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66
66. 21세기 로빈 후드 (20) >
***
두개골 안에 폭탄을 터뜨리자 뱀을 닮은 창천의 몸은 축 쳐졌다. 중력에 이끌려 그대로 추락하려는 것을 날아온 젠킨슨이 마법으로 낚아챘다.
창천은 죽었다.
공중에 부유한 시신에 매달린 채 민준은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성공했다!’
오늘도, 훌륭하게 일을 해 냈다.
몸 가득히 성취감이 차오르는 순간.
=민준?=
누군가 낯선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는 대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으므로.
=민준?=
하지만 머릿속의 울림이 한 번 더 전달된 순간.
“······!”
수형자는 먼 옛 기억에 잠겼던 의식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피로 범벅이 된 그림자를 쓸어낸다. 일렁이던 어둠이 사라지고 그의 몸이 드러났다.
술에 진탕 취했다가 깨어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블랙아웃은 없었다. 옛 기억에 잠식되었던 사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과 몸에 차올랐던 감각이 지금도 선명했다. 용의 뇌를 뚫던 짜릿한 순간까지.
과거의 편린과 현재의 이성이 만나 흐트러진다.
이쯤 되니 민준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 붙잡히기 전에 대체 뭔 짓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거지?’
자신이 기묘할 정도로 드래곤 생태에 빠삭하다는 건 안다. 떨어진 비늘 한 장만 봐도 다음 탈피 시기를 맞출 정도로 말이다. 개체 수가 적은 편인 파이톤 형(形) 드래곤의 해부도까지 외우는 것도 희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 이유가 옛날에 용을 도축해서 잡아먹었기 때문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민준은 전 차원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엘더 드래곤조차 괴담으로 취급하는 전설 속 괴물을 떠올렸다.
‘식룡족食龍族?’
기억에 취한 사이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배경 지식도 지금 살펴보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고룡의 피와 살에 가격을 매겨서 파는 시장이라고? 역사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그런 일은···.’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역사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문헌으로 남겨지지 않은 고대에는?
=민준!=
세번째의 부름에 민준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젠킨슨이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레드 드래곤은 다양한 말을 머릿속에서 만들었다가 다시 지워버렸다.
그와 힘을 합하여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용을 ‘잡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이건 처형이라기 보다는··· 마치···.’
그 후에 떠올린 단어는 애써 뇌리에서 떨쳐낸다. 서로 연관 짓기가 불쾌해지는 것은 그 또한 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 친구가 이런 표정 짓는 것도 처음 보는군.’
또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드러난 민준의 얼굴은··· 매우 황홀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제서야 천직을 찾은 사람처럼.
죽기 싫어서, 마지 못해서 일을 하던 수형자 얼굴에서 찾기 힘들었던 생동감이었다.
=괜찮은가?=
계속 말을 걸자 흐릿했던 민준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도 사라졌다.
그와 인연을 맺은 몇백 년을 통틀어 가장 생기 넘치고 행복해 보였던 얼굴이 평소의 무덤덤한 그것으로 돌아왔다.
=자네가 그런 표정 짓는 것은 처음 보았네.=
“음?”
민준이 묻는다.
“무슨 말이지?”
=······아닐세.=
드래곤이 답을 피하자 수형자는 평소와 같은 딱딱한 일 이야기로 돌아왔다. 창천을 턱으로 가리키며.
“결정타는 네가 날린 것으로 하자고.”
젠킨슨은 손을 뻗어 창천의 머리를 완전히 부숴버리는 것으로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콰직!
이 용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다른 드래곤들이 알 필요는 없다. 이것은 민준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예가 널리 퍼져 좋을 것은 없기에.
민준은 고룡을 보조할 능력자 정도로만 알려져야 한다. 수형자가 다른 고룡의 견제까지 받기 시작하면 이 세계에서 활동하기에 불편이 따르므로 민준 역시 묻어 두는 편을 원했다.
“아, 그리고.”
민준과 연관된 젠킨슨의 레버리지는 이제 심각한 상태다. 말 그대로 과다부채자. 설상가상으로 이번 일 때문에 빚은 더 늘어났다.
그래서 민준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창천의 재산에 대한 것이었다.
후계자 없이 죽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분배가 될 것이지만 민준이 지금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물론 따로 있었다.
