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별거 아닌 인사였는데, 아무래도 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겐 별거였던 모양이다.
나를 안고 있던 엄마도, 이제 막 엄마의 뒤로 걸어오던 아빠도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나디아…….”
“어……. 그,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고말고.”
아닌 거 같은데.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일렁이는 두 사람의 눈을 보고 있자니, 도리어 내가 당황스럽다.
나는 아르웬 언니와 루핀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엄마의 등을 다독였다.
다소 어색한 손길이었지만, 마음은 전해졌을 거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거든.
얼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옆을 보자, 카르테인 공작과 전대 공작 내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천천히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여긴 가족끼리 회포를 풀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당연한 일이었다. 골드게이트 공작가는 제국의 두 기둥 중 하나이자 약혼 논의가 오가는 집안이지 않나.
부모님을 맞이하는 이 자리에는 줄리엔이나 헤르잔 같은 고용인들은 물론, 타냐와 에이포드까지 모두 나와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당겨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엄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작게 헛기침하며 카르테인 공작가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두 사람의 손을 이끌었다.
“우선 인사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엄마, 아빠.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님과 전대 공작 내외이신 이안 님, 그리고 에스텔 님이세요.”
“그럼, 잘 알지.”
부드럽게 웃음을 지은 엄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연스럽게 전대 공작 내외를 마주했다.
“두 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작위를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에게 넘기시고 두 분은 또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헌신은요. 프리지아 님도 오래간만입니다. 이렇게 북부에서 두 분을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연이 닿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카르테인 공작가와 ‘약혼’이라는 걸 주제로 논의를 이어나갈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앗, 안 되겠다. 나는 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며 빠르게 두 사람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갔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가 짐도 좀 풀고 그런 뒤에 다시 보는 건 어떨까요? 저도 아직 두 분이랑 나누고 싶은 말들이 참 많은데.”
“나디아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잠시 여독을 풀고 계시면 실내 정원에 자리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따뜻한 차와 함께 긴 대화를 풀기에는 그곳이 더 한적하고 좋을 겁니다.”
“카르테인 공작.”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골드게이트 공작님.”
뒤에서 빠르게 내 말을 받은 클로드가 가볍게 목을 숙여 아빠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아빠의 푸른 눈에서는 클로드에 대한 어떠한 호감도 딱히 엿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내비칠 사람은 아니니까.
‘빠르고 정확한 지원과 탁월한 장소 설정이네요! 내 마음에 쏙 들어요!’
‘되도록 천천히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편하게 시간 보내십시오.’
엄마와 아빠의 팔을 잡은 채 클로드와 긴밀히 시선을 나눈 나는 잠시 감탄했다. 이거 봐라, 눈빛으로 얼추 대화 나누는 거. 이게 바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아는 사이라는 거다.
‘초반에 서로 시선만 마주해도 왜 보냐고 묻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괜히 아련해지는 기분을 빠르게 지워내고 줄리엔을 불렀다. 그리고 두 분과 함께 잘 정돈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분의 취향을 고려해 깔끔하게 준비된 방에는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타냐와 함께 고심해서 고른 라벤더 향의 아로마였다. 나는 한결 편해지는 코끝을 느끼며 두 분을 향해 편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을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익숙한 이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부 털어놓지 못했는데, 보고 싶었어요. 엄마, 아빠. 잘 지내셨죠? 아이바와 로렌드도 잘 지냈고? 같이 데리고 온 하녀와 시종들도 다 낯이 익네. 오랜만이다.”
“아가씨……!”
짧은 인사 하나에도 코를 훌쩍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잠시 쑥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어딘가 심장 한쪽이 간질거리는 게 제법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받았던 것과는 또 다른 포근한 애정들이 한껏 나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훌쩍거리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가볍게 외투를 벗은 부모님이 부드럽게 내 물음에 답했다. 물론 두 사람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잠긴 상태였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가 뭐 그리 큰일이 있었겠니. 우리도 보고 싶었단다.”
“그, 아르웬 언니와 루핀에게도 말했는데 소문은 죄송해요. 쓰러졌다는 소문이든, 약혼이든 어느 쪽이나 다 놀라셨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아빠가 손을 뻗어 툭툭 내 어깨 위를 두드렸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그때 그렇게 한 이유가 분명 있었겠지.”
