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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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험] 스킬을 활성화시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뭐야, 이거.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한테 [배신해]라는 [기아스]를 받아 인생이 꼬여 날 증오하다 못해 갈아 마시고 싶어 해야 정상인 카자크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니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며 나한테 다시 한번 [기아스]를 써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난 아직 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놈은 뭐가 어떻게 돼서 이런 결론에 이른 거지?
“그 남자 그만 보고 나를 좀 봐요, 서방님!”
여기에 비토리야나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내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아니, 이건 혼란이라고 하기엔 많이 넘친다. 이 정도면 혼돈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것 같다.
“어, 음.”
나는 망설였다.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뇌가 상황을 못 받아들이고 있다.
“왜?”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그렇게 묻는 게 고작이었다.
“제게 [유혹의 권능]을 거신 건 서방님이시잖아요! 서방님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
대답한 건 비토리야나 쪽이었다. 아니, 왜 네가 대답해. 난 카자크에게 물었는데.
“제 불찰로 인해 이진혁님께서 걸어주신 [기아스]가 풀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염치없는 요청임은 십분 알고 있으나 부디 제게 다시 [기아스]를 걸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카자크도 거의 즉시 이어서 대답했기에 굳이 내가 질문의 방향을 재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대답 같으면서 대답 같지 않은 소릴 들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대답하는 카자크의 표정과 목소리는 마치 주머니에 넣어놓은 소중한 사탕을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다 부모에게 다시 달라고 조르는 어린애 같았다.
[기아스]는 사탕이 아닌데 말이다!“엇, 그러고 보니······.”
나는 뭔가를 떠올렸다. 로제펠트에게 [죽어라]라는 [기아스]를 걸어 처치할 때의 일이다. 분명 그때, 로제펠트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황홀한 표정으로 말이다.
“이런, 젠장.”
새삼 깨달은 사실에 나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나쁜 놈인 로제펠트에게 황홀한 죽음을 선사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신성까지 써가며 공짜로 그런 서비스를 해줄 수는 없어. 카자크.”
내 말을 들은 카자크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가를 받도록 하지.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네게 다시 [기아스]를 걸어주마. 명령은 네가 정할 수 있도록 하고 말이야.”
카자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내일 어린이 대공원에 가자는 말을 들은 어린애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 대공원은 없어졌나? 아니, 어린이 대공원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 인류가 멸종했지. ······그거야 뭐 어찌 됐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제가 어떤 대가를 치르면 되겠습니까?”
“우선은 나한테 그 스킬을 보여줘. 방금 전에 비토리야나에게 마기 빨아들이는 스킬.”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즉시 요구했다. 나한테 매달려 찡찡대는 비토리야나를 무시한 채.
“서방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셨어! 나는 천국에 갈 거야!!”
그녀는 그녀대로 이상한 만족감을 얻었지만 말이다.
***
나는 카자크가 가지고 있는 전설급에서 신화급까지 해당하는 스킬들을 싹 쓸어왔다.
말만 들으면 꿀 같지만 사실 카자크의 스킬셋은 별로 호화로운 편은 아니라서 전설급 다섯 개에 신화급 두 개가 고작이었다. 이런 스킬셋으로 악마 여왕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우다니. 새삼 상성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위 스킬들도 싹 쓸어오고 싶지만 그러고 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간다. 아직 [선험]을 켜놓은 상태라 시간이 곧 신성 소모로 이어지니 낭비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받을 건 다 받았으니 여기서 [선험] 스킬을 종료시키면 일방적으로 이득만 보고 빠지는 게 가능하잖아? 하지만 그건 사기다.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게다가 지금의 내겐 이런 스킬이 있다.
[덮어쓰기(& Paste)] – 등급 : 신화적 유일(Mythic Unique)– 숙련도 : 연습 랭크
– 효과 : [선험] 발동 중 사용 가능. [선험] 스킬의 효과를 즉시 종료시키고 [선험]한 경험을 현실로 덮어씌운다. [선험]으로 인한 신성 소모의 50%를 되돌려 받는다.
지금 선험만 끄고 시간을 되돌리면 신성 캐시백이 날아간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지. [기아스] 걸어주는 거 신성 얼마 들지도 않는데 그거 걸어주기 싫어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냥 이 시점에서 [선험]을 끄고 카자크의 밑천을 털어먹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카자크와 비토리야나라는 위험인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인 지금 [선험]을 끌 수는 없다.
“좋아. 그럼 원하는 [기아스]를 말해봐.”
적당히 하고 만족하기로 한 나는 이쯤에서 카자크의 원하는 바를 들어보기로 했다. 영 말도 안 되는 거면 그냥 [선험]을 꺼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전과 같은 [배신해]면 충분합니다.”
······대체 이 변태는 내 기아스를 이행하면서 어떤 쾌락을 맛본 걸까? 궁금해졌지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알았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저항하지 마라. 안 걸릴지도 모르니까.”
나는 [기아스]를 쓰고 순순히 놈에게 [배신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 오오오!”
그러자 카자크 놈은 그 자리에서 절정에라도 이른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문득 눈을 빛내며 열띤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다.