“창천이 도난당한 백만 달란트 말이야, 그 행방은 계속 묘연한 것으로 묻어 놓아도 되겠지? 공식적으로는.”
젠킨슨이 의아한 듯 묻는다.
=어차피 그 유령이 흡수했으니 못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잖나?=
“그거, 회수할 방법을 찾은 것 같거든?”
=?!=
달란트를 영혼에서 다시 분리할 방법.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민준 역시 알 수 없었다. 어떤 복합마법진의 시운전을 관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의 요구는 간단했다. 하은성과 결합한 달란트를 떼어 낼 수 있으니, 그렇게 한 다음 위원회에 보고하지 않고 자기가 꿀꺽하겠다는 거다.
리스크가 따르는 행동이었지만 고룡은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하신 채권자님의 요구였으니까.
“나머지는 여기서 이야기할 건 아니고, 일단 창천의 레어로···.”
그들이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안 돼··· 안 돼!=
창천의 시신에서 광기서린 정신파가 흘러나온다. 민준이 눈매를 찌푸렸다.
“이럴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했지만···.”
=?=
영체감응력이 없는 젠킨슨은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스으으!
머리가 깨진 채 밧줄처럼 늘어진 창천 몸에서 영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어서 깨끗하게 성불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창천 역시 꽤나 끔찍한 죽음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더 고통스럽게, 잔인하게 죽을수록 망령이 될 확률은 증가한다.
=류호! 류호!=
하은성처럼 자아를 완전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상념만 남은 불완전한 영혼.
“아니, 오히려 잘 됐나?”
레드 스타 조직원 망령을 추궁할 때처럼, 저 망령을 통해 카바이트와의 연결고리를 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굳힌 민준은 그녀를 사령술로 제어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드래곤은 망령이 되어도 인간보다 우월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안 되겠군. 퇴마진이든 뭐든 어디에 가둬 놓아야···.”
하지만 그 사이 망령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왔고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헀다.
=류호!=
속박에서 벗어난 망령은 지상을 향해 날아간다.
고도가 너무 높아서 주변에는 그녀를 잡아오도록 보낼 망령도 없었다. 여기까지 올라와서 죽는 사람은 드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어차피 많이 불러 모아도 창천 하나를 못 당할 수 있어. 퇴마진을 설치하는 게 최고야.’
상황을 말해주자 젠킨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렇군! 잡아서 심문하면 되겠어.=
질량이 없는 창천의 망령은 비행기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 사라졌지만 그 목적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텔레포트 해서 창천의 레어로 가자고.”
***
하은성은 자신의 생각이 이번에도 너무 얕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는 용의 껍질을 쓴 그의 협박에 못 이겨 퇴마진을 해체하려고 시도했지만 곧 수석 연구원인 자신도 모르는 프로텍트가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창천이 직접 손을 쓴 것이었다.
“이건··· 제가 못 풉니다!”
그러자 유령은 드래곤의 육신을 움직여서 쿵! 쿵! 벽을 깨기 위해 두들겼다. 머리로 안 되면 몸으로라도 깨부수려는 것이었다.
쿵! 쿵··· 콰당!
그러다가 헛발질을 해서 다시 한번 넘어졌다. 하은성은 바닥을 뒹굴다가 투덜거리며 일어난다.
=아씨, 뭐야!=
“어? 어?!”
뒤에서 연구원이 당황한 듯이 외쳤다.
“결계가!”
=?!=
그제서야 하은성은 자신이 넘어진 이유를 알았다. 류호의 망령을 가둔 결계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제서야 왜?=
연구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아무래도··· 결계를 직접 친 술자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뭐라고요?!=
믿을 수 없었다.
창천이 죽었다?
그 요원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솔직히 하은성은 그가 승리할 확률을 높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직접 류호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창천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은성은 허탈감을 느낀다.
=뭐야. 헛수고를 한 거잖아?=
자신이 굳이 용의 몸을 빼앗아서 뒤뚱거리는 촌극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화르르!
=창천! 창천! 용서해줘···. 제발!=
뚫린 퇴마진 너머로 망령이 미친듯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어디론가 날아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 망령을 내가 굳이 소멸시킬 이유가···.’
그는 고민한다.
‘아니,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하지 않나? 정말로 죽었는지.’
