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08
108
노트북을 좀비PC로 만들어서 훤히 다 엿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김인철은 들어온 비자금을 다시 8개로 쪼개 다른 비밀 계좌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김인철은 각기 다른 계좌로 이체를 시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리 심어 둔 해킹 프로그램에 의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혁권이 만들어 둔 차명 계좌였다.
빠르게 늘어나는 숫자를 보며 그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이체를 다 끝낸 김인철은 만족한 얼굴로 탁자 한쪽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박상빈 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입금 확인했습니까?”
그러자 박상빈 실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아무것도 안 들어왔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히 보냈는데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요!”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진 김인철이 핸드폰을 고쳐 쥐며 다급히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입금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체를 한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니까!”
오랜 세월 아버지인 김종원 회장을 보필한 최측근이었기에 평소 존대를 하며 대우했지만, 흥분한 김인철은 그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확인했지만 계좌에 남아 있는 잔액은 없었고 이체도 정확히 된 걸로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딱딱하게 굳은 김종원 회장의 목소리에 김인철은 심장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분명 돈을 보냈습니다.”
-그럼 내 눈이 잘못됐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인철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끝을 흐리자 화가 난 김종원 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뭔가 잘못됐습니다.”
-당연하지. 무려 8억 달러야! 만약 제대로 되돌려 놓지 못한다면 그때는 네 손에 죽을 줄 알아!
“아, 아버지!”
-쓸모없는 놈 같으니.
마치 버러지를 보듯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아버지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마치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차가운 신호음만 뱉어 내는 핸드폰을 내던지듯이 손에서 떨구곤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버린 그는 이럴 순 없다며 정신 나간 사람마냥 연거푸 중얼거렸다.
“안 돼. 대체 어떻게…….”
이제 드디어 아버지께 인정받을 수 있다며 밝은 희망에 차 있던 것이 불과 몇 분 전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락처럼 시커먼 절망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김인철이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혁권은 중간에서 가로챈 돈을 추적이 어렵도록 여러 은행 계좌로 돌렸다.
채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1천만 달러 단위로 쪼개진 돈뭉치들이 마치 세계여행을 하듯 이곳저곳으로 정신없이 옮겨졌다.
일일이 손으로 직접 했다면 어려운 작업이었을 테지만 미리 프로그램을 해 놓은 대로 컴퓨터가 알아서 했기에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이체를 반복하면서 돌아다니던 돈뭉치들은 최종적으로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공국에 있는 LGT은행 계좌로 다시 모였다.
계좌 이체가 모두 끝났다는 메시지가 뜨자 애써 티는 내지 않았지만 굳어 있던 혁권의 얼굴이 펴졌다.
“다 끝났군.”
맞은편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자말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 번에 이런 큰돈을 벌다니 밀수보다 이게 훨씬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은 그는 노트북을 덮으면서 일어났다.
“이제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 놈이 우릴 잡으려고 날뛸 테니까 그 전에 여길 빠져나가자고. 준비는 다 됐지?”
그러자 자말이 머리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럼 가 볼까.”
어차피 짐이 많지 않았기에 일행은 곧장 객실을 나와 체크아웃을 하고는 차량을 타고 취리히를 떠났다.
A3 고속도로를 달린 차량은 국경을 넘어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넘어갔다.
혁권은 중간에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걸로 유명한 취리히 호수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렇게 1시간이 약간 넘어 혁권이 탄 차량은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수도인 바두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별다른 검문소도 없이 그저 고속도로 한쪽에 세워 놓은 표지판 하나로 국경을 표시할 만큼 스위스와 지리나 정치, 문화적으로 가까운 리히텐슈타인은 얼핏 보면 같은 나라인 걸로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흡사했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한적한 지방 중소도시 같은 모습의 바두츠 시내로 들어선 차량은 곧장 LGT은행 본사로 향했다.
하얀 벽돌 기둥들이 인상적인 LGT은행 본사는 직사각형의 3층 건물로 약간은 투박한 모습이었다.
입구에 적힌 간판만 아니라면 여기가 은행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수수하고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은 프라이빗뱅킹PB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금융 회사로 세계적인 탈세와 범죄 자금의 은닉, 세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악의 소굴 같은 곳이었다.
하킴을 차에 남겨 두고 혁권은 자말과 함께 은행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은행이라기보다 무슨 회사 사무실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프라이빗뱅킹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답지 않게 내부 인테리어도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흔한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아 왠지 삭막한 분위기마저 드는 로비를 가로질러 안내 데스크로 가자 역시 무표정한 얼굴의 여직원이 두 사람을 보며 독일식 발음이 섞인 영어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금을 인출하러 왔습니다.”
“계좌 번호를 알고 계십니까?”
