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8
“백발 약천존이 믿는다면 나 역시 믿어야겠지.”
입을 열며 돌아선 청홍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난 언제나 내게 답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었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알게 됐지. 그게 자네라는 걸. 윤회라… 난 내게 전생이 있지 않았을까 항상 생각했어.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붉은색과 나비를 좋아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거든.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고 그 이유를 현세에서 찾을 수 없다면 전생에 있는 거겠지. 내 전생의 이름이 홍접이었군?”
여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물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본 대로라면 전생 이전의 삶이 또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생에서도 자네를 보았지.”
한제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그 생에서 자네는 내게 질문을 하나 했어. 그리고 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고. 듣고 싶나?”
청홍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뭘 물었지?”
한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생에서의 기억을 유지하고 싶은지, 아니면 전생의 기억을 찾고 싶은지.”
다시 돌아선 홍접이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는 한제로서는 간파할 수 없는 빛이 어려 있었다.
“전생과 현세는 공존할 수 있어. 다만 전생의 기억을 되찾으면 현세에서 더 많은 구속을 받게 되지.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전생의 기억을 찾지 않는 것이 나을 거야. 한 번 떠올린 전생의 기억을 다시 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게 내가 이해한 바야.”
청홍이 약간의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조용히 답했다.
“그래서, 그때 뭐라고 답했나?”
한제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이전의 삶을 잊고 이번 삶을 살아가겠다고 했지. 모든 것을 인지한 채 차례차례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계속해서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될 거라고…”
“알겠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홍접이 뭔가를 떠올렸음을 알 수 있었다.
전생의 전생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에 한제는 심신이 진동했다. 그는 주작성에서 몽도를 발휘했을 때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정자 안에서 갓난아이를 안은 한 여인이 자신을 찾아왔던 것을 기억했다. 여인이 품에 안은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자 빗속에서 날아온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나뭇잎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모습을 본 한제는 홍접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린 바 있다.
잠시 후, 한제는 돌아섰다. 홍접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의 기억을 난 이미 대부분 잊은 상태야. 오직 자네의 그 질문과⋯⋯ 또 다른 한 사람만 기억하고 있을 뿐. 그가 자네에게 한 말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청홍이 눈을 감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
한제는 빗속을 걸어 나아가며 물었다.
“마음을 잃는 것은 망각⋯⋯.”
청홍의 목소리가 귀에 닿은 순간,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홱 돌아섰다. 눈에는 충격의 빛이 어려 있었다. 영혼으로부터 기인하는 충격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들고 있던 우산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우산이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묵지…”
한제의 눈앞에 자신이 아직 수준이 낮은 수련자였을 당시 주작성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비가 이렇게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사당 안에서 그는 한 대머리 사내를 만난 적이 있다. 방금 청홍이 한 말은 당시 그 대머리 수련자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했던 말과 같았다.
“이 비는 하늘에서 태어나 땅에서 죽습니다. 그 중간에서의 과정이 곧 인생. 마음을 잃는 것은 망각이죠.”
그 말은 한제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대머리 사내의 눈빛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당시 한제로서는 그의 눈빛을 간파할 수 없었지만 지금 다시 떠올리자 그 안의 슬픔과 고통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한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의문을 안은 채 떠나갔다.
청홍은 한참이나 말없이 멀어져가는 한제를 바라보며 서 있다가 쏟아지던 비가 차차 잦아들자 그제야 살짝 주먹을 풀었다. 주먹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몇 바퀴 맴돌더니 멀리 날아갔다.
“언제 잊을 셈인가? 아니면… 영원히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작정인가?”
고개를 숙인 청홍은 쓸쓸한 모습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
한제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윤회… 환생한 이들에게 전생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을 때만 해도 나 역시 윤회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데 만약… 내가 정말로 윤회 안에 빠져 있다면… 그렇다면 나의 전생의 기억은 대체 누가 일깨워줄 수 있단 말인가?’
고민에 빠져 있던 한제는 한참 후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윤회였군!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 윤회 안에 빠져 있다면 난 절대 망각을 택하지 않을 것이야! 절대로! 하하하하!”
우렁차게 웃던 한제는 불쑥 시고 황성의 조묘에서 고도삼분신을 진행할 당시 봤던,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인영을 떠올렸다.
그 인영의 외침도 다시 떠올랐다.
“세상!
