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Snake Finds the Wolf Who Played With the Snake RAW novel - Chapter 54
47. * *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찻집 문이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로렌 양. 벌꿀차 주세요!”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온 사샤가 커다란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로렌의 팔을 가리켰다.
“혹시 피부병 걸렸어요, 레이디?”
피부병? 사샤의 말에 덩달아 놀란 로렌은 팔을 내려보았다. 울긋불긋한 키스 마크가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범인은 어제저녁 함께 마차를 탔던 알렉이었다. 그는 왜 자신의 목을 물어 주지 않느냐며 추궁하는 척, 로렌의 팔과 가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다.
“그… 아니다. 피부병.”
로렌은 어색하게 소매를 내리고서 주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물을 끓였다.
곧 따라 들어온 알렉이 ‘누구한테 감히 차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라며 성질을 부렸다.
“출발하기 전에 한 잔 마시면 좋―잖아, 알렉.”
사샤가 헤실헤실 웃었으나 회중시계를 확인한 알렉은 남은 시간이 없다고 대답했다.
휴일이라서인지 알렉은 평소보다 얇은 셔츠에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볼로 타이를 간단하게 메고 왔다. 셔츠 원단이 얇고 실크처럼 부들거려서 움직일 때마다 탄탄한 몸이 은근하게 드러나는 것이 매력적이다.
“출발 준비는 끝났어?”
“다 했다.”
로렌은 도스턴이 사 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왕궁에 다녀온 후 여기저기 망가진 곳이 많았으나 깨끗하게 빨고 수선했더니 제법 보기 좋았다.
“애인이랑 가는 첫 여행지에 다른 사내가 사 준 드레스를 입고 가다니.”
다소 뾰족해진 눈빛이 로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다른 사내라니. 오라버니가 사 준 거다. 난 이 옷이 좋아.”
알렉이 사 준 것들은 너무 비싸고 부담스러워서 그의 저택에 두고 나왔다. 그에 비해 도스턴의 드레스는 적당히 고급스럽고 편안해서 이런 자리에 입고 나가기 딱 좋았다.
로렌이 좋다고 하자 알렉은 긴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지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은 꼭 어린애 같았다.
이에 질세라 그 옆에 있는 사내 또한 똑같이 어리광을 부렸다.
“치. 나도 여행 따라가고 싶었는데…….”
“너라도 상단을 지켜야 할 거 아냐.”
“바다에 간다며. 나도 수영 좋아한다고, 알렉.”
“사샤.”
알렉이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왜 또 그래!”
사샤가 기겁하며 걸음을 물렸다.
“나중에 질리도록 물에 담가 드릴 테니 지금은 좀 참아 줘.”
“마, 말투가 꼭 물고문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고, 알렉.”
무서운 자식. 사샤는 세상 부드러운 알렉의 말투를 의심하면서 먼저 벨파슨 역으로 향했다.
찻집에서 벨파슨 역까지는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런 짧은 거리를 가면서 굳이 마차에 태우려는 이유는 무얼까.’
로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낭비벽이 심한 사내를 응시했다. 안 탄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이것만큼은 로렌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나의 늑대님을 걷게 둔다고? 안 돼. 신발에 흙 묻어.”
알렉의 핑계는 참 이상했다. 신발에 흙이 묻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말뜻을 이해 못 한 로렌이 갸웃거리는 사이, 벌써 마차는 벨파슨 역에 도착했다. 이것 봐, 이렇게 가깝다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기차역이 반가워서 로렌은 알렉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역사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 역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아, 오랜만, 입니다. 그… 로렌 님. 잘 계셨습니까!”
갑자기 호칭에 ‘님’ 자를 붙인 역장은 분주하게 알렉의 눈치를 살피며 굽신거렸다.
“왜 이러느냐, 역장님.”
“바, 반가워서 그렇죠, 반가워서. 하하!”
“네 표정은 불편해 보이는구나.”
“꼭 그렇게 지적해야겠어, 로렌? 안 그래도 상단주 눈치 보느라 힘들어 죽겠구만.”
