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31
그 두개골 역시 얼음에 봉인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감기지 않은 두 눈에는 슬픔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죽은 지 수만 년은 흘러 더 이상 고신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심지어 미간에 여덟 개의 반점이 무너져 내린 흔적만 남은 상태인데도 그 눈빛만큼은 살아 있는 양 생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한제는 한참이나 말없이 고신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태 수련을 해오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겪어온 그는 고신이 비록 영원불멸의 존재는 아닐지언정 가장 강한 종족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신족의 멸종이 수련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강력한 뇌(雷)의 선계조차 허약해진 8성급 고신 하나를 상대로 온갖 고생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엄청난 대가를 들여야 했다. 참담한 승리였다.
한데 대체 어떤 존재가 있어서 8성급 고신이 반점을 파괴하면서까지 맞서게 만들었고 심지어 그의 머리까지 잘라버렸단 말인가? 여덟 개의 반점을 파괴하면서 낼 수 있는 힘이라면 비록 9성급 고신의 힘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세상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일 텐데 말이다.
한제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앞을 가로막은 얼음 조각에 손을 댄 후 원력을 가동했다.
원력은 그의 손을 따라 얼음 조각 안으로 흘러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얼음 조각은 화염의 빛으로 번득였다. 심지어 그 내부로도 화염이 퍼져나갔고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음 조각 안에 갇혀 있던 선인의 시체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한제는 그렇게 통로를 뚫어가면서 점차 그 거대한 고신의 머리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진정한 8성급 고신의 위압감이 훅 느껴졌다.
머지않아 한제는 고신의 잘린 목 부분에 다다랐다. 고신의 머리는 두꺼운 얼음에 갇혀 있었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목의 절단면은 매우 깔끔했다.
이로 미루어 저 고신의 목은 순식간에 잘렸음이 분명했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한제는 머리가 저릿해졌다. 대체 누가 이렇게 단번에 고신의 머리를 잘라낼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청림이 한 것인가?’
한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만약 청림이 한 것이 맞다면 그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강력했다는 뜻이다.
철검(鐵劍)
안색이 어두워진 한제는 조심스레 신식을 펼쳐 고신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자 이번에는 목의 절단면을 살폈다.
“헛!”
화들짝 놀란 한제는 곧장 고신의 머리를 뒤덮은 얼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절단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절단면의 가장자리에는 마주 미세한 결정의 부스러기들이 남아 있었다. 암적색의 그 부스러기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응고된 피로 착각하기 쉬웠다.
“이건⋯⋯?”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을 들어 그 얼음 조각에 댄 뒤 조심스럽게 원력을 발산했다. 손을 타고 흘러나간 원력에 얼음 조각에서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제는 화염의 힘을 조심스럽게 통제하며 얼음 조각을 녹여 고신의 목 절단면까지 틈을 내, 그 가장자리에서 결정의 부스러기를 손에 넣었다.
두 손가락 사이로 암적색 결정을 놓은 후 신식으로 신중하게 살핀 한제는 점차 작은 결정 안에 아무런 색도 형태도 없는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운은 결정의 부스러기 안에서 발산되고 있어 언제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다.
한제는 신식으로 그 무형의 기운을 감싼 후 탐색하려 했다. 허나 그의 신식이 무형의 기운으로 녹아든 순간, 그는 그 기운 안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제는 순간 이 세상에서 분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 세상이 어두워졌고 오직 그 무형의 기운에서 피어오른 위압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너무도 강력한 기운이었다. 단지 한 줄기였을 뿐인데도 심장이 덜컥할 만큼 강력한 기세에 한제는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했지만 억지로 참아내고는 눈을 번득이며 다시 한 번 그 결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제의 미간은 더욱 구겨져갔다.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련을 해온 그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기이한 기운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선기도 영기도 아니었고 원기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허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선기와 영기, 원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제로서는 알 수 없는 다른 기운도 섞여 있었다. 마치 여러 가지를 한데 모아놓은 것 같았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이 한 줄기 무형의 기운 안에 깃든 규칙이었다. 더구나 이 규칙은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았다.
한제가 천역주의 힘을 이용해 보았던 그 모든 규칙과 아직 보지 못한 규칙도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신식을 거둔 한제는 약간 창백한 얼굴로 손가락 사이에 쥔 결정을 응시했다. 이제 이 결정은 그저 일반적인 결정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한 번 폭발하면 막대한 붕괴를 일으킬 재앙의 씨앗처럼 느껴졌다.
‘고신의 목을 벤 것은 바로 이 힘이야. 이런 힘을 가진 것이 청림일 리는 없어!’
한제는 주작성에서 이모완을 구하기 위해 천도와 싸웠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하늘에서 나타난 천도의 사자는 반점이 봉인된 고신이었다. 당시 수준이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한제는 무척 놀라기만 했을 뿐 아무런 이해도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상황에는 놀랄 만한 비밀이 있었다.
‘대체 어떤 힘이 고신을 봉인하여 천도의 사자로 만들고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답은 곧장 튀어 나왔다.
“천도(天道)!”
한제는 손에 쥔 결정의 부스러기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을 본 순간 그것이 고신을 천도의 사자로 봉인한 힘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했다.
