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09
단지 그뿐이라면 여연비도 어느 정도 한제의 수준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허나 한제 체내에는 한 줄기 본원이 있고 천역주를 통해 세 번째 단계를 살짝 엿보기도 했으며, 청상 덕분에 세 번째 단계를 직접 느껴보기까지 한 상태였다. 이에 그는 보통의 정열기 수준 수련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고 막라 대륙 전체에서도 그의 수준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제는 뜰 밖으로 나가 귀원종 안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그러는 중에 귀원종 제자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들은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빠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남원을 따라 산맥으로 올라간 그는 어떤 신통력도 발휘하지 않고 한 걸음씩 산봉우리로 향했다.
영혼
봉우리에 이르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빗방울을 흩날렸다. 하늘 끄트머리를 채운 새카만 구름과 그 안에서 번쩍이는 번개, 뒤이어 울리는 천둥까지 남김없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먼 곳의 광경을 바라보던 한제는 마음에 평화를 느꼈다.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낯선 세상에서, 그는 비의 냄새를 마음껏 즐겼다.
그때,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구냐?”
한제는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붉은 구름 같은 옷을 입은 그녀의 검은 머리는 뒤쪽으로 넘실댔다. 검은색과 붉은색 그리고 창백한 얼굴이 대비되면서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여인은 어딘지 외롭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초연한 빛까지 한제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저는 천우라 합니다.”
한제는 포권을 하며 덤덤하게 답했다.
낯선 이름에 붉은 옷의 여인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만약 눈앞의 상대가 일반인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산봉우리 아래로 쫓아냈을 터였다.
“천우?”
여인은 북쪽에서 데리고 온 서른한 명의 일반인 중 그런 이름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다만 저 사내가 지나치게 침착하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곳을 떠나라.”
여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 같은 수련자가 한낱 일반인과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덤덤할 수 있었다.
한제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곁을 스쳐 지나가더니 산길을 따라 이곳에서 떠나갔다.
여연비는 몸을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의 침착함이 신경 쓰였다. 귀원종의 모든 사람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잔뜩 긴장해 공손하게 굴었다. 세 명의 사형조차 그녀에게는 무척 공손했다. 한데 저 천우라는 사내는…
여인은 번득이는 눈으로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결국 눈앞의 그가 그저 일반인이라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작게 입을 열었다.
“잠깐! 혹시 내 말을 좀 들어줄 수 있겠느냐?”
여연비는 지체 높은 사람이라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었다. 상대방이 너무 공손하게 굴기도 했고 그녀의 지위상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반인이면서도 자신 앞에서 저토록 침착한 청년이라면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상대의 침착함은 마치 전염성이라도 있는 듯 그녀의 마음까지도 잔잔하게 만들었다. 마침 허심탄회한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그녀는 이 비 내리는 이른 아침, 그런 사내를 만난 것이다.
한제는 산봉우리에 서서 저 먼 하늘의 검은 구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를 실은 산바람이 휙 불어왔다. 주위에는 온통 바람과 빗소리뿐이었다.
“내 서른이 되던 해, 스승님께 제자로 거둬져 수련자의 길에 올랐다.”
여연비는 덤덤하게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에 녹아들었다가 바람과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문정기에 이를 무렵, 스승님은 종파에서 소유하고 있던 약재들을 쏟아붓고 먼 곳의 다른 종파에서 교환해 오기까지 하시면서 내게 먹일 만천단(瞞天丹)을 직접 만들어주셨다. 난 그 단약을 통해 문정기에 이르는 데 성공했지⋯⋯. 그해, 스승님은 날 데리고 안개 속으로 사냥을 나가셨다. 3년 만에 마침내 나는 스승님의 도움으로 눈이 여섯 개 달린 붉은 여우를 잡았고 그 녀석은 나와 영혼이 연결된 영수가 됐어.”
여연비는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녀는 한제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스승님은 돌아가셨으니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겠지⋯⋯.”
여연비는 몇 마디 더 중얼거렸고 한제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눈 깜짝할 사이 오후가 됐고 하늘에서 내리던 빗줄기는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그쳤다. 저 멀리 걸려 있던 검은 구름도 마침내 사라지면서 맑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것은 자도종 때문이다. 한데 스승님이 돌아가신 뒤 그곳의 소종주가 내게 옥패를 보내 부부의 연을 맺자고 하더구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 귀원종이 약해진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주종은 언제나 편파적이었으니 자도종에서 요청한다면 이를 허락하겠지.”
입술을 살짝 깨문 여연비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해갔다.
“우습게도 세 명의 사형은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묵인하고 있지. 나의 희생으로 귀원종이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노적과 혼인하면 귀원종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시야가 좁은 것이란 말이냐?”
여연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땅을 적셨다.
묵묵히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무지개가 뜨는 법이지. 허나, 우리 귀원종의 무지개는 어둡기만 하구나.”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여연비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내려왔다. 여연비도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늘 가장자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는 굳건한 의지와 살기가 피어올랐다.
뒤이어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한제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준 높은 수련자처럼 마음이 단단하구나. 부지런히 수련한다면 큰 성과를 거두게 되겠지. 하지만⋯⋯.”