세상의 꼭대기에 선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중생의 절을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숱한 역경을 넘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세상이 이렇다면 어찌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생이 이렇다면 어찌 소멸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경이 이렇다면 어찌 끝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난 내 방식대로 하늘의 눈을 감게 하고 대지를 잠들게 하고 황천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윤회를 멈춤으로써 이 세상이⋯⋯ 더는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을 중얼거리던 한제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 종국에는 온 세상을 뒤흔들 정도가 됐다. 하늘과 땅이 마구 뒤흔들려 온 선강 대륙이 폭풍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 ★ ★
선강 대륙 동주의 임화주(林化洲)는 매우 거대해 멀리서 보면 꼭 거대한 흉수가 누워 있는 것처럼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이 주의 서남쪽 일반인 도시 한구석에는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장사가 제법 잘됐는데 이는 그의 행실과 실력 덕분이었다. 모든 물건을 신중하고 튼튼하게 만들었고 책임감이 있어 오랜 시간에 걸쳐 굉장히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대장간 뒤에 딸린 집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와 여덟 살 난 딸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서른이 조금 넘은 이 건장한 사내가 가게 안에서 웃통을 벗은 채 끊임없이 쇠를 두들기고 있으려니 어린 딸이 덥지도 않은지 종종거리며 달려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행복하게 웃었다.
사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단순한 나날이었지만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딸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저 가정을 잘 유지하고 딸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며 살아갈 뿐이었다. 이런 소명이 그를 그토록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이 고향 마을에 적지 않은 친구들이 살고 있어 종종 다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날 밤, 잠이 든 사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마치 선제처럼 수많은 추종자들을 이끌며 적과 싸우고 있었다. 이별을 하기도 했고 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꿈속의 그에게도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지금의 딸과 같은 상이었다.
이런 꿈을 꿀 때마다 도중에 잠에서 깬 그는 멍한 얼굴로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꿈속의 일들에 대한 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곁에 잠들어 있는 아내와 그녀의 품에 안긴 딸을 보노라면 그런 갈망은 씻은 듯 사라졌다.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지금의 가족을 택할 것이다.
동부계
잠에서 깨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어두운 누군가가 밤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제는 대장장이, 청림을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행복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동부계의 선제로 살았던 과거를 잊은 채 일반인으로서 더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청림을 말없이 한참이나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은 부러움에 가까웠다.
“홍접과 마찬가지로 그의 선택 역시 망각이구나. 과거를 잊고 전생을 잊고 현세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들의 선택은 옳아. 그리고 나의 선택 역시 옳다!”
한제는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떠나갔다.
★ ★ ★
청수와 이천매를 제외한 모든 옛 벗들을 찾아가 전생의 기억을 일깨워주거나 그대로 내버려둔 채 떠나온 한제는 이제 더 이상 선강 대륙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천우주로 돌아가기 전 주일과 청상을 멀찍이서 바라본 한제는 주일의 얼굴에 떠오른 행복한 웃음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주일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수천 년간의 슬픈 사랑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제는 사도환이 준 술을 주일과 청상의 사랑을 축하하는 축하주 삼아 들이켰다.
다음으로 그는 조성으로 가 멀찍이서 해자 천존을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떠나갔다.
뒤이어 대혼문과 귀일종을 들렀다.
눈에 익은 경관에 당시 이곳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던 그는 천우주 중앙의 끝없이 이어진 산맥 위에서 잠시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우, 당시 네 분혼으로 이루어진 혼개는 나를 몇 차례나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 이한제는 은혜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하는 편이니 선조의 봉인을 풀어주는 것으로 갚도록 하겠다! 다만 네 몸은 이미 대지가 되어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바. 네 영혼의 봉인만 풀어 원신으로 응결시켜주마. 그럼 선강 대륙을 떠날 수 있겠지. 어떤가?”
한제는 대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순간 대지가 콰르릉 하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 줄기 기운이 솟아올라 산맥 위쪽로 거대한 허상을 이루었다. 천우의 허상이었다.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허상 앞에 한제는 매우 작아 보였지만 이 거대한 천우의 혼은 공손한 표정으로 한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감격과 갈망이 어린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끝에 비로소 자유를 되찾게 된 천우로서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당시 네게 받은 도움에 대한 보답일 뿐이니.”
이어서 한제는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천우는 고통에 찬 표정으로 바르르 몸을 떨었다. 동시에 녀석의 몸에서는 대량의 문양이 번득이며 선들이 나타났다. 천우의 몸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 선들은 하나로 이어진 채 심장과 같은 모양의 구를 형성했다.
쿵쾅! 쿵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