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8
교랑의경 508화
진십삼은 소매로 얼굴 반쪽을 가리면서도 몸까지 살짝 튼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만 드러내고 있는데도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정교랑이 눈을 돌려 쳐다보았다.
소매로 가린 저 입의 입꼬리가 올라간 건 아니겠지?
진십삼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소매를 내린 정교랑의 표정은 단정하기만 했다. 진신삼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진안 군왕과 왕래를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십삼은 잠시 말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는······ 마음이 올곧지 않습니다.”
그자는 마음이 올곧지 않다고?
한쪽 옆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반근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군왕이라면 경성을 떠나 봉지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든 경성에 남아 있으려 하잖습니까.”
진십삼이 말했다.
“경왕이 안타까워 그렇죠.”
반근이 못 참고 끼어들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리며 경멸하는 투로 대꾸했다.
“경왕이 안타깝다는 말로, 늙은이와 어린애를 속이는 게지.”
늙은이와 어린애를 속인다?
반근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반근이 아무리 아둔해도 진안 군왕을 경성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게 누군지는 잘 알았다. 진십삼이 말하는 건 황제나 태후, 자신과 같은 백성이었다. 참으로 대역무도한 말이었다.
“낭자 앞이라 스스럼없이 말한 것이니, 망언을 늘어놓아도 비웃지 마십시오.”
“비웃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십삼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경왕이 안타까워 그러는 거면, 경왕부를 봉지로 옮겨 가면 되잖습니까?”
진십삼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실 일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있어선 안 됩니다. 낭자가 신경 쓰지 않는 걸 노려 멋대로 상처를 주려는 이들이 있어요.”
“고마워요, 공자.”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웃으며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제 진짜 가 보겠습니다. 새해 명절에 인사하러 들를게요.”
정교랑이 다시 예를 표하고 일어나 배웅했다.
진십삼이 가자마자 범강림이 들어왔다.
“왜 대낮에 벌써 왔어요?”
황씨가 놀라 물었다.
신비궁이 많이 파손되었기에, 이제 막 한숨 돌리던 범강림은 더욱 바빠졌다. 게다가 돌포탄을 만들고 발석거를 개조하느라 이무 쪽에서도 장인 열댓 명을 데려갔기에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었다.
“아가 주려고 장난감 만들어 왔지.”
범강림이 함 두 개를 꺼내며 말하자 황씨가 웃으며 받았다.
“이거 갖다 주려고 일부러 온 거예요? 그것도 두 개씩이나.”
범강림은 황씨에게 하나만 건네고, 다른 하나는 정교랑에게 주었다.
“이건 누이 거.”
“벌써 다 만들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황씨는 얼른 아기를 안고 있던 어린 몸종과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괜찮아 보여? 설계도대로 여러 번 수정했어.”
범강림이 회랑 아래에 앉으며 물었다. 정교랑이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교랑은 예를 표하고 열어 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반근의 눈에 이상하게 생긴 죽통이 보였다.
“이거 맞아요. 오라버니가 잘 만들었어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강림은 그제야 웃음을 터트리고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반근, 안에 있는 선반에서 이무가 저번에 가져왔던 함을 가져와.”
정교랑의 말에 반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함을 가져왔다. 정교랑이 그 속에서 긴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범강림이 가져온 죽통에 넣었다.
“아씨, 이게 뭐예요?”
반근이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러자 정교랑은 손에 든 죽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소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지?”
뭐냐고?
반근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고 정교랑의 안색을 살핀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뭐가?
어두컴컴한 게 저녁때쯤 눈보라가 칠 것 같은 하늘이었다.
뭐가 있다는 거지?
반근이 고개를 돌렸다. 벌써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선 정교랑은 계속해서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전에 없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지금 저게 나타나지?”
“뭐가 나타났는데요?”
반근이 물으며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예쁜 게 있나?
반근은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정교랑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뭘 보시는 거지? 딱히 달라 보이는 건 없는데.
“그런데 지금 보여선 안 되는데.”
“그럼 언제여야 하는데요?”
정교랑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아방.”
갑자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오싹한 듯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리자, 대문 앞에 선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모자를 벗고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반근은 얼른 예를 표하면서도 문지기를 보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나, 문 여는 소리 못 들었어?”
문지기가 억울한 듯 해명했다.
잠깐 넋을 놓은 사이에······.
반근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멍한 표정이었다.
남들 눈엔 정교랑이 늘 멍하니 있는 듯 보였지만, 반근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평소 아씨는 멍해 보여도 정신이 또렷했지만, 지금의 아씨는 두 눈이 어지럽고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씨?”
반근이 의아해하며 손을 뻗어 부축했다. 정교랑의 팔을 붙잡던 반근은 더욱 기겁을 했다.
떨고 있어! 아씨께서 떨고 계시다니!