한편, 산봉우리를 내려온 한제는 남원의 뜰로 들어갔다. 허윤은 아직도 호흡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한제의 두 눈이 밝게 번득였다. 그는 조옥의 기억을 통해 운행성역에 대해 파악한 상태였다.
‘방금 그 귀원종 장로의 말까지 들어보니 이곳 수련자들은 영수를 중심으로 수련하는 모양이군.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는 이곳의 우주는 영수들의 영역인 셈이야. 게다가 이곳의 단약은 매우 독특해!’
특히 그는 좀 전에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며 그녀가 문정기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단약에 관심이 생겼다.
“만천단이라⋯⋯.”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나는 주일이 선배가 준 문정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문정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원화에 타버려 재가 됐을 것이다. 수련자의 길을 따르다 처음으로 맞게 되는 삶과 죽음의 관문을 운해성역 수련자들은 단약을 통해 넘기는구나. 이곳의 단약 제련 수준이 상당하다는 증거겠지! 어쩌면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단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련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경지의 깨달음으로 단약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한데 운해성역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단약이 발달한 것인가?
살짝 구겨졌던 한제의 미간은 빠르게 풀어졌다.
‘설마⋯⋯ 경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단약도 있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한데 그의 표정이 순간 변했고 그의 시선은 허윤이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이때 허윤은 창백해진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양의에 이르려던 시도가 또 한 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더구나 이번 실패로 인해 원신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랫입술을 깨문 허윤은 결연한 눈빛으로 저물대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더니 꽉 움켜쥐어 부수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한 줄기 짙은 원력이 피어오르는 검은 단약이 나타났다. 기이한 혼의 힘이 담긴 기운이었다.
“입사이혼단⋯⋯.”
허윤은 이를 악물고는 그 단약을 입어 넣으려 했다. 순간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덤덤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정(定)!”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흐릿한 목소리는 귓가에 대고 외친 것 같기도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온 것 같기도 했지만 분명 심신에서 비롯된 소리였다.
그 짧은 한 마디에 허윤은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면서 얇은 선들이 되어 온몸을 속박하는 것만 같았고 육신과 원신은 물론 체내의 원력까지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 앞에 한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허윤의 손에 들려 있던 단약을 빼앗아 쥐더니 자세히 살폈다.
“특이한 단약이로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신식으로 그 단약을 한 번 훑어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수준으로는 신식으로 단약의 약재와 구조를 충분히 분석할 수 있었으나, 재료의 대부분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단약에서는 한 줄기 영혼의 파동이 느껴졌다.
“흥미로워!”
한제는 다시 그 단약을 살펴 자신의 느낌이 착각이 아님을 확인했다. 단약에는 분명 영혼의 파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한 파동은 아니었지만 매우 견고했다.
두 눈을 감은 한제는 이것이 한 알의 단약이 아니라 한 마리 흉맹한 마수의 정혼(精魂)임을 직감했다.
원숭이와 비슷한 이 마수는 매우 사나워 그의 손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허나 수많은 봉인들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눈을 번쩍 뜨자 눈앞의 허상들이 사라졌다.
한제는 다시 그 단약을 허윤의 손에 들려준 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오른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실들이 흩어져 사라졌고 이에 허운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움직임을 회복했다.
한데 그녀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여전히 굳건한 눈빛으로 단약을 입에 넣었다. 한제는 곁에서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았는데 허윤은 누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약을 삼킨 순간 허윤의 얼굴은 피처럼 붉어지기 시작했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으며, 옷은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체내에서 한 덩이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또렷하게 느꼈다.
이 화염은 그녀의 원신을 감싸고 있었고 이내 허윤의 심신에는 금색 눈을 가진 검은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거대한 원숭이는 전보다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으로 뒤덮인 허윤의 심신에서 포효를 내지르다가 곧장 그녀의 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윤의 심신 역시 화염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원신은 일전의 부상으로 인해 더욱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고 원숭이와 뒤얽힌 채 심신 안에서 싸웠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동안 검은 원숭이는 포효를 꽥꽥 내질렀다. 허윤의 원신을 잡아 뜯고 육신을 찢어낸 뒤 이 타오르는 화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
허윤의 원신은 함께 화염에 불타버리겠다는 듯, 어떻게든 제련하고야 말겠다는 듯 검은 원숭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검은 원숭이는 강력해 제련되는 속도보다 허윤의 원신이 불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에 허윤의 원신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입사이혼단을 삼키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수준을 올려 스승님께 최대한 힘이 되어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삼키지 않았을 터였다. 허나 그녀는 스승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다.
검은 원숭이는 절반 정도 제련된 상태에서도 허윤의 원신을 잡아 뜯으려 발버둥을 쳤다.
그때, 한제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 단약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기에 허윤이 실패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좋아, 네게 선물을 하나 주지!”
한제는 피식 웃으며 검지로 허윤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그 손짓에 한제의 신식은 곧장 그녀의 심신으로 스며들었다.
서쪽에서 온 보라색 빛
한편, 심신 안에서 계속해서 밀리고 있던 허윤의 원신이 막 절망에 빠져들려는 순간, 갑자기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의 인영이 그녀의 나타났다. 허나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살필 수도 없었다. 그저 하얀 머리가 나부끼는 것만 볼 수 있을 뿐.
한데 그 순간, 허윤의 원신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으로 바르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