“저는 이제껏 여러 번 배신을 해오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할 배신을 누구에게든 미리 예고하면 더 큰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런 카자크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우와, 진짜 변태 같다.
그런 내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도 안 쓰는 건지 카자크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여기 계신 이진혁 님과 사랑하는 비토리야나 님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방님 앞에서 사랑한다든가 그런 소리 하지 마.”
비토리야나는 차갑게 말했다. 놈한테 걸린 [유혹의 권능]이 누구 건데 뻔뻔한 소릴.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여자한테 똑같은 권능을 걸어놓고 피해 다니니 다른 사람 말할 게 아니다. 뭐, 입 밖에만 안 내면 되지. 나는 입을 한 일자로 꾹 다물었다.
분명 상처가 될 소릴 들었음에도, 카자크는 오히려 열망에 띤 목소리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이렇게 이어 말했다.
“사랑합니다.”
“하지 말라니까.”
비토리야나가 얼굴을 팍 찌푸리면서 말하자 카자크는 허리를 활처럼 젖히며 신음소릴 냈다.
“흐음아아! 사랑하는 분의 기대를 배신하는 건 또 각별하군요.”
“진짜 변태 같아.”
악마 여왕이 파랗게 질렸다. ······이런 걸로 비토리야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선언을 하지 않았군요. 선언합니다. 저, 카자크는 브뤼스만 님을 배신할 겁니다. 제게 큰 힘을 내려주시고 큰 은혜를 입혀주신 그분을 배신하는 느낌은 어떨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저는 가슴이 두근댑니다.”
그렇게 선언하고는 카자크는 크크크크큭 하고 웃어댔다.
이제부터는 이놈을 변태 같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왜냐면······, 이건 그냥 변태니까.
진짜 소름 돋네.
***
카자크는 배신을 위한 밑밥을 깔러가야 된다면서 어딘가로 서둘러 갔다. 나는 놈을 붙잡지도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에 대한 기대를 배신한답시고 반대로 할 거 같았으니까.
“야! 어디 가! 나한테 유혹 당했으면 내 말 들어야지!!”
그런데 비토리야나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인지, 떠나려는 카자크를 붙잡았다. 물론 말로만이다. 몸이 뒤로 빠져있는 게 잡으려는 생각 따윈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빨리 좀 꺼지라는 생각이 표정에서부터 푹 우려져 나왔다.
“그런 기대를 품고 계셨습니까? 아니, 절 꼴도 보기 싫어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절 보내려고 이러시는 것도요. 그 기대를 배신해 드리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테지만 아쉽게도 저는 진짜 배신에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상태라서 말입죠. 그러니 지금은 여왕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지요. 대신 다음에 반드시 여왕님께 어울릴 만한 꽃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말 진짜 빠르다. 혓바닥도 길고 말이다. 게다가 그 내용도 내용이다. 일부러 바라는 바의 반대로 말해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수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졌다.
앞으로 카자크를 상대할 놈은 고생 좀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당분간은 그게 브뤼스만이니 참 다행이다.
***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네요, 서방님.”
카자크가 떠나고 나자, 비토리야나가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응답했다.
“[흡마신법].”
“갸아아악!”
“서, 서방님! 어째서!!”
“우리가 같이 다니기엔 우리 둘의 전력 차가 너무 커. 네가 너무 세. 그러니까 그 힘 좀 나눠 갖자.”
“······그, 그렇게 되면 저랑 같이 다녀주실 건가요?”
아, 쿨 돌았다.
“[흡마신법].”
“갸아아아악!!”
좋아, 신성이 쭉쭉 쌓인다!
몇 차례 쿨을 돌려가며 [흡마신법]을 걸다가 나는 [덮어쓰기]를 통해 [선험] 스킬의 사용을 종료했다. 사실 아직까진 비토리야나가 더 강력하지만, 악마사냥꾼 직업을 졸업하고 얻은 스킬과 상성으로 내가 이길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흡마신법] – 등급 : 신화(Myth)– 숙련도 : A랭크
– 효과 : 신성을 소모한다. 지정한 대상의 마기를 흡수해 신성으로 바꾼다. [흡마신법]의 랭크도 많이 올렸고 말이다. 연습 랭크에서 시작해 A랭크까지 올리는 데는 시간이 별로 들지도 않았고, 신성은 오히려 흑자였다. 비토리야나가 강적 취급인지라 수련치를 잘 준 덕택이었다.
“좋아, 이쯤이면 됐겠네.”
비토리야나도 충분히 약해졌고, 나는 더 많은 신성을 쌓았다. 그러니 한 번쯤 시도해 봐도 될 것 같았다.
“저항하지 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를 해놓고, 나는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기아스]!”
– 명령하십시오.
– [명백한 신성]으로 현재 명령 가능한 글자 수 : 4글자
– +6 강화치로 인해 명령 가능한 글자 수가 2글자 늘어납니다.
– 상대의 격이 높습니다 : -1글자
– 명령 가능한 글자수 : 5글자
됐다! 5글자 띄웠다! 로제펠트를 상대로는 4글자였는데, 악마 여왕을 앞에 두고 5글자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성취감이 컸다. 강해졌구나, 나!
내릴 명령은 이미 정해두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