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90
“후배 이한제, 천운자 선배님을 뵈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전투 와중 반쯤 무너져 내린 자한각이었지만 현판만은 멀쩡했다.
“멋진 글씨로군!”
노인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하얀빛이 번쩍하더니 자한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사방의 대지에 일어났던 균열도 파괴되었던 바위와 나무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왔다.
손짓 한 번으로 발휘된 그의 신통력에 한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한제, 난 당시 주작성에서 널 보자마자 제자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1백 년 동안 수련생으로 둘 생각이었지. 허나 다시 보니 생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드는구나. 자계의 정식 제자가 되어 이 천운자 아래에서 하늘의 대도(大道)를 수련하겠느냐?”
천운자는 엄숙한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하게 말했다.
“제자 이한제, 스승님을 뵈옵니다!”
“좋다!”
천운자는 크게 웃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자애로운 빛이 담겨 있었다.
“네 사저의 원신을 방출할 수 있겠느냐. 늦었다면 나는 제자 하나를 잃게 되는데…”
고개를 든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저의 원신을 내보낼 수는 있으나 나머지 둘은 제게 불손하게 군 까닭으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천운자는 잠시 한제를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제는 원신을 움직여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원신을 존혼번에서 꺼냈다. 한 줄기 보라색 빛이 한제의 입으로부터 전방 수백 척 밖으로 번쩍 튀어나오더니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네…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여인은 풀려나자마자 포효하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반면 한제는 서늘한 눈을 번득일 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만!”
천운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한마디에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원신은 순간 반짝이는 빛으로 부서지더니 천운자의 손짓 아래 그의 소매 안쪽으로 거두어졌다.
한제는 흠칫 놀라 바짝 졸아든 눈동자로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원신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제만 남고 다들 물러가라!”
천운자는 소매를 휘두르며 몸을 훌쩍 날리더니 자한각에 착지했다.
모든 제자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조성살 역시 잔뜩 구겨진 얼굴로 한제를 한참 동안 훑어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오늘 일로 모든 제자들에게 한제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이제 그에게 불손하게 굴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한제는 천운자 곁에 공손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운자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강한 자였다. 그는 사도환조차 천운자의 적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아무리 사도환이라 해도 한마디 말로 한 사람의 원신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으며, 한마디 말로 만물을 원상복구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선술(仙術)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지 수련자가 발휘하는 신통력의 수준이 아니었다.
사도환은 함께 지냈던 지난 한 달 동안 한제에게 수련자의 법술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중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이 바로 선술이었다.
선술은 그저 선력을 운용해 발휘하는 법술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정한 선술은 수련 연맹이 수련성에 하사한 천도의 결인과 같은 거대한 신통력이었다. 결인은 전승받아야 하지만 선술은 구결과 결인하는 법만 익히면 된다는 점이 달랐다.
선계가 붕괴하면서 많은 선술이 사라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선술에도 등급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하급, 중급, 상급 선술로 나뉘었다. 그 위에 최고급 선술도 있었으나 이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사도환도 그런 것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쳐준 세 개의 필살기는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환이 1대 주작 엽무우에게서 배운, 결함이 있는 하급 선술을 오랫동안의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마도를 익힌 수련자이기에 이 필살기들 역시 필연적으로 마성(魔性)을 띄었다.
조용히 자한각 밖에 서 있던 천운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한’ 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한제는 그 곁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천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이 스승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역시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표정에 분노의 기색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선술(仙術)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을 내쉰 천운자는 시선을 거두고 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좋은 글자로구나. 훌륭해. 저 글자를 보니 넘쳐나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진다. 네 곁의 누군가가 마도를 수련한 모양이구나.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네게도 자연히 마도의 기운이 묻었겠지.”
한제는 심장이 덜컥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은 빠르게 돌다가 금지된 법술을 부려 선마체가 되었던 이사형이라는 그 중년 사내에게 머물렀다.
한제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분명 제 곁에 그런 이가 있었습니다. 허나 이리로 오는 도중 갈라졌지요.”
하얀 수염을 쓰다듬던 천운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천운성에 왔으니 상관없다. 이 스승의 눈에 정사선마(正邪仙魔)의 구분은 없으니까. 있는 것이라고는 제멋대로인 마음뿐이니! 천명… 세상의 모든 것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 마음에 도심만 있다면 수많은 대도를 모두 익힐 수 있음이니라.”
“예, 스승님.”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금 떠올린 이사형의 법술은 분명 정도 문파가 부릴 법술이 아니라 마도의 그것에 가까웠다. 이를 통해 천운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단 좀 쉬어라. 3개월 뒤면 나의 생일이라 온 천운성과 주변 수련성에서 뛰어난 수련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 기회를 이용해 네가 내 제자가 되었음을 선포하겠다.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네 대사형이 알려줄 것이다. 그럼 쉬거라.”
