기다려 줘, 달을 쫓는 늑대여.”
알렉은 로렌의 진짜 이름을 언급하면서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모른 척하더니 역시 제대로 알고 있었구나.’
로렌은 이 괘씸한 사내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나중에 말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빙글빙글 도는 풍경 속에서 유독 높이 떠 있는 태양이 뚜렷했다. 아기의 태명은 태양을 의미하는 아르키로 해야지. 로렌은 그리 생각하면서 이 사랑스러운 사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