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76
교랑의경 676화
씻고 나자 안에 있던 몸종들이 정리를 마치고 물러갔다. 진안 군왕은 머리를 풀며, 내실 창가 앞에 앉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위아래가 하나로 붙어 있는 녹색 치마 차림에 머리는 이미 풀어 뒤로 넘긴 상태였다. 부드러운 등불에 비친 자태는 평안하고 고요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왜 이렇게 책 읽는 걸 좋아해요?”
“책 보는 건 혼자 해도 되니까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혼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책을 낚아챘다.
“지금은 둘이잖아요.”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바둑 둬요.”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보고 웃었다.
“좋아요. 재미없다고 불평하지 마요.”
밤이라 그런지 등불 아래에 비친 정교랑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고아함이 더해지기도 했다.
“당신이랑 함께 있는데,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어요.”
그런 말을 내뱉고 나자 얼굴이 확 달아올라 귀까지 뜨거워졌다.
밥 먹을 때 했던 말보다 더 적나라하잖아.
“내가 바둑 가져올게요.”
진안 군왕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곧 정교랑이 말한, 재미없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또 한 번 승부가 결정 난 바둑판을 보며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으로 바둑판을 쓸며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소리쳤다.
“정방!”
괴로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고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래요, 또 이겼네요.”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잠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더 보고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했다. 손에 잡힌 손은 부드러웠다. 바둑돌을 쥔 터라 손등이 활처럼 굽어 있다 보니, 손아귀에 가득 들어왔다.
몸에 있는 살갗처럼 매끄럽네······.
진안 군왕의 시선이 둔해졌다. 바둑판을 바라보자 눈앞이 아득해지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녀는 손을 잡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미 익숙해졌는지 피하려는 뜻도 전혀 없었다.
어쩌지? 이제 어째야 하지? 뭘 해야 해?
진안 군왕은 머리에 땀이 흥건하다는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 봤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에 시선을 둔 채, 웃으며 물었다.
다 만졌냐는 뜻인가?
정교랑의 눈길에 진안 군왕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손을 풀었다.
“졌어요, 내가 졌어.”
진안 군왕이 손으로 바둑판 위의 바둑돌을 마구 어질렀다.
“안 할래요. 잠이나 자죠.”
침실은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안 군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칠흑 같은 휘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뒤척였다. 옆에 있는 베개로 무심코 손을 뻗던 그는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닿자 얼른 손을 거두었다.
얼마 안 가 같은 동작이 계속됐다.
옆에 있는 이는 시종일관 얼굴을 바깥쪽으로 향한 채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깊고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잠들었구나. 출타하느라 고단했겠지. 마음도 편치 않을 테고.
진안 군왕은 멋쩍은 듯 손을 거두었다.
조금만 더 추워졌으면. 더 추워져서 내 품으로 파고들면, 따뜻하게 해 주어야지.
진안 군왕은 정교랑 쪽으로 바짝 기대고는, 코에 맴도는 청량한 향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왕비 전하!”
경 공공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른 아침의 고요를 깨뜨렸다.
진안 군왕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곧장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제 진 상공 댁에 가서 진씨 가문 사람을 때리셨습니까?”
사람을 때려? 단랑을 못 만나게 해서?
진안 군왕이 놀라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렇네.”
“아, 아니, 어찌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때렸다면 때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감싸고돌기는. 이 판국에도 감싸고도냐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부인께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렸다고요.”
경 공공이 말했다.
“아닐세.”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자, 경 공공과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한마디 말하고 나서 때렸는데.”
경 공공은 멈칫했고, 진안 군왕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지 발까지 구를 기세로 소리쳤다.
“부인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지 아십니까? 어찌 진 상공 댁으로 달려가 그 집 사람을 때린단 말씀입니까.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진씨 가문에서 태자비가 간택된 때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시면, 남들이 그 저의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 공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잘됐네. 아무런 저의도 없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했는데.”
“몰라줄까 봐 걱정하셨답니다!”
경 공공이 분노로 소리치며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나 급하게 걸었는지 탁자 위에 있던 차의 열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어엇, 내 차가······.”
고 선생이 다급히 소리치며 손을 뻗어 차를 쥐었다.
오후에 차 한 잔을 마시는 건 고 선생의 오랜 습관이었다. 고급 차병(茶餠, 찻잎을 벽돌 모양이나 원반형으로 뭉쳐 굳힌 것)을 약한 불에 구운 다음 빻아서 가루를 내고 소금을 넣은 후, 물이 파도처럼 여린 무늬가 일어나듯 물결치는 삼비(三沸)로 끓여내 그 정수를 찻잔에 따르면,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뜨거운 차향은 고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차 드실 시간도 없으실 겁니다. 사방에서 지켜보는 눈이 많은데, 또 일을 벌이시다니요.”
경 공공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옷소매를 털고 자리에 앉았다. 고 선생은 차를 단숨에 비운 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당초 정사낭을 위해 기루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내놓은 분 아닙니까. 이제 진단랑이 태자에게 시집가게 됐으니, 분을 참을 수 없었겠죠. 달려가 사람을 팼다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경 공공도 차를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싸고돌기만 하십니다. 자기는 기분이 언짢다며 사람을 패 죽이고 남의 집 대문 앞에 던져둔 마당에, 부인도 기분이 안 좋으면 사람을 팰 수도 있지 뭐가 대수냐면서요.
대수로울 건 없죠. 하지만 그런다고 도움이 됩니까? 분이 풀렸답니까? 태자비가 시집을 안 가게 됐답니까? 저의가 뭐냐며 왈가왈부하는 소리만 늘고, 괜히 꼬투리만 잡히죠.”