그런 생각을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사망 증명을 위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그들 대화에 언급된 당사자가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류호!=
의도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가장 확실한 방식의 증명이었다.
=?!=
하은성은 오늘 두 번째로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이른 새벽에는 인간 여자의 몸으로, 지금은 체고 3미터 파충류의 몸으로 느끼는 달갑지 않은 감각.
갑자기 거대한 망령이 퇴마진이 사라진 레어 벽을 뚫고 나타난 것이다.
“창천?!”
엘프 연구원의 입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은성은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진짜로 죽었구나!’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들었다.
‘그 요원 님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정말 인간이 고룡을 이겼다!
이렇게 되니 하은성은 일단 하던 일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계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창천의 망령을 관찰했다.
방금 죽은 귀신의 모습은 끔찍했다. 죽기 직전 상태를 재현한 영체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흔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살이 파이고, 터지고, 잘리고, 갈리고, 타고···. 창천을 향했던 악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이라고 할지 아님 그 반대일지 애매했지만, 용의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두 뺨에 눈물처럼 뇌를 흘리며 영체는 시각이 아닌 영적인 감각으로 류호와 마주했다.
=류호! 류호!=
훨씬 어린 나이에, 좀 더 오래 전에 죽은 망령이 부름에 답했다.
=창천!=
예상과 달리 류호는 도망가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져도 자신의 몸을 덮은 업화가 사라지지 않는 걸 아는 듯이.
그리고 창천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이성조차 없이 영혼에 남겨진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 그 광경을 본 하은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거··· 엄청나게 뜨거울 텐데!’
접촉한 달란트가 없으니 서로를 상처 입히거나 소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영체도 정신적인 고통은 느낄 수 있다.
창천은 뱀이 또아리를 틀 듯이 타오르는 류호를 영체로 감쌌다. 그리고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류호, 류호! =
많은 이들의 짐작과 달리 사천성의 재앙이 발발한 당시 그곳에 류호를 동반한 것은 창천의 의지가 아니었다.
류호는 강력한 고룡과 결혼했지만 부부 간 격의 차이 때문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반반한 얼굴과 연한 몸, 젊음을 무기로 늙은 용을 꼬신 것이 류호의 일생 최대 업적이라는 비아냥은 그를 괴롭게 했다.
결혼생활이 이어질수록 그런 마음은 용 특유의 나이에 대한 자격지심과 결합되었고 그는 성급해졌다.
고룡들의 전쟁에 따라가겠다는 요구는 하루 빨리 강한 용이 되고 싶다는 소원 때문이었다.
창천이 말렸지만 류호는 고집을 부렸고 결국 위험한 전쟁터에 함께 향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룡 수십이 모여 싸우는 장관은 앞으로 몇백 년 동안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 싸움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부가 된다. 서로의 약점을 어떻게 노리는지,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지, 마력의 활용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창천은 남편의 생각이 못마땅했지만 자신의 능력이면 그 하나쯤은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류호도, 창천도, 사천의 고룡을 응징하러 모인 드래곤들도 모두 오판을 했다.
그 싸움은 어린 용을 데려와도 되는 상식적인 형태로 치러지지 않았다.
사천을 영지로 삼았던 고룡은 중국 인민의 해방을 위해 다른 고룡들을 모조리 말살시킬 계획으로 함정을 판 것이었다.
핵탄두 저장고가 불타오르고 그것이 마법과 융합되어 대지를 덮은 순간 술자는 물론 휘말린 고룡 몇 명도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기 목숨 하나 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장면을 보지 못한 외국의 드래곤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과 달리 창천이 손을 쓴다고 해서 남편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류호는 당연히 살아남지 못했다.
=창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뜨거워. 너무 뜨거워. 제발, 살려줘!=
고룡은 죽은 남편이 온 몸으로 뿜는 지독한 열기를 그대로 받으며 고통을 감수한다.
그렇다고 해서 류호의 괴로움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용은 또아리를 틀어 그의 영혼을 감싸고 갑옷이 된 것처럼 보호했다.
하은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기 남편 영혼은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 영혼은 가차 없이 갈아버릴 생각을 했던 거지?=
그렇게 두 귀신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하은성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여기 있었군.”
=엇?!=
당황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민준과 레드 드래곤이 있었다.