아차. 역장은 실수로 튀어 나간 말에 화들짝 놀라고선 급한 일이 있다며 역장실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와, 로렌.”
알렉이 커다란 기차 앞에서 손짓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정차 중인 새카만 기차가 치익―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다는 왜 가자고 한 거야?”
기차에 오른 알렉은 뒤따라오는 로렌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이걸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로렌은 평소처럼 혼자 오르려다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블린의 유골을 뿌린 바다로 가기 때문일까.
“나와 가족이 되자꾸나.”
그가 내민 손 위로 에블린이 내밀었던 손이 겹쳐 보였다.
“잡아. 누군가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건 당신을 도와준다는 뜻이다.”
“나를… 도와줘?”
“그래. 그러니 잘 기억해 뒀다가 다음에 누군가 손을 내밀면 망설이지 말고 꽉 잡아.”
로렌은 알렉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신이었답시고 모든 걸 혼자서 해내려는 아집은 이제 버렸다. 그에게 배웠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알렉은 씨익 웃으며 맞잡은 손을 당겼다. 로렌은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기차에 훌쩍 올랐다.
“여긴 아무도 없구나.”
로렌은 텅텅 빈 객실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지. 이 열차는 오직 나를 위한 열차거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로렌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반질반질한 호두나무 내장재로 꾸며진 객실은 왕궁 귀빈실 같았다. 기다란 기차 칸에는 의자 대신 푹신한 가죽 소파가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알렉이 업무를 볼 수 있는 책상과 술병을 전시한 장식장도 보였다. 폭신한 양탄자는 사막 왕국에서 수입한 최상급 물건이라 걸어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기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자리는 침대인가?’
로렌이 객실 끝자락에 있던 커튼을 젖히자 예상대로 하얀 침구가 올라간 침대가 보였다.
그때 강인한 팔이 로렌의 가슴 위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
놀란 로렌이 주먹을 휘둘렀다.
“나야. 놀랐어?”
알렉이 잽싸게 고개를 돌리며 피하곤 웃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오길래 놀랐다.”
“기척은 냈지. 나의 늑대님이 집중하느라 못 들은 건가 봐. 왜. 이 침대 마음에 들어? 한 번 누워 볼까?”
알렉이 로렌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나도 궁금해. 여길 그대와 누우면 무슨 기분일까.”
알렉이 그 말을 하는데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덜컥이면서 로렌의 몸이 흔들렸고 자연스레 둘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여기 데려온 여자는 그대가 처음이거든.”
장난스러운 말투와 다르게 알렉의 눈빛은 진중했다.
“하, 참. 아니, 뭐 처음이라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
“지금 너 웃고 있는데.”
알렉이 로렌의 입꼬리를 톡톡 건드렸다.
“늑대는 원래 웃는 상이다.”
로렌은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 둘의 이마가 콩 부딪쳤다. 알렉이 아야, 하며 엄살을 부리는 사이, 로렌은 부딪친 이마를 문지르며 씩씩하게 소파로 이동했다.
“내 반려는 냉정하기도 하지.”
알렉은 쿡쿡 웃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버릇처럼 궐련을 꺼내 물고서는 로렌 옆자리를 차지했다. 혼자 기차를 탈 때면 흡연하던 습관이 밴 것이다. 로렌의 눈이 궐련을 따라다녔다.
“아, 이거.”
로렌은 이 연기를 싫어하겠지. 그녀와 한시라도 더 붙어 있으려면 금연해야 하는데. 알렉은 불을 붙이지 않고 궐련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러자 로렌이 인상을 썼다.
“안 던지느냐.”
“뭐?”
“그건 왜 안 뱉느냔 말이다. 원래 당신은 입에 한 번 문 건 그냥 버리지 않느냐.”
그 말에 알렉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품에 넣은 궐련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로렌의 고개가 재빨리 돌아가더니 그쪽으로 팔을 뻗는다.
“…….”
“…….”
풉. 푸하하하! 알렉은 소파를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로렌은 ‘이 사기꾼 장사치 같은 놈!’하고 외치며 반대편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