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88
한제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반짝이는 그의 두 눈은 마치 세상 모든 금제를 다 꿰뚫어볼 듯했다.
한제가 오른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자 사방으로 튀었던 검은 물방울이 모두 바르르 떨리며 그의 손바닥 위로 응집되어 작은 공이 되었다.
그 공에서는 검은 빛이 번득이면서 기이한 한기를 발산했다. 그 빛과 한기에 온 사당은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 검은 공을 바라보던 한제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뇌의 선계에서 이원이 챙겨놓으라고 했던 진흙이었다.
진흙은 한제의 손짓에 따라 그 검은 공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윽고 이 작은 공은 응고되어갔다.
한제가 원신의 정기를 뱉어내자 작은 공에서 번득이던 검은 빛이 순간적으로 짙어졌고 점차 쪼그라들더니 그 형태를 바꿔가다가 마침내 팔각형의 나침반이 됐다.
“파멸 심금의 전승자는 자신만의 심금 나침반을 갖게 되지요. 축하합니다, 허 형!”
이원이 지친 두 눈에 기쁜 빛을 드러냈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을 담은 축하였다.
나침반은 한제의 손바닥으로 녹아들더니 미간으로 이동했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이원 앞에 이르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 형, 정말 감사합니다.”
이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허 형이 저와 우리 이가에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요. 한데 허 형은 앞으로 어쩌실 계획입니까?”
한제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며칠 전 파멸성에 도착하여 이원과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로부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마도자라는 별칭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다.
사실 한제는 이미 천강이 되기로 결심을 내린 상태였다. 청수가 약속한 두 개의 선술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중요한 것은 36명의 천강은 뇌선전과 상고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두 개의 수련자 가문에 소원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림성(東臨星) 향가에 꼭 말해야 할 소원이 있다.
“이 형은 선인이라는 칭호를 두고 벌어질 쟁탈전에 관심이 있습니까?”
이원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관심이야 있지만 제 수준으로는 불가하지요. 저는 음의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폐관수련을 할 생각입니다.”
이는 가문을 다시 중흥시키기 위한 결심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음의의 수준에 이를 생각이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 형의 자질이라면 음의의 수준으로 돌파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이어서 그는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뇌원결(雷元訣)을 기록했다.
“이 형, 이 옥패에 공법 하나를 기록해두었습니다. 신중하게 익힌다면 음의로 돌파할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원은 옥패의 내용을 살피고는 크게 감명받은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가문은 상고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가문이긴 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고서를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파멸 심금밖에 없었다.
사실상 일반적인 수련자 가문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뇌원술(雷元術)과 같은 뇌선전의 공법은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허 형,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따로 않겠습니다. 만약 제가 언젠가 음의의 수준으로 돌파하게 된다면 꼭 허 형을 찾아가겠습니다. 뇌의 선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께 우주 곳곳을 쏘다니는 것은 분명 즐겁지 않겠습니까?”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그날을 기다리겠소, 이 형. 그럼 안녕히!”
뇌선전에서는 곧 108명의 선인을 봉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동서남북 네 개 영역의 결투장에서는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될 터였다.
이번 봉선(封仙)은 나천성역이 열린 이래 처음 진행되는 것으로 새롭게 봉해질 선인들은 당시의 선군(仙君) 청수로부터 선술을 전수받고 원고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밀스러운 수련자 가문을 통해 승선지에 갈 자격을 얻게 된다고 했다.
★ ★ ★
나천성역 남쪽 영역의 3대 주성(主星) 중 하나인 지염성(地炎星). 이 수련성 밖의 반경 1천 리는 반짝이는 빛에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범위 밖은 수련자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이곳이 나천성역 남쪽 영역의 결투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빛으로 뒤덮인 범위 밖에는 거대한 푸른 돌들이 떠 있었는데 각각의 돌 위에는 한 명 이상의 수련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 푸른 돌들은 봉선 쟁탈전을 관람할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으로 현재 모여든 수련자만 해도 수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의 수준은 각기 달랐지만 그중 대부분은 수련의 1단계에 머무른 이들로 같은 가문 사람들을 응원할 겸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을 받을 겸 찾아온 것이었다.
그 돌들 안에는 붉은 돌도 약 4백여 개 섞여 있었다. 그 위에도 역시 수련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전의가 번득였다. 이들은 나천성역 남쪽 영역에서 쟁탈전에 참가하기 위해 와 있는 이들이었다.
이때, 1천 리 반경의 전장에서 두 수련자가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여러 신통술을 발휘하면서 둘은 대등한 형세를 이루었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관람자들은 물론, 바로 다음에 전투를 벌일 수련자들은 더더욱 그 전투에서 눈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전공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전가는 규모와 세력이 상당히 큰 가문이었고 전공열은 그 전가에서 가장 우수한 수련자 중 하나였다. 전가는 그에게 이번 남쪽 영역의 쟁탈전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 것을 요구했다.
“상위 10위라⋯⋯.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겠지.”
한데 주위를 살피던 전공열의 시선은 저 멀리 떨어진 한 붉은 돌에 멈추었다. 그 위에는 신공호가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도 전공열의 시선을 느낀 듯 두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고 둘은 살짝 웃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신공호는 시선을 거둔 뒤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약간 어두웠다.
