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7
“미안하네. 이는 내 선택이었어. 내가 자네를 선강 대륙에서 환생하게 했지. 자네와는 무관한 일이야.”
“내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주게!”
사남은 취기가 올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깊은 밤이 찾아왔을 때,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막사를 떠났다. 허공으로 떠올라 다시 막사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에 막사 밖으로 나와 자신을 올려다는 사남이 보였다.
“이한제, 이번 삶에 아무런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남왕이 되면 그때 자네를 찾으러 갈 것이야!”
사남이 크게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패기가 어려 있었다.
한제는 미소를 짓다가 결국에는 크게 웃었다.
“사도 자네가 왕이 되어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삶을 즐기고 나면 다시 찾아오겠네. 그때 다시 같이 술을 마시지!”
돌아선 한제는 긴 빛을 그리며 하늘 먼 곳으로 사라졌다.
“전군 대열하라! 남왕을 데려오도록! 내 오래 전부터 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젠장, 그딴 놈이 무슨 남왕이란 말이냐!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내가 남왕이 될 것이다! 으하하하!”
전보다 훨씬 젊어진 듯한 사남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윤회⋯⋯ 대체 윤회란 무엇인가? 이전까지는 내가 이미 윤회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회는 하늘이라고… 허나 윤회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광인의 선택은 윤회가 아닐지도 모르나 주은혜와 사도환의 선택은 윤회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 남기를 택했어. 그들에게 수반된 구속과 인연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지.”
한제는 다소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주은혜는 이번 생에서 만난 부모와의 정을 떨쳐내지 못했고 사도환은 평생을 함께한 병사들을 떼어놓지 못했어. 사도환의 말대로 한 차례의 윤회에는 너무나 많은 구속이 따라붙는다. 그 인연들을 어떻게 단칼에 끊어낼 수 있겠는가? 이게 바로 윤회의 힘이다. 그 안에 빠진 이상 절대 빠져나올 수 없지. 어쩌면… 스스로 빠져나오기를 원치 않는 것인지도 모르고…”
한제는 점차 깨달음을 얻어갔다. 주은혜, 그리고 사도환과의 만남을 통해 윤회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윤회는 하늘이자 거울이기도 해. 그 거울 속의 자신이 바로 윤회인 셈이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 ★ ★
선족 구역 북주, 울창한 숲 안. 험해 보이는 이곳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동굴이 하나 있었다. 주위에는 인적이 없어 짐승들만 배회했지만 이 동굴만큼은 생겨난지 수만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감히 그 안에 발을 들인 짐승이 없었다.
동굴 안은 매우 호화로웠다. 수많은 야명주가 빛을 뿜어내 동굴 안을 환히 비췄으나 적막 때문인지 그 빛은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졌다.
동굴 안의 주실(主室) 안에는 한 수련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비쩍 마른 난쟁이로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다. 이 어린 난쟁이 수련자가 어두운 안색으로 호흡을 이어가면서 동굴은 더욱 음산해졌다.
그때, 돌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 음산한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대두(大頭)⋯⋯.”
흠칫 놀란 큰 머리 수련자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곧장 입을 벌려 한 줄기 녹색 빛을 뿜어냈다. 이 빛은 날카로운 쉭 소리와 함께 전방의 하얀 인영에게로 돌진했다.
녹색 빛으로 나타난 것은 한 마리의 흉측한 지네였다. 이 지네는 한제 근처에 이르기도 전에 짙은 비린내를 훅 풍겼으나, 한제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큰 머리 수련자는 매우 놀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보다 약간 더 수준이 높은 적을 만났을 때도 원신 안에서 제련된 이 지네는 상대의 몸을 칭칭 감아 도망치거나 반격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허나 저 백발의 수련자는 손짓 한 번으로 그 지네를 허공에 띄워놓았다. 심지어 상대가 무슨 신통술을 발휘한 것인지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마도! 나를 죽일 셈인가!”
큰 머리 수련자가 우렁차게 외치자 그의 몸에서는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곧장 도망치려 했다.
“마도?”
한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퍼져 나가고 있는 안개를 향해 손을 뻗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안개를 관통해 큰 머리 수련자의 미간에 떨어졌다.
“으헉!”
큰 머리 수련자는 몸을 격하게 떨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멍해졌고 눈앞에 온갖 기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한제는 허공을 움켜쥐어 사방에 존재하는 힘을 응집해 작은 검을 하나 만들어냈다. 응집된 세상의 힘과 한제의 신술로 만들어진 엄청난 검이었다.
그 검을 던져 동굴 안쪽 벽에 박아 둔 한제는 짙은 안개 안에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대두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소매를 휘둘러 세상의 힘을 응집해 만든 대량의 단약을 호리병에 넣어 옆에 내려놓은 뒤 곧장 돌아서서 동굴을 빠져나갔다.
한참 뒤, 안개가 흩어졌을 때, 큰 머리 수련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 텅 빈 동굴을 멍하니 살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주인님⋯⋯.”
