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07
107
“뭐야?”
“따지면 호텔 측 과실 아닌가요? 청소를 어떻게 하기에 사람이 넘어질 정도로 미끄러운 거예요!”
졸지에 불똥이 튀어 버린 호텔 직원들은 진정하시라며 두 사람을 달래기에 바빴고, 김인철과 함께 있던 일행들도 계속되는 그의 짜증을 받아 주기가 버거워 사태를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음?”
갑자기 생긴 사고로 주변이 시끄러운 가운데, 오윤태 과장은 하킴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깨닫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가 넘어지기 전에 그 옆을 하킴이 지나간 걸 떠올렸다.
“설마…….”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한 손에 커피까지 들었으니 슬쩍 밀기만 해도 충분히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터였다.
‘아니, 왜?’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오윤태 과장은 문득 출국 전에 자신이 혁권한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고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눈치챘다.
“자네 어딜 보고 있는 건가?”
이동철 부장의 말에 오윤태 과장은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대답했다.
“다른 손님들 눈이 신경 쓰여서…… 죄송합니다.”
“아…….”
이해한다는 듯 이동철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하킴은 마치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유유히 로비에서 사라졌다.
이걸로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노트북이 꺼지자 어느새 옆에 와서 서 있던 자말이 낚아채듯 집어 들고는 원래대로 여행용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띠딕.
카드키로 객실 문을 잠그면서 엘리베이터 위에 붙어 있는 표시판을 확인하자 바로 아래층까지 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비상구를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 비상구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띵.
드르륵.
문이 열리며 엘리베이터에서 김인철 일행이 내렸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객실로 들어갔다.
비상구 벽에 기댄 혁권과 자말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면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바깥 동정을 살폈다.
“자칫하면 마주칠 뻔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하마터면 오랜 시간 계획을 세우고 작업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핸드폰을 꺼내 초조해하고 있을 하킴한테 철수하라는 문자를 보낸 그는 벽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이만 가자고.”
“예.”
만약을 대비해서 비상구를 통해 한 층을 걸어 내려간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돌아갔다.
한편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인철은 예정대로 다음 날 일행들과 함께 호텔에서 제공한 리무진을 타고 은행으로 갔다.
UBS은행(스위스 연방은행)은 취리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20층짜리 현대식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리무진에서 내려 실내로 들어가자 상담 창구가 길게 늘어서 있는 국내 은행과 달리, 대리석이 깔린 바닥에 고급 장식품들이 군데군데 걸린 것이 흡사 은행이 아니라 호텔 로비에 온 것 같았다.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앞으로 다가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일행 가운데 제일 직위가 낮은 오윤태 과장이 대신 영어로 대답했다.
“요르단 씨와 약속이 되어 있는데, 안내를 해 주시겠습니까?”
고위 임원인 요르단의 이름이 나오자 은행원은 일행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더욱 친절해진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십니까. 혹시 한국에서 오신…….”
“맞습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절 따라오시죠.”
은행원은 일행을 한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김인철이 이동철을 보며 슬쩍 한국말로 불만을 드러냈다.
“내가 오는 줄 알았으면 미리 직원을 내보냈어야 되는 거 아냐. 이거 고객 대우가 형편없군.”
“큰일을 앞두고 괜히 흥분하셔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흥.”
김인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붉은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자 짙은 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반듯하게 넘긴 중년의 백인 사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김인철 일행을 반겼다.
“미스터 김,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요. 요르단입니다.”
“반갑군요.”
언제 불평을 했냐는 듯 김인철도 가식적이게 웃으며 상대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다른 일행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요르단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소개해 준 뒤 VIP용 회의실로 안내했다.
양측이 합쳐 모두 여덟 명이나 됐지만 VIP용 회의실은 자리가 넉넉하게 남을 만큼 넓었다.
사각형의 기다란 마호가니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측이 마주 앉자 요르단은 능숙하게 가벼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푼 다음 적당한 시점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일 그룹과는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이 이렇게 돼서 많이 아쉽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측에서 기존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면 이런 귀찮은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역시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며 김인철이 말하자 요르단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그 부분은 저희도 고객 분들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은행의 전통을 계속 이어 가고 싶었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반듯한 자세로 앉은 요르단은 계속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먼저 계좌 내역부터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기본적인 확인 절차이니 계좌와 보안 번호를 입력해 주시겠습니까.”
요르단의 이야기에 얀센이라고 소개를 한 VIP 담당 직원이 태블릿 PC를 김인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김인철은 손가락으로 번호판을 눌러 액정 화면에 뜬 빈 공간을 채워 넣었다.