거기까지 들은 고 선생이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저의라니 무슨?”
경 공공이 눈을 부릅떴다.
“저의가 뭐냐고요? 뭐겠습니까? 역심일 수밖에요.”
“역심이라······.”
고 선생은 그 말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뇌며 찻잔을 쥔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그 여인을 경성에 두면 안 돼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얼굴이 퉁퉁 부은지라 발음이 부정확했다.
진소가 진십팔랑을 힐끔 쳐다보았다.
참 독하게도 때렸군. 아니, 독하다고 할 순 없지.
작정하고 때렸다면, 따귀 한 대만으로도 앓아눕는 지경이 됐을 테니까. 무려 사람의 목을 비틀 수 있는 손이야.
“아버지!”
진십팔랑이 돌연 목청을 놓이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푹 쉬며 몸조리하거라. 국혼에 관한 일은 애초에 우리가 걱정할 것도 없어. 궁에서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진소가 피곤한 목소리로 하자, 진십팔랑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그 여인한테 맞아서, 그 여인을 내쫓으려 한다고 여기세요?”
진소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여인은 단랑을 위해 절 때린 거예요. 그 여인이 단랑한테 얼마나 각별한지는 저도 잘 알아요. 이번 단랑의 일은 제가 그런 게 맞아요. 단랑한테도 엄청난 상처겠죠. 어머니도 절 때리셨고 이젠 본 척도 안 하세요. 조부님은 아예 우리 일가를 버리고 떠나셨죠. 아버지께선 제 행동에 동의하셨지만, 속으로는 아버지 역시 절 원망하신다는 거 알아요.”
“널 원망하지 않는다.”
진소가 말했다.
원망하려거든 나 자신을 원망해야겠지.
“제가 그 여인을 경성에서 내쫓으려 하는 건, 그 여인이 한 말 때문이에요.”
“홧김에 한 말이니,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야.”
“아버지, 제가 진안 군왕은 양자로 들일 수 없다고 한 말은 홧김에 한 말이지만, 그 여인의 대답은 홧김에 한 말이 아니었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태자가 지금은 태자 자리에 있어도, 장차 황제가 될 순 없다는 뜻이잖아요.”
“십팔랑, 그건 네가 해석한 뜻 아니냐.”
진소가 팔을 휘휘 내저었다.
“다 홧김에 한 말이다. 앞으로 그런 말은 홧김으로라도 하지 마라.”
웃음을 터트리던 진십팔랑은 상처가 난 입 안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오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전 그렇게 이해했어요. 하지만 제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그 여인 또한 제가 생각한 그 뜻이라고 대답했다고요.”
진십팔랑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버지도 잘 아시죠?”
진소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런 사람이, 홧김에 말했겠어요?”
진십팔랑이 물었다.
그럴 리 없지.
과묵하고 쉽게 입을 열지 않지만,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저 자신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 여인이 떠나고 안 떠나고는 저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예전의 그 여인이었다면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해도, 상관없겠죠. 하지만 지금 그 여인은, 진안 군왕비예요. 그 여인 뒤에는 군왕이 있어요. 종친이 있다고요.
아버지, 몇 년 동안 그 여인이 저지른 놀랄 만한 일이 한두 가지였어요? 이번에도, 어디 한번 두고 볼 생각이세요?”
진소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침묵에 빠졌다.
한번 두고 보자? 그 여인을 상대로?
진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옆쪽에 세워 둔 병풍을 바라보았다.
진 노태야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떠났다. 진소는 진 노태야의 방을 그대로 보존해 두면서도, 그 병풍만큼은 자신의 서재로 옮겨 왔다.
병풍에 있는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그 여인을 상대로,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했던 이가 저리 많았나?
겁을 먹나 안 먹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반항을 하나 못하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패배를 인정하나 안 하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시골 도관의 관주든 언제나 침착하고 신중한 경성 관리 유 교리든, 백성을 속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노승이든 역참에 불을 지르려던 말단 관리든, 처음에 한 생각은 똑같았을 것이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 여인이 손을 뻗게 만든 그들은, 여지없이 그 손에 불귀의 넋이 되었다. 그런 여인을 상대로, 어디 한번 두고 봤다가는······.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봐라.”
“썩 내쫓아라! 당장 교지를 내리란 말이다.”
태후가 어서 인장을 찍으라며 내시를 재촉했다.
“예가 어디라고 달려와 태자의 혼사에 대해 묻는단 말이냐. 대체 꿍꿍이가 뭐야? 국혼 땐 축하 예물이랍시고 시신을 무더기로 보내려고?”
내시는 인장을 찍지 못한 채 고능준의 눈치를 살폈다.
“마마, 괜한 생각이시옵니다.”
고능준이 입을 열었다.
태자의 혼사가 결정되면서 결국 진소 가문의 여식을 태자비로 들이기로 했다. 이제 진소는 황실에 묶인 몸이 되었으니, 더는 올곧고 강직한 신하임을 앞세워 태후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태후도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건강까지 회복되면서 기력도 좋아진 터였다.
“괜한 생각은 무슨!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애가도 똑똑히 알아!”
태후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잘 아신다면, 더더욱 군왕을 보낼 수 없지 않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군왕은 이제 경성에서 명성이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마마의 손아귀에 있는 한 그 어떤 파란도 일으킬 수 없지요. 하지만 그자를 내보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애가는 단 하루도 그 녀석을 보고 싶지 않아.”
태후가 씩씩거렸다.
“고정하십시오, 마마. 말씀드렸다시피 태자의 일이 더 중합니다. 일단 태자가 혼례를 마치고 나면, 군왕을 손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