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89
곁에 있는 아내를 바라보던 그의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 그 여인에 대해서는 본래 조금의 감정도 없었다. 만약 등화원의 세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오랜 시간 그녀와 살을 맞대고 살아온 이산은 등 씨 가문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마음만큼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못했다.
등삼의 긴 머리는 이미 하얗게 센 상태였고 얼굴은 쉰 정도 되어 보였다. 자세히 보면 그는 이산의 아내와 매우 닮아 있었다. 제법 준수한 그의 흠집 없는 얼굴에 박힌 두 눈은 깊은 바닥에서 반짝이는 보석보다 더 빛났다.
“수연아, 지금 우리 등 씨 가문은 강적을 만났고 가주께서는 나와 보시지도 않는다. 뭔가 이상해. 만약 이번에 무사히 등가성으로 돌아가거든 너희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거라.”
등삼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등수연은 등삼의 딸이었다. 사실 등삼이 이전까지 폐관 수련을 하던 밀실에서 나온 것은 등수연을 안전하게 등가성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말한 ‘너희’란 등수연과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등수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만약… 아버지도 위기에 봉착하면 등가성으로 돌아와 저희를 찾으려 하지 마시고 조나라를 떠나세요. 할 수 있는 한 멀리요.”
등수연이 망설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산은 옆에서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내심 그는 냉소하고 있었다.
등삼은 사람을 꿰뚫어볼 듯한 냉랭한 눈으로 이산을 힐긋 바라보았다. 표정의 변화가 없어 기쁜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수연의 머리를 쓸었다. 마음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듯했다.
그는 오래 전 가주에 의해 억지로 아내와 떨어져 여태껏 살아왔다. 모든 것은 그의 아내는 일반인이고 그는 등 씨 가문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가주가 가장 중시하는 증손자 중 하나였지만 그는 그가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등 씨 가문의 후손은 반드시 신선이 될 자격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강해져야 했다. 가주보다도 더 강해져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의 경지는 높아졌고 두 딸도 그의 도움 아래 신선계에 발을 들였지만 그의 아내는 이미 수명이 다해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의 비통함은 아직도 전혀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는 스스로를 단속하며 온 마음과 힘을 수련하는 데에만 쏟았다.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아내와 닮은 등수연은 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아내를 향한 그의 그리움과 미안함을 대체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에 그는 평생 어느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냉랭한 눈빛으로 이산을 훑은 등삼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산,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는 것은 수연이 때문이다. 썩 꺼져라! 오늘부터 수연이와 너는 조금의 관련도 없다.”
이산은 눈을 번득이며 등삼을 바라보다가 냉소했다.
“성질도 대단하시군요!”
말을 마친 그가 뒤로 휙 물러나 자리를 떠나려 했다.
수연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안색이 변해 얼른 이산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술을 깨문 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삼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으나 결국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렸다. 수연의 눈빛은 아내의 그것과 거의 똑같았다. 수연의 앞에서 이산을 죽일 수는 없었다. 수연이 상처 입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산, 당시 등 씨 가문이 너희 가족들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난 네가 내 딸을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는⋯⋯ 혼인한 관계가 아니냐. 네 부모님은 네 곁에 없을지 몰라도 네 아내는 네 곁을 계속 지킬 존재다. 알아서 잘하도록 해라.”
이산은 묵묵히 수연을 힐긋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그도 만약 수연에게 위험이 닥쳐온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연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두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산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그녀의 말은 단호하고 결연했다. 이 여인은 여태까지 이산이 영원히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등삼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속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는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이전에 등 씨 가문의 세력이 강했을 때에는 이산의 삶과 죽음이 갖는 의미는 크지 않았다. 이산이 경거망동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등 씨 가문이 위험해진 지금, 모든 것은 달라졌다. 등삼은 등가성에 돌아가면 기회를 봐 이산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러지 않으면 수연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검은 안개가 하늘 끄트머리에서부터 손길을 뻗어왔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가득 뒤덮은 검은 안개는 마치 언제든 아래로 엄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등삼의 눈빛이 순간 한곳을 향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 검지로 복부를 찌르더니 원영의 정혈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한 덩어리의 빛이 그의 저물대에서 튀어나가 정혈에 섞여들었다. 그러자 빛의 원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삼이 그것을 쥐자 수연은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등삼은 자신의 딸을 그 빛의 원으로 던졌다. 그녀는 이산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애걸했다.
“아버지!”
그 목소리에 등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오른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산을 빛의 원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등삼
이산은 수연과 함께 그 빛의 원 안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은 안개가 하늘을 뒤덮은 순간 자신의 경지가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대량의 원영 정혈을 토해내 자신의 딸을 피신시킨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아쉬움은 없었다. 몸을 곧게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본 그의 곁에 번득이는 주황색 비검이 하나 나타났다. 그가 직접 만들어낸 도운(悼韻)이라는 검이었다. ‘운(韻)’은 그의 아내 이름에서 따온 글자였다.