천운자는 말을 마친 뒤 몸을 훌쩍 날려 천천히 멀어져갔다.
한제는 공손하게 떠나는 천운자를 배웅한 뒤 몸을 돌려 자한각으로 들어갔다.
자한각 3층의 밀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기이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천운종에는 안심하고 발을 붙일 수 있겠군. 다만 이곳에서는 너무 방자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겠어! 천운자는 나의 선검을 보았을 터. 허나 이곳에서 정말로 뿌리를 내리려면 선검을 숨길 수는 없었을 거야.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드러냈다. 그러니 천운자도 나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겠지. 앞으로도 그를 속이지 않아야 적당한 보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나저나 둘째 사형이라는 자가 사용했던 금지된 법술도 꽤 괜찮더군.”
한제는 앞으로 할 일을 떠올려보았다. 이제 영변기 초기 절정에 이르는 것이 중요했다.
“인(人)의 관문에서 난 진리를 추구하면서 여러 차례의 윤회를 겪음으로써 도심을 깨달았지. 천(天)의 관문에서는 천도를 찾다가 경지가 승화되었어. 이제 영변기 중기까지 머지않았지만 그러려면 대량의 선옥이 필요해. 지금 가진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제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두 손으로 결인을 해 다양한 금제를 자한각에 걸어둔 뒤 두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했다.
★ ★ ★
자종 동쪽, 바닥이 비취로 된 곳에 매우 호화로운 누각이 하나 있었다. 현판에는 자성각(紫星閣)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성각 안으로 들어선 조성살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이를 갈았다.
“이한제! 나는 스승님과 2천 여 년을 수련하여 그분을 잘 알고 있다. 그 분은 너를 조각(祖閣)에 데려가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고 네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금지된 법술을 가르쳐주시지도 않았다. 내 생각대로라면 이것이야말로 너에 대한 스승님의 진정한 시험일 터.
3개월 뒤 생신 연회 때 네 능력이 자계(紫系)를 능가함을 증명한다면 스승님은 너를 진정한 제자로 받아주시겠지. 허나⋯⋯ 난 절대 네게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조성살의 눈이 분노로 벌겋게 물들었다.
“자계에서 천운칠자의 일원이 될 사람은 나뿐이다! 이(二)사제는 이번 수모로 큰 한을 품고 있을 테니 잘 이용할 수 있겠어. 삼사제는⋯⋯ 도통 속을 알 수 없고 까다로우나 내 말을 듣게 할 방법은 있지.
넷째⋯⋯ 그 아이의 수준은 매우 높지만 그 아이를 다룰 방법 역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섯째는⋯⋯ 이미 문정기 수준에 올랐지만 손운이 천운칠자에서 제명된 뒤 천운종을 떠났지. 이번에 그가 돌아온다면…”
조성살은 자신의 육(六)사제를 떠올리고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한제 너만이 나의 유일한 적수일 것이다. 네놈은 본래 내 눈밖에 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오늘 보니 신통력도 뛰어나고 법보도 많아 그 위력은 영변기 후기도 두려워할 정도지. 그러니 나의 최대 적수라 할 수밖에…
아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회복만 되었다면 제아무리 많은 법보를 가졌다 해도 영변기 초기 수준의 녀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을!”
조성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으로 자한각이 있는 쪽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걸렸다.
“칠사제, 일단 사(四)사매와 싸움을 붙여주지.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그저 몇 년간 회복이 필요한 정도의 부상만 입혀줄 것이다. 내가 천운칠자에 들 때까지만 얌전히 있게나. 그때가 되면 너는 이미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크크크.”
★ ★ ★
자종 서쪽에는 우아한 유백색의 누각이 있었다. 이름은 자미각(紫薇閣)으로 그 안에서는 백미가 얌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꺾어온 이 가지에는 여린 새싹이 움터 있었다.
가지를 바라보며 백미의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한제의 수준은 정말로 기이하군! 교역성에서 만났을 때에 비해 훨씬 약해진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나의 새로운 사제에게는 적지 않은 비밀이 있는 듯하군. 허나 비밀이 많을수록 매력적인 법이지.”
백미는 오른손 검지를 입가에 댄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웃었다.
★ ★ ★
밤에 접어들자 자종은 달빛 아래 한층 더 고요해졌다.
깊은 밤, 자종의 제자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오직 한제였다. 유성처럼 찬란하게 이 천운종에 등장한 그 이름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두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정작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호흡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첫 번째 햇빛이 자한각 3층의 밀실 꼭대기에 내리쬐던 때,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맑은 눈빛을 번쩍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선옥⋯⋯.”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누각 밖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