요가에 쫓기게 된 주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문의 선조가 직접 나서서 가로막은 탓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선조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주인을 건드린 요가가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냉소했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요가의 추격에 허목은 번번이 반격했고 수많은 수련자들을 죽이며 마도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리고 결국 나천성역 북쪽 영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허목이라는 이름은 그 유명세를 더욱 널리 떨쳤다.
허나 이전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신공호는 어쩐지 씁쓸함이 차올랐다. 명민하고 눈치가 빠른 그는 조심스레 생각했다.
‘만약 주인님이…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 무렵, 전공열 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그도 신공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가에게 쫓기던 허목의 상황과 행적을 곰곰이 떠올리던 그는 점차 뭔가를 깨닫게 됐고 이내 복잡하고 씁쓸함을 느끼게 됐다.
‘허목⋯⋯ 하, 이 전공열이 다른 사람에게 속는 날이 올 줄이야. 그자의 수준을 내가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의 수준은 그저 그 정도였던 거야. 뇌의 선계 안에서도 운이 좋아 양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일 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의 수준을 숨겼던 것은 아니야! 시간이 좀 흘렀다 해도 양의의 수준에 불과하겠지. 내가 그자를 잘못 본 것이었어!’
전공열은 어쩐지 실망스런 마음이 솟구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는 푸른 돌 위에 가부좌를 튼 전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촌 오라버니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그가 또다시 그 선배에 대해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운은 뇌의 선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격렬하게 떨려왔다. 엄청난 힘이 끼쳐오던 그때, 만약 그 선배가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멀리 떨어진 붉은 돌 위에서는 당언풍이 음침한 눈으로 전공열과 신공호를 번갈아보다가 차게 코웃음을 쳤다.
전공열, 신공호, 당언풍. 이 세 사람은 나천성역 남쪽 영역에서 이름깨나 떨치는 수련자로 남역의 삼걸(三杰)이라 불리기도 했다.
구경꾼들 중에는 각 수련자 가문에서 온 수련자들 외에도 이번 쟁탈전을 심사할 이들도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은 뇌선전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중 두 명은 푸른 옷을 입고 냉랭한 얼굴로 전광이 어린 두 눈을 번득였다.
보라색 옷을 입은 나머지 한 사람은 노련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에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청의(靑衣)의 두 사자는 그 보라색 옷을 입은 이를 상당히 깍듯하게 대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련자 가문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쪽 영역의 각 수련자 가문에서 온 선조들은 하얀 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수는 스무 개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모두 명성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한데 그들 중 신공가의 선조와 전가의 열운자는 보이지 않았다.
1천 리 반경의 광막 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투는 거의 끝에 이르렀다. 갖가지 법술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고 두 수련자의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 전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둘 중 한 사람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피를 토하며 몸을 빠르게 뒤로 물렸다. 상대방이 자신을 추격해오자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를 추격하던 사람은 크게 웃으며 더 이상 상대를 뒤쫓지 않았다.
광막 안 푸른 옷을 입은 뇌선전의 사자 중 한 명이 걸어 나와 결투장을 한 번 훑어본 뒤 덤덤하게 말했다.
“이협, 승!”
내가 1등이다
한편, 그 무렵, 수십만 리 떨어진 곳의 허공에 한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쪽 영역에서의 쟁탈전은 지염성에서 벌어질 거라고 했지. 모든 참가자는 나천성역 남쪽 영역에서 지급한 자격 영패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영패가 없으면 참전할 수 없고 결투가 시작된 이상 반경 10만 리 범위는 봉쇄된다. 만약 늦으면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허나 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한제는 코웃음을 쳤고 그러더니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발밑에서 파문이 일었고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지염성으로부터 10만 리 떨어진 곳에는 1천 리 간격으로 수련자들이 둥글게 가부좌를 튼 채 봉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내에서 발산한 영력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고 변동이 생길 경우 봉쇄선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봉쇄선을 이룬 수련자 중 하나인 맹림은 지금 매우 불쾌했다. 지염성 맹가 사람으로서 이번 쟁탈전을 관람하고 싶었건만 가문에서는 그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더구나 가문의 선배 몇 명이 이 사실을 알고는 자신을 놀리듯 빙글빙글 웃었던 것에 더욱 화가 났다.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번 봉선 쟁탈전에는 남역의 삼걸도 온다던데… 그들의 결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큰 도움이 될 텐데 이게 뭐람!”
맹림의 수준은 아직 영변기 후기에 머문 채 오랫동안 문정기로 넘어가지고 못하고 있었다.
한데 한숨을 내쉬던 그가 뭔가를 느끼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1천 척쯤 떨어진 허공에서 파문이 이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온 것이다.
백의의 사내로 검은 머리칼이 마구 휘날렸고 두 눈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광채가 번득이는 자였다.
맹림은 그를 본 순간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귓가에서는 요란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듯했고 체내의 원신은 거의 무너질 뻔했으며, 영력은 흩어져 체내에서 벗어나려 했다.
백의의 사내, 한제는 유유히 맹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맹림은 멍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