이내 벽에 박혀 있는 무시무시한 칼과 짙은 힘이 느껴지는 단약이 가득한 호리병을 바라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 ★ ★
북주에 포함된 작은 주. 수십 갈래의 긴 빛이 하늘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한데 그때, 저 멀리서 밝은 빛 한 줄기가 번득였고 이들이 흠칫 놀라는 사이에 다가오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나 반짝이는 빛이 흩어져 사라지면서 그들 중 붉은 옷을 입은 한 아이의 미간에 떨어진 것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아이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봉인되어 있던 전생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우왕좌왕하던 일행은 잠깐의 상의 끝에 다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고 붉은 옷의 동자는 멍한 눈으로 무리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몇 시진을 날아간 끝에 어느 산봉우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을 때, 이 동자의 눈빛이 점차 복잡하고 혼란함으로 들어찼다.
“나는⋯⋯ 홍삼자.”
붉은 옷의 동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동주의 남니주(南尼洲)에는 작은 종파가 하나 있었다. 수련자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고 자리를 잡은 터의 영기도 그다지 짙지 않았다.
선족의 몇몇 대천존과 선황으로부터 전력을 다해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이런 작은 종파들은 어쩔 수 없이 규모가 큰 종파에 규합됐다. 전쟁이 시작되면 작은 종파로서는 어마어마한 전투를 견뎌내지 못하게 될 테니까.
이 작은 종파의 종주인 신표는 수준이 낮지 않았지만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자신의 종파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지금과 같은 수준에 올라 종주가 된 그로서는 자신의 종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큰 종파에 규합되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어떤 종파에 의탁할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종파의 장로 중에도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이 나오면서 급기야 종파가 분열할 조짐까지 보이고 있었다.
신표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백의백발의 청년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신표와 몇 시진을 함께한 뒤 곧장 떠나갔다.
백의의 청년, 한제가 떠났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표의 눈은 흐리멍텅했다. 그러나 몇 시진이 지난 후에는 결연한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음을 잃는 것은 망각
한편, 천방주(天方洲) 내에는 일월종(日月宗)이라는 종파가 있었다. 수련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천방주 최고의 종파이자 동주 9종 13문 중 하나였다.
이 일월종에는 지난 1천 년간 수많은 천재가 배출되었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청홍이라는 여인이었다. 그 천부적인 자질은 누구도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 수백 년 만에 세 번째 단계 수련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열기 절정에 올라 있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공령기의 수련자가 될 터였다.
청홍의 이런 놀라운 성장 뒤에는 일월종의 혼신의 도움이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그만큼 일월종에서 이 여인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일월종에는 거의 항상 폐관수련을 하는 금존 수준의 대장로가 있었다. 천존열에 진입하지 않았을 뿐 이미 천존에 이를 실력이라는 소문이 있는 자였다. 그는 청홍을 직접 제자로 받아들여 몇 년에 한 번씩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제자를 지도했고 심지어는 제자를 자신의 폐관수련 장소로 데려가 함께 수련하기도 했다.
청홍은 일월종의 성녀로 불리며 수많은 수련자에게 추앙을 받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연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매우 냉랭해 1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남자에는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일월종 내 제자들의 흠모는 깊어져만 갔고 특히 몇몇 장로의 자손들은 자신이라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홍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했다.
청홍은 또 한 번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왔다. 오랜만에 본 하늘은 어두웠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청홍은 이날따라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동굴 앞에 서서 하늘을 채운 시커먼 구름과 그 아래로 스민 자홍색 햇빛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멍해졌다.
바로 그때,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멀리서 광풍을 뚫고 하늘거리며 날아와 주위를 맴돌았다.
종파 사람들은 청홍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붉은색과 나비를 좋아했다.
춤을 추듯 팔랑거리는 나비를 바라보던 청홍의 눈빛은 더욱 멍해졌다.
그녀 역시 선강 대륙에서 환생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꿈속에서 종종 이상한 경험을 한 바 있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곤 했다. 그녀가 항상 무덤덤하고 냉랭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콰르릉!
천둥이 울리면서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뒤섞인 빗방울이 마치 장막처럼 드리웠다.
그때였다. 청홍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접.”
속삭임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는 빗소리와 천둥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주위를 맴돌던 나비는 청홍의 손에 앉았고 그녀는 주먹을 살짝 쥐어 비바람으로부터 나비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자신을 위해 이렇게 비바람을 막아줄 사람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돌아선 청홍의 눈에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받치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사람이 보였다.
“홍접이라⋯⋯ 예쁜 이름이군.”
청홍은 백발의 청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고고하고 냉랭한 아름다움이 한층 더 깊어졌다.
“마음에 든다면 네가 홍접이 되면 되겠지.”
이 여인을 바라보는 동안 한제의 눈앞에는 동부계에서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여인은 조용히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내리는 빗속에서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였지.”
이내 청홍이 조용히 말했다.
“윤회를 믿나?”
한제는 여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여인이 반문했다.
“나는⋯⋯ 난 믿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