“확인됐습니다.”
태블릿 PC를 돌려받은 얀센의 말에 요르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둔 얇은 서류철을 하나 꺼내 김인철에게 줬다.
“내역서입니다. 맞는지 살펴보시죠.”
서류철을 열어 내역서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김인철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들었다.
“맞군요.”
“아직 계좌 공개가 시행되기 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큰 액수가 한꺼번에 움직이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해서 저희 쪽에서 임의로 돈을 나눠 두세 번 정도 세탁을 한 후에 버진 아일랜드 계좌로 보내 드릴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기껏 비자금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괜히 꼬리를 잡혀 시끄러워지는 걸 김인철도 원하지 않았기에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요르단은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이 서류에 서명을 해 주시면 바로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가 새로 내민 서류를 보며 김인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금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어렵게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자칫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증거를 남겨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요르단이 말을 받았다.
“당연한 염려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밀계좌라고 해도 돈이 입출금된 것에 대한 법적 증빙 자료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문건은 별도로 관리돼 한국 정부나 다른 어떤 기관에서도 확인해 볼 수 없도록 처리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다 이번에 미국 정부의 압박을 못 이겨 고객 명단을 공개하기로 한 것처럼 나중에 뒤통수를 맞으면 어쩌라는 겁니까?”
김인철이 의심을 지우지 못하자 요르단 왼편에 앉아 있던 은행 측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끼어들었다.
“미스터 김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이 서류를 요구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저희가 받아들이기로 한 제도에는 한 가지 중요한 조항이 있습니다. 바로 고객 명단과 여치 금액을 공개하되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한적이라면?”
“현재 거래 중인 고객에 한해서만 공개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계좌를 폐쇄한 건에 관해서는 자료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요르단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서류는 계좌가 폐쇄되는 즉시 저희 은행이 아니라 계열사로 옮기게 됩니다. 거긴 정보 공개 의무가 없는 곳이지요. 만약 고객의 동의 없이 함부로 관련 서류를 공개하는 건 이곳 스위스에서 중범죄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얄팍한 속임수였지만 김인철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한국 국세청에서 냄새를 맡고 UBS은행에 자료를 요구해도 공개 의무 사항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잡아떼면 끝이었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강제 이행을 한다고 해도 UBS은행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자료가 넘어간 곳은 스위스 국내법상 정보 공개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면 그대로 벽에 부딪치는 거였다.
태일 그룹에 세금을 물리자고 타국과의 마찰을 벌이면서 법률을 변경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한 김인철은 고개를 돌려 이동철 부장을 봤다.
“이 부장 생각은 어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숙고를 한 김인철은 결국 요르단이 서류와 함께 내민 만년필을 집어 들어 서명을 했다.
서류를 확인한 요르단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걸로 필요한 절차는 다 끝났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약간의 세탁을 거친 후에 오후 1시까지 돈이 모두 지정하신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났으면 좋겠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온 김인철은 즉시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냐?
묵직한 김종원 회장의 물음에 김인철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시까지 돈을 모두 이체 받기로 했습니다.”
-은행 계좌는?
“작업이 끝나면 바로 폐쇄될 겁니다.”
-이번에 파이프로 쓴 페이퍼 컴퍼니도 확실히 정리해서 우리 쪽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놔야 된다. 알겠지?
“염려 마십시오.”
-들어오면 평창동으로 와서 직접 보고를 하도록 해라.
“예.”
통화를 끝낸 김인철은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마무리 지으면 태일물산 대표이사직으로 올라가는 것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물산을 손에 쥐고 그다음은 그룹 전체를 이어받는 거야.”
그렇게 야심을 키우고 있을 때 노크를 하며 이동철 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님, UBS에서 이체를 끝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고개를 든 김인철은 즉시 탁자 위에 올려둔 노트북을 조작해 인터넷 뱅킹을 열고 비밀번호와 보안키를 쳤다.
그 순간 아래층에 머물고 있던 혁권의 노트북에도 똑같은 화면이 떴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던 혁권은 눈을 반짝이면서 몸을 바로 세웠다.
이체된 금액이 점점 올라가는 걸 보며 그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꽤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많이도 빼돌려 놨군.”
계좌 잔액은 어느새 8억 달러가 넘어서고 있었다.
때를 보며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고 마카오에서 빼낸 걸 가지고 페이퍼 컴퍼니 안에 보관되어 있던 돈을 털었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