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32
132
그러나 무기는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 도구인 데다 무엇보다 내전을 더욱 격화시킬 수도 있었다.
리비아 사람들이 내전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해도 선뜻 나서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이런 걱정까지 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것들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리비아 상황에서 그 혼자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괜찮다고는 했지만 최악의 경우 미스라타가 함락되고 이슬람형제단이 세력을 더욱 크게 키운다면 혁권한테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장 사업이 위축될 것이고 지금까지 악연으로 꼬여 온 걸 생각하면 자칫 신변에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그에게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혁권은 다시 고개를 들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배럴당 10달러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죠.”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알할부시는 혁권의 말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건 너무하지 않소?”
“현금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직접 원유를 받아가 팔아야 되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경비도 고려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10달러는 너무 낮아.”
알할부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타협안을 제시했다.
“19달러는 어떤가?”
“그럼 공평하게 15달러로 하시죠. 더 이상은 저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기 싸움을 벌이다 결국 알할부시가 한발 양보했다.
“그렇게 합시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목록을 다시 볼까요?”
그러면서 혁권은 손을 뻗어 방금 전 밀어 두었던 쪽지를 집어 들었다.
다시 항구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어 있었다.
화물선은 출항 준비를 모두 끝내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현문 사다리로 걸어가며 스와이단이 입을 열었다.
“잘 선택한 거요.”
혁권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글쎄, 잘한 건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
“솔직히 배럴당 15달러면 거저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쉬워 보이면 그쪽이 원유를 가져가서 한번 팔아 보시든가.”
틱틱거리는 말투에 스와이단도 멋쩍은 듯 스윽 시선을 회피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화제로 오래 끌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스와이단이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사령관님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할 말을 다 할 줄은 몰랐소.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애들 가운데서도 그런 담력을 가진 놈이 드물거든. 전부터 꽤 대범한 하다 생각하곤 있었는데 새삼스레 실감했소이다.”
나름 칭찬하고자 하는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혁권에게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건 마치 벽보고 혼자 지껄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라, 스와이단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함께 일을 하게 됐으니 잘해 봅시다.”
때마침 현문 사다리 앞에 도착한 혁권은 스와이단과 시선을 맞추며 짧게 말하곤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준비가 다 되면 연락하겠소.”
“알았소.”
갑판 위로 올라가자 자말이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늦으셔서 걱정했습니다.”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그는 자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왜 보자고 한 거랍니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말이 묻자 그는 몸을 돌려 차로 돌아가는 스와이단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뗐다.
“나보고 무기를 구해 달라더군.”
“예?”
놀랐는지 자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액수가 꽤 커.”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아 꺼낸 혁권은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치익.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자말이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혁권은 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받아들였어.”
“그러셨군요.”
의외로 담담한 반응에 혁권은 자말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게 다야?”
“보스께서 안 하시더라도 결국 다른 사람이 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무기 거래는 다른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많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자신보다 더 이성적인 자말의 태도에 그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꺼림칙함을 말끔히 떨어 낼 수 있었다.
“그렇지.”
“그런데 무기를 구하려면 별도의 루트를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압둘라흐만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위험 부담이 큰 사업인 만큼 모든 거래가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져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압둘라흐만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 조금 꺼림칙하군요.”
“나도 알아.”
현문 사다리를 올리고 홋줄을 모두 푼 화물선은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선착장을 떠났다.
멀리 수평선 위로 붉은 석양이 지는 걸 보며 혁권은 깊은 생각에 잠겼고 하얀 단배 연기가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선창을 깨끗하게 비운 화물선은 별탈없이 지중해를 가로질러 피레에프스 항구에 도착했다.
뿌우우웅.
어디선가 들리는 긴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혁권이 부하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양복 차림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사내 두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혁권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자말을 비롯한 부하들도 바짝 긴장한 채 오른손으로 언제든지 무기를 꺼내 들 준비를 했다.
사내들은 몇 발자국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김혁권 씨 되시지요.”
사내 중 한 명이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자 혁권은 더욱 얼굴을 굳히며 상대를 바라봤다.
“저희랑 잠깐 같이 가시죠.”
정중하게 말했지만 태도는 강압적이었다.
그러자 뒤편에 서 있던 자말이 사내를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당신들이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야!”
하지만 사내는 자말을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혁권만 쳐다봤다.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조용히 가시지요.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이 자식들이…….”
“가만히 있어.”
혁권이 시선을 부딪치며 작게 고개를 내젖자 자말은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눈은 사내들한테서 떼지 않았다.
“자말과 하킴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여기 있어.”
“예.”
부하들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돌린 혁권은 당당하게 말했다.
“갑시다.”
사내들이 혁권을 데려간 곳은 선착장 한쪽에 세워진 벤이었다.
감춰야 될 것이 많은지 온통 짙은 검은색으로 선팅이 되어 있는 차창과 그 아래의 은색 문손잡이를 잡은 사내 한 명이 옆문을 열어 주며 턱짓을 했다.