용이 복잡한 시선으로 부부 귀신을 바라보는 사이 민준이 다가왔다.
“뭐야, 너 그 몸에는 왜 들어 간거냐?”
=아··· 그게.=
하은성은 우물쭈물하며 자신의 계획을 에둘러서 말했다. 민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움직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 놓을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민준이 말했다.
“설마 류호, 저 애꿎은 용 영혼을 소멸시키려는 생각은 아니었지?”
=······.=
그것 역시 드래고닉 코드의 위반이라는 것을 하은성이 알 리가 없었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그들이 와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의 영혼까지 소멸시키려면 달란트 소모가 어마어마했겠지. 빨리 와서 다행이다.’
민준은 좀 더 이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 저··· 그럼 이 몸 밖으로 나올게요.=
그때 민준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하은성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너 지금 그대로 나오면 그 용··· 죽어버릴 거야.”
이 말에 거짓은 없었다.
=네?!=
“내가 흑마법사인 건 알지? 지금 그 몸의 생명력이 훤히 보이거든.”
=네···.=
“창천이 그 드래곤을 납치한 다음 미리 소금을 많이 쳐 둔 모양이야.”
=그게 무슨?=
“제대로 요리하기 전에 숨을 확 죽여 놨다고. 류호가 빼앗기 쉽도록 영육의 연결고리를 최대한 약하게 만들어놨어. 생명유지장치 안에 있으면 죽지는 않겠지만, 주인의 혼이 몸을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그 영혼 지금 깨어났나?”
하은성은 내면을 관조하다가 말했다.
=아뇨, 응답이 없어요.=
그가 빙의를 한 이전 케이스와는 달랐다. 한 몸에 혼이 두 개 존재한다는 감각은 있지만, 이번에는 주인의 영혼이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 용, 사실 지구 출신도 아니거든. 외계에서 납치당한 용이야. 간신히 구조했는데 그대로 죽어버리면 저기 도덕군자 양반이 엄청나게 화를 낼 거거든?”
이 말에도 거짓은 없었다.
“그러니 잠깐만 나오지 말고 그 몸에 좀 머물러 있어라. 그 드래곤 영혼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하은성은 쭈뼛거리며 물었다.
=어, 얼마나 오래요?=
민준은 하은성이 부서버린 유리관과 주변의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설비를 조금만 개조해서 달란트를 분리하는 용도로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유령이 용의 몸으로 움직이는 사이, 자빠져서 부딪히고 꼬리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타격한 탓에 거의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하은성에게 말했다.
“한 달만 기다려 봐.”
그는 마법진을 다시 구축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말했다.
=그, 그럼 그 사이에 저는···.=
민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걱정 마. 넌 내가 잠시 보호하고 있지. 저 레드 드래곤이 마련한 안전 가옥보다 훨씬 철저한 보안을 자랑할 테니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하은성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다 무시하고 영체로 빠져나와서 도망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서웠던 것이다.
상대는··· 고룡마저 죽여버린 요원이었다.
물론 함께 온 레드 드래곤의 활약이 컸을 거라는 합리적 추측이 가능했지만, 민준이 이 모든 것을 주도해 온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납득하고 약속을 하는 하은성을 바라보며 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란트를 안전하게 회수할 때까지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겠지. 이왕이면··· 통제가 쉽도록 ‘물질’의 틀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 화폐를 추출한 다음엔 하은성도 저 드래곤도 분리돼서 자기 갈 길을 가면 돼.’
이미 텔레파시로 젠킨슨과 협의가 끝난 상태다. 납치당한 용의 귀환을 충분히 회복된 뒤 시점으로 미루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으니까.
비록 그 의도는 가난한 가족을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백만 달란트를 훔치고 만 도둑은 한동안 민준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난품의 주인이 죽은 이 상황에서 민준은 그것을 가로챌 생각이다.
굳이 대자면 그럴싸한 핑계도 있었다. 결국 창천이 살아있는 동안 의뢰비를 회수하지 못했으니까.
받을 돈은 받아야 한다.
지금 하은성의 영혼에 남아있는 달란트가 얼마나 될지 민준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번 사용해서 소모되긴 했겠지만 애초에 원금이 백만 달란트다. 아무리 많이 까였어도 95만달란트 이상은 남아있을 터.
회수하지 못한 의뢰비로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