허나 천도는 모호하고 흐릿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두 눈을 감은 한제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끝없는 우주 속에서 8성급 고신이 분노한 듯 소리를 내지르던 그때, 갑자기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하늘에서 내리 떨어졌다. 8성급 고신은 그 힘에 저항하기 위해 여덟 개의 반점을 모두 터뜨렸지만 결국 그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그대로 머리가 잘려 버렸다.
그 후 고신의 머리를 차지한 선계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것을 이곳에 놓았고 고신의 머리에 남아 있던 힘은 세월에 씻기면서 부스러기가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 장면들이 사실인지 한제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두 눈을 번쩍 뜬 한제는 그 결정의 부스러기를 저물대에 넣었다.
얼음층에 갇힌 고신의 목 부분에는 아직 부스러기들이 남아 있었다.
한제는 조심스레 그 부스러기들을 꺼내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부스러기는 총 23개였다.
한제는 고신의 목 절단면을 다시 살핀 후 그곳을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 그의 눈빛이 변하더니 황급히 절단면 깊숙한 곳을 응시했다. 그 안에서 붉은빛이 번득이는 것을 어렴풋이 본 듯했기 때문이다.
허나 신식으로 살펴도 별다른 점은 없었다.
한제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원력으로 뒤덮은 손으로 얼음 조각을 건드렸다. 그러자 순간 화염이 솟구치더니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통로가 더 안으로 뻗어 나갔다. 통로는 머지않아 깊숙한 곳까지 이르렀다.
그 순간, 한제는 붉은 빛을 번득인 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자루 철검이었다. 철검은 수없이 많은 붉은 선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꿈틀거리면서 검을 단단히 옭아맸다.
평범하게 생긴 그 검을 본 순간, 한제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똑같은 검을 본 것만 같았으나, 그게 언제 어디에서였는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그 검을 옭아맨 붉은 선 안에서 끔찍한 위험을 느낀 것이다.
한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음층을 사이에 두고 신식으로 훑었을 때에는 검과 붉은 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지만 틈을 낸 지금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제는 조심스레 다시 한 번 신식을 펼쳤다.
허나 신식으로는 여전히 붉은 선도 철검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한제는 한층 경계심을 드높인 채 뒤로 물러났다.
철검을 뒤덮은 붉은 선이 너무도 기이해 쉽사리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그 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낯이 익은데⋯⋯.’
순간 뒤쪽으로 나아가던 한제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머릿속에서 한 줄기 번개가 번쩍 스쳐간 듯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명 주작묘에서 보았던 검과 똑같다! 녹슨 자국만 약간 다를 뿐.’
당시 탁삼의 사자가 그 검을 손에 넣고는 눈빛이 광기와 희열로 번들거리던 모습이 생생했다.
한제는 우뚝 멈추고는 갈등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얻은 서사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것과 그가 얻지 못한 기억의 일부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은 탁삼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니 탁삼은 알지라도 자신은 이 검의 내력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 검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가져가야 하나?’
망설이던 한제의 시선은 그 검을 칭칭 옭아맨 붉은 선에 닿았다. 끔찍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제는 저 붉은 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매우 위험한 존재라는 것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떠난다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저 검을 손에 넣으려 한다면 저 선들이 공격을 해오겠지.’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지만 저 철검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했다. 이에 한제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댔다.
이내 한제는 결단을 내렸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했다. 당장 떠난다면 안전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검을 얻을 기회란 평생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거와 달리 그가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된 데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한제는 깊은 구덩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빙하들이 빽빽하게 교차한 채 출구를 봉쇄하고 있어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구덩이의 깊이를 계산한 한제는 다시 눈을 돌려 철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두 눈에서 화염의 빛이 번득였다.
순간 규열기 후기 절정의 수준이 그의 온몸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고 미간에서는 고신의 반점이 나타나 급속도로 회전했다.
온몸에서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신의 힘이 사지로 녹아든 순간, 주먹을 불끈 쥔 한제는 온 세상의 입을 거머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두 눈에는 더 이상 망설임의 빛 따위는 없었다.
한제는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갔다. 체내의 원력이 회전하면서 오른손에 응집되더니 하늘을 뒤덮을 듯 엄청난 불바다가 확산되었다.
‘기다려라. 탁삼이 손에 넣은 것이라면 나 또한 손에 넣고야 말겠다.’
한제가 오른손으로 다른 결인을 그리자 불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뻗어나가 고신의 머리를 뒤덮었다. 순간 고신의 머리를 봉인하고 있던 얼음층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제가 고신의 목 쪽으로 만들어둔 통로를 통해 대량의 화염이 뚫고 들어가 철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순간, 철검을 뒤덮은 붉은 선들이 바르르 떨면서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고 수없이 많은 갈래로 갈라지더니 불바다를 향해 대량의 붉은 안개를 분출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동시에 불바다가 곧장 꺼지면서 뒤로 떠밀렸다.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곧장 입을 쩍 벌려 원신의 정기를 토해냈다.
그 순간, 불바다는 다시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증폭했다. 이에 고신의 머리를 봉인한 얼음층에는 대량의 균열이 일다가 엄청난 기세의 화염에 뒤덮여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