“아씨, 왜 그러세요?”
반근이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에 진안 군왕도 놀라 얼른 문턱을 넘고 달려 들어왔다.
“왜 그래요?”
진안 군왕의 눈에도 정교랑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뽀얗던 얼굴엔 더욱 핏기가 없었고,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하던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심연이 엿보였다.
정교랑이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방! 여기 봐! 해에 흑점이 많이 늘었어. 저게 바로 태백성(太白星: 금성을 이르는 말)이지?”
“저건 양산(杨汕)이야!”
귓가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럼 내가 별이란 말이야? 내가 별이라면 아방 넌 달이야. 우린 나올 때도 들어갈 때도 언제나 함께할 거니까.”
정교랑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며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씨! 아씨!”
반근이 점점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목소리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교랑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웃음을 거둔 후 똑바로 섰다.
“난 괜찮아. 조금 추울 뿐이야.”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똑바로 서서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섣달엔 더 추워요. 오늘은 날씨가 안 좋으니 옷을 두툼하게 입어요.”
정교랑을 쳐다보던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안 군왕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물었다.
“이건 뭐죠?”
정교랑이 손을 내리자 죽통이 소매 속으로 들어가 가려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뒤돌아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은 곧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아방이라고 부르지 마요.”
반근이 화로에 숯을 더 넣자 대청 안이 한결 따스해졌다.
“내가 실수했어요.”
진안 군왕이 문밖 회랑 아래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정방이라고 부를게요.”
정교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나는 길에 인사나 할까 하고 들렀어요.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 갈게요.”
정교랑이 알았다고 하며 밖으로 나왔다.
“저기, 별일 없는 거죠?”
머뭇거리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고 물었다.
“일이 좀 있긴 한데, 괜찮아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정교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간식, 내가 만들었다고 했어요?”
이거 때문이었나?
진안 군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알았으니 다행이야.
“아니요, 아닙니다. 그날 낭자가 너무 달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숙수를 시켜 다시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폐하께 말씀드릴 때 낭자가 알려 준 대로 했다고 말씀드렸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때문에 화난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망설이며 물었다.
“물론 아니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젓자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방.”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얼른 손을 도로 거두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난 괜찮아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슬프지 않다고 하지 않는 대신,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인즉, 슬프겠지만 버텨 내겠단 뜻이리라.
대문 앞에 서서 공손히 예를 표하며 배웅하는 여인을 보고, 진안 군왕은 마차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나아갔다.
불행하게 태어났다가 간신히 결의를 맺은 오라비들이 전사했다. 간신히 오라비들의 명예를 되찾아 주었지만 또다시 풍림의 광적인 질책에 시달렸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바라던 대로 되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이를 악물며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는 상황은 그 누구라 해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으리라.
날씨가 흐린데도 거리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종들이 길을 열자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그런데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며 휘장을 살짝 들어 보았다.
섣달이 되자 경성은 한층 떠들썩해졌다. 거리의 점포에는 형형색색의 등롱이 걸려 있어 저녁 무렵이면 무지개가 뜬 것 같았고, 낮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옷차림의 어린 낭자들이 한 점포를 에워싼 채 웃고 떠들었다. 두모 속 웃는 얼굴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여인은 웃는 것조차 하지 않아. 한 번 또 한 번, 늘 안 좋은 일만 있었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였다.
뭘 해야 할까?
진안 군왕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자 마차 앞에 앉아 있던 내시가 얼른 마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리 오너라.”
진안 군왕의 손짓에 내시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네 친구가 기분이 안 좋다면, 네가 어떻게 해 줘야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지겠느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질문을 받은 내시는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내기에서 일부러 져 주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 여인이 어디 돈을 신경 쓸까! 더군다나, 내기를 할 리도 없고. 내시 친구밖에 없는 내시들에게 물어봤자지! 내시들의 관심사는 결국 돈이니까.
“썩 꺼져라.”
진안 군왕이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진안 군왕의 마차가 거리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태사국 사천대. 겨울이라 실내에는 화로를 놓아두었다. 관원 몇 명이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천체 관측 기구가 놓여 있었지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안에 있던 관원들이 재빨리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모습으로 천체 관측 기구를 들여다봤다.
“대인.”
누군가가 겁먹은 목소리로 불렀다. 관원들은 그제야 학생(學生)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자세를 편히 고쳐 앉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천문을 계산할 땐 방해하지 말라니까.”
관원 하나가 인상을 쓰며 나무라자, 사천대 학생이 얼른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대인, 제가 방금, 본 것, 같습니다.”
학생이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뭘 봤는데? 기록해 두면 되지 않느냐.”
관원 하나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태백성을 본 것 같은데······.”
술을 마시고 있던 관원들은 학생의 말에 풉 하고 술을 내뿜었다.
태백성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