그는 매일 영력을 이용해 이 비검을 닦았고 자신 외의 그 누구도 심지어 등화원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과 싸울 때에도 이 비검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이 비검은 그에게 수연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아내의 피 한 방울을 넣어 만들어낸 비검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피로 인해 비검의 위력은 적지 않게 떨어졌지만 등삼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 비검과 삶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등삼의 마음에 강력한 적의(敵意)가 일었다. 만약 자신에게 죽음을 택하게 한다면 그는 이 비검과 함께 죽고 싶었다.
그가 가볍게 비검을 매만지며 마지막으로 비검을 닦아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번득이며 결심한 듯 두 말 않고 그 비검을 두드렸다. 비검은 웅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하늘에 가득한 검은 안개를 향해 날아갔다.
등삼은 훌쩍 뛰어올라 비검을 바짝 쫓았다. 온몸의 영력을 극한까지 발동시킨 그는 비검과 함께 한 줄기 유성이 되어 검은 안개를 뚫고 올랐다.
그 유성 속에서 등삼은 흐릿하게 자신의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유성은 하늘을 가르고 검은 안개를 뚫고 오른 뒤 1백 리 이상 떨어진 곳에 내쳐졌다. 요동친 검은 안개가 한데 모여들어 허구의 인영을 이루더니 점차 한제의 모습이 되었다. 그는 뭔가 생각이 있는 듯 유성이 질주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방금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한제를 향해 돌진한 중년 남자는 극의 경계로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죽음을 맞은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사무친 슬픈 마음을 한제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을 제련해낸다면 훌륭한 마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등 씨 가문에 이렇게 정이 깊고 의로운 사람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자의 영혼은 거두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어쨌든 등 씨인 이상 그는 죽어야만 했다.
1백 리 밖, 유성이 떨어진 자리에 있던 등삼의 몸에는 조금의 상흔도 남지 않았다. 부릅뜬 눈도 감기지 않았지만 코와 입에서는 숨결이 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의 손에 들린 도운이라는 이름의 비검은 마지막으로 한 번 확 밝아졌다가 조각조각 부스러졌다.
★ ★ ★
등가성.
등화원은 자신이 기거하는 건물의 최고층에 올라 멍하니 한 줄로 놓여 있는 눈앞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총 아홉 개 중 다섯 개가 부러져 있었다. 등화원이 그것들을 살피고 있던 그때, 등삼을 의미하는 옥패가 쩍 소리와 함께 둘로 갈라져 버렸다.
등화원은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는 한순간에 폭삭 늙은 듯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부러진 옥패를 하나하나 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삼의 옥패 위에 손을 뻗었을 때, 그의 눈에서는 지난 4백 년 동안 한 번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해야⋯⋯.”
등화원이 중얼거렸다.
등해는 등삼의 본명이었다.
등 씨 가문의 핵심 구성원 아홉은 각자의 명칭을 계승받음과 동시에 이 건물 안에 영혼 한 자락을 심은 옥패를 남겨두게 되어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옥패들은 하나하나 부러져갔고 그때마다 등화원은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등화원은 등오의 죽는 과정을 직접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등가성에 거의 도착한 그때 닥쳐온 그의 죽음에 등화원의 철통같은 마음도 아파왔다.
등오는 등일을 제외하면 당시의 등력과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는 등화원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오면서 성격이 뒤틀린 등구는 수명까지 바쳐가며 극단적인 수련을 진행했다. 등화원은 그를 위해 이미 최고급 단약을 준비해놓은 상태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단약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등팔, 등륙, 등사 역시 등화원의 마음속에 저마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등삼은 특히 남달랐다.
등화원은 등삼을 가문의 치욕이라 말했다. 핵심 구성원이 일반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다니. 그 모습에 화가 난 등화원은 그들을 억지로 떼어놓았고 무정한 세월은 그 여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등화원은 등삼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등삼을 아끼는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의 일에 대해 등화원은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후회는 이미 길을 잃은 상태였다. 이제 등삼은 죽고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 ★ ★
한제의 탄혼은 등 씨 가문의 핵심 구성원 여섯을 죽인 뒤 곧장 돌아왔다.
탄혼을 거둔 한제는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방금 그 중년 남자를 죽인 순간, 그는 누군가의 인영을 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이산이었다.
이산 곁에 있던 여자는 그 중년 남자의 딸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분명 무슨 관계가 있는 듯했다.
한제는 금번과 오래된 거울 그리고 마혼을 회수했다. 잠시 후 발을 살짝 구른 그는 흡혈 마수에 올라타 신식을 펼쳤고 이내 그 중년인의 딸과 이산을 찾아냈다.
여인은 등가성이 아닌 이웃나라와의 국경을 향하고 있었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들을 뒤쫓았다.
등수연의 눈에는 애통함이 어려 있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다. 그 불길함이 마음을 짓눌러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이산 역시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등 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통쾌했으나 그 통쾌함은 조금씩 염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산은 우뚝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가족들이 등화원에게 참살당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산이 멈추자 같이 멈춰 선 등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 남자 자신의 남편뿐이었다.
한참 뒤, 이산이 눈을 번쩍 뜨더니 자신의 뺨을 몇 대 호되게 내리쳤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등 씨 가문은 나의 원수야. 등수연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난 아무런 감정이 없어. 등 씨 가문 사람이라면 모두 죽어야 해!’
등수연은 얼른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산은 일부러 더 냉정하게 등수연의 손을 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