“타시죠.”
재킷을 탁 털어 주름을 편 혁권은 사내가 이끄는 대로 벤에 올라탔다.
안쪽 좌석에는 이미 30대 후반쯤 보이는 금발의 백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차 안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얼굴 각도로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상대가 한쪽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샌더슨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혁권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손을 맞잡았다.
“내 이름은 벌써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저희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죽 시트에 등을 붙인 채 가만히 있자 샌더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막 돌아와서 피곤할 테니 용건만 간단히 끝내지요.”
그리고는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할부시한테 받은 무기 구입 목록을 잠시 볼 수 있을까요?”
“……!”
혁권이 정색하며 쳐다보자 샌더슨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스터 김이 알할부시를 만날 때부터 우리는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날 감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떤 이유가 있든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건 불쾌한 일이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혁권이 언성을 높이자 샌더슨이 진정하라는 듯 두 손바닥을 펴서 흔들었다.
“워, 워.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정확히 말하면 미스터 김이 아니라 알할부시가 목표였죠. 솔직히 우리도 민병대가 당신에게 이번 일을 맡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급작스러운 만남을 주선하게 된 거고요.”
“하…….”
낮게 신음을 흘린 혁권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요?”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이 누군지 정체도 모르는데?”
물론 처음부터 신분을 밝혔어도 순순히 모든 걸 다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비밀스러운 거래 내용을 아무렇게나 밝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이끌려 가는 것만은 사양하겠다는 혁권의 뜻에 샌더슨이 상체를 꼿꼿이 세워 바로 했다.
“CIA.”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확인을 하게 되니 가슴 한편이 묵직하니 무거워졌다.
“놀라지 않는 표정이군요.”
혁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샌더슨이 대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물론 목록의 내용을 빼내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최대한 그쪽을 배려하고 있다는 건 알아 둬야 할 겁니다.”
‘얼마든지 다른 쉬운 길도 있으니까요.’
샌더슨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킨 뒷말은 혁권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혁권은 이내 안주머니에서 알할부시한테 받은 무기 목록을 건넸다.
종이를 받아서 펴 본 샌더슨은 스윽 내용을 훑어보곤 다시 돌려줬다.
“대충 예상한 대로군요.”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샌더슨이 계속 말했다.
“무기를 구입할 곳은 있습니까?”
“그런 것까지 밝혀야 되오?”
CIA라고 밝혔는데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에 샌더슨은 흥미롭다는 듯이 혁권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딱히 거래할 곳이 없다면 우리가 필요한 무기를 구해 주도록 하지요. 물론 시세에 맞게 돈을 받아야 되겠지만 그게 여러모로 편할 겁니다.”
뜻밖의 제안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CIA에서 무기를 팔겠다는 거요?”
그러자 샌더슨이 한쪽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CIA가 아니라 루카스라는 무기상한테서 구입하는 겁니다.”
그게 그거였다.
샌더슨의 말대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넙죽 받아들이기에는 어쩐지 껄끄러웠다.
“이러는 이유가 뭐요?”
“우리한테 이득이 되니까요.”
“민병대에 무기를 파는 것이 말이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혁권이 추궁하듯 묻자 상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직접 군대를 파병할 수는 없지만, 골칫거리인 IS가 리비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제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됐다.
미국이 트리폴리 정부를 지원해 주는 것처럼 CIA도 미스라타 민병대를 비롯한 리비아 내 온건 무장 세력들의 힘을 키워서, 어느새 중동을 넘어 북아프리카로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고 있는 IS를 견제하려는 거였다.
“그럼 차라리 그쪽에서 직접 나서서 도와주지 그러시오.”
그러자 샌더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일이 편해지기는 하지만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으니까요.”
반미 감정이 강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CIA가 개입한 사실이 알려지면 IS 세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CIA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혁권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샌더슨이 말했다.
“우리와 협조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줄 수도 있습니다. 결코 미스터 박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거라 봅니다만.”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능수능란한 화법으로 말을 이었다.
“가령 민병대에서 넘겨받게 될 원유를 정상적인 것으로 깨끗하게 세탁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혁권은 솔깃한 얼굴로 상대를 봤다.
“정말 그래 줄 수 있소?”
그러자 샌더슨은 옆 좌석에 놔둔 서류 봉투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요?”
“직접 보시죠.”
봉투를 건네받아 안에 든 서류를 확인한 혁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나이지리아에서 원유 50만 배럴을 구입했다는 확인서입니다. NNPCNigerian National Petroleum Corporation(나이지리아 국영석유회사)의 공식 직인까지 찍혀 있으니 증빙서류로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샌더슨의 말대로다.
이것만 있으면 무기거래 대금으로 넘겨받을 원유를 시세보다 싸게 팔지 않아도 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면 혁권은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이미 깊이 관여해서 중간에 혼자 발을 빼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그는 고민 끝에 머리를 끄덕이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혁권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샌더슨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잘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