혁권이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자 여직원이 안내 데스크 한쪽에 설치된 키패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번호를 입력해 주시겠습니까?”
한쪽 팔을 뻗은 혁권이 8자리로 된 번호를 입력하자 계좌의 존재 유무를 확인한 여직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곧 담당자가 내려올 겁니다. 저쪽에 앉으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로비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곧 줄무늬 정장을 차려입은 금발 사내가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PB 업무를 맡고 있는 하인리히라고 합니다.”
보통 키에 약간 마른 체격을 가진 하인리히는 첫인상이 조금 깐깐해 보였다.
상대가 내민 명함을 받은 혁권이 따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하인리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LGT은행을 이용하는 고객 상당수가 보안이 유지되는 비밀 계좌를 사용할 정도로 신분이 노출되는 걸 꺼리는 만큼 이런 일에 익숙했다.
“위층 상담실로 가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자말과 함께 앞서 가는 하인리히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안내된 상담실은 로비처럼 별도의 장식품 같은 건 없이 딱 필요한 집기들만 놓여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밀실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거였다.
이 역시 신분 노출을 꺼리는 고객을 위한 것 같았다.
그나마 가장 비싸 보이는 원목 책상을 가운데 두고 혁권은 하인리히와 마주 앉았다.
문 옆 의자에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 앉아 있는 자말을 힐끗 쳐다본 하인리히는 한쪽 손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희 LGT은행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상담을 하기 전에 먼저 보안키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겠습니까.”
혁권은 책상 한쪽에 놓인 터치패드로 문자와 숫자가 조합된 보안키와 6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하인리히는 보안 절차가 모두 통과되자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어떤 업무를 도와 드릴까요?”
그러자 혁권이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계좌를 폐쇄하고 싶소.”
“개설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신데…… 혹시 저희 은행 서비스에 불편한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오.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오.”
깊게 이야기하기 싶다는 듯 그가 딱 끊어서 말하자 하인리히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최근에 꽤 큰 액수가 들어왔는데 지급은 어떤 식으로 해 드릴까요?”
하인리히의 물음에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이야기를 했다.
“8억 달러는 미국 국채로 나머지는 모두 현금으로 주시오.”
“US달러와 유로 어느 쪽으로 해 드릴까요?”
“절반씩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에게 양해를 구한 하인리히는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하인리히가 직접 타 준 커피를 마시며 얼마쯤 기다렸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젊은 여직원이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와 함께 철제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철제 카트에는 은색 알루미늄 가방이 2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말씀하신 걸 가지고 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인리히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여직원이 내민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러자 사내가 알루미늄 가방을 집어 책상에 올려놨다.
“수고했어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여직원과 사내는 빈 카트를 끌고 나가며 문을 닫았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은 하인리히는 가방을 혁권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확인해 보시죠.”
양옆에 달린 잠금장치를 풀고 가방을 열자 미국 국채 다발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10년 만기 100만 달러짜리 국채로 백장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다 합쳐서 여덟 묶음이니 정확히 8억 달러 어치였다.
적은 액수도 아니고 사전에 미리 이야기를 해 두지도 않았는데 이만한 양의 국채를 바로 가져오는 것에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바로 이어서 다음 가방을 열자 이번에는 지폐 뭉치가 나왔다.
띠지는 물론이고 비닐도 뜯지 않은 빳빳한 신권들로 최고액권인 500유로와 100달러 뭉치들이 가방 안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부피는 크지 않았지만 족히 2천만 달러는 가뿐히 넘어갔다.
“수수료 30만 달러를 제하고 현금으로 정확히 2,350만 달러입니다.”
그러면서 내역서를 건넸다.
완전 바가지에 가까운 수수료였지만 거래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 않았다.
혁권은 별말 없이 내역서를 반으로 접어 안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앞에 있는 하인리히를 보며 입을 열었다.
“뒷마무리도 깔끔하게 끝날 거라 믿소이다.”
“물론입니다. 계좌가 폐쇄되는 것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두 폐기하는 것이 저희 은행의 원칙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혁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 있던 하인리히도 따라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십시오.”
“알겠소.”
가볍게 답한 혁권이 돌아섬과 동시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말이 다가와 책상에 놓인 알루미늄 가방을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 로비까지 내려가는 동안 하인리히가 빈틈없이 붙어 배웅했다.
두 사람이 정문으로 나오는 것을 본 하킴이 물 흐르는 듯 매끄러운 동작으로 차를 가져다 댔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하인리히를 뒤로하고 혁권은 자말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 출발하자며 손가락으로 천장을 툭툭 두드려 신호했다.
부우웅.
그렇게 혁권은 태일 그룹, 아니 김종원 회장이 스위스 은행에 몰래 숨겨 둔 비자금을 몽땅 손아귀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