인자한 아빠의 표정에 마음이 따뜻해지려던 찰나, 옆에서 장갑을 벗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내저으며 불쑥 입을 열었다.
“거짓말은. 네 아버지는 그날 집사장을 들들 볶았단다. 자기가 들은 소문이 잘못된 게 아니냐고.”
“부인도 마찬가지 아니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맡긴 행사도 뒤로한 채 달려오기까지 하셨으면서.”
“그건… 그건 그렇죠. 이곳에서 말하기에는 다소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는 네 소문을 듣고 카르테인 공작가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까지 했거든.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을 둘러싼 상황도, 갑작스러운 정치적 행보도 영 여러모로 수상해서.”
“아, 하하. 그러셨구나…….”
예리한 엄마의 추측에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르테인 공작가의 수작이라기보다는 내가 주축이 되어 만든 판이었지만, 어쨌든 이 움직임에 모종의 개입이 있었다는 걸 바로 알아챈 게 아닌가.
이대로 있다가는 실내 정원은커녕 방에서 순식간에 모든 걸 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빠르게 다른 주제들을 입에 담았다.
“네펠리 영애와 다른 영애들은요? 부요의 축제도 끝났고, 지금쯤이면 수도로 다들 돌아갔을 것 같은데요.”
“아, 그렇지. 네펠리 영애도 네 소식을 전하러 골드게이트 공작가에 왔었어.”
“네펠리 영애가요?”
이건 정말로 처음 듣는 소식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풀어냈다.
“수도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방문 요청을 줬었지. 궁금해할 것 같아 왔다고 하더구나. 사실 아르웬이나 루핀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우리가 나디아, 네 약혼을 허락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건 네펠리 영애가 전해준 말들 때문이었어.”
“아…….”
“네 눈이 반짝인다고 말해줬거든. 뭔가를 간절하게 바라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는 꾹 입을 다물었다. 아르웬 언니가 비슷한 말을 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가 이렇게 움직여 주었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내 표정을 본 아빠가 나지막이 웃음을 지으며 엄지로 내 볼을 문질렀다.
“여전히 네가 간절하게 바라는 게 카르테인 공작이라는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야. 아, 이것도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꺼낼 말은 아닌가? 뭐, 괜찮다. 예의 없다고 내쫓으면 널 데리고 홀라당 가 버리면 되니까.”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을 들으며 내가 콧잔등을 찡긋거릴 때였다.
“아, 네펠리 영애가 조만간 연락을 달라고 하더구나. 다락에서 어릴 적 ‘보물’을 찾았다면서.”
보물? 나는 느릿하게 아빠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다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렇구나.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 않아도 근래 편지해야지 하고 생각 중이었는데, 딱 좋네요.”
낯익은 사람들 덕분에 말랑말랑해졌던 심장이 일순 덜컥거렸다. 두통 탓에 예민해진 감정이 자꾸만 끄집어지는 과거에 크게 반응해서 생긴 일이었다. 특히나, 내가 알지 못하는 옛 기억들과 관련해서.
나는 갑작스럽게 메어오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눈짓으로 문 뒤를 힐끗 가리켰다. 빨리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조금 전에 카르테인 공작님이 실내 정원에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잖아요. 거기가 워낙 예쁘게 잘 꾸려져 있어서 제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거든요.”
“그래, 잘 알지. 나디아 너는 정원을 워낙 좋아하니까. 눈 뜨고 나서 네가 제일 많이 간 장소도 정원이었잖니.”
“…그랬죠. 음, 그럼 우리 실내 정원에서 다시 볼까요? 저도 방에서 옷 좀 편하게 갈아입고 다시 나올게요. 오랜만에 두 분 뵌다고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었더니 조금 불편하네. 어떠세요?”
“저런,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다 또 숨 쉬는 게 힘들어지면 어쩌려고.”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요.”
걱정이 가득한 두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내저었다.
어쩐지 치마 속 주머니에 든 황금 열쇠가 유난히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게 ‘골드게이트 가문’의 무게라고 주장하는 것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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