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46
146
그러자 언제 왔는지 친구인 조현태가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다가왔다.
짝짝짝.
“이야, 못해도 250 야드는 나오겠는데.”
“늦었잖아.”
드라이버를 지팡이처럼 세운 채 김인철이 인상을 쓰자 조현태가 미안하다는 듯 한쪽 팔을 살짝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노는 꼴이 보기 싫은지 요즘 우리 꼰대가 이것저것 떠넘기는 일이 많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물을 먹고 밀려난 자신과 달리 착실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김인철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날 약 올리는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아니라고는 하지만 기분이 상한 김인철은 들고 있던 채를 골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짜증을 냈다.
“젠장!”
김인철은 뒤편 의자로 가서 엉덩이를 붙이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너네 꼰대는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냐?”
빈자리에 앉으면서 조현태가 묻자 김인철이 얼굴을 구겼다.
“씨팔.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그러게 눈치껏 잘 좀 하지.”
“뭐야!”
발끈하는 김인철을 보며 조현태가 혀를 찼다.
“넌 그게 문제야. 지난번 마카오에서도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성질대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돈을 다 꼬라박은 거 아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조현태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자 김인철은 잔뜩 열이 올랐다.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짜증이 났지만 당장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될 입장이었기에 김인철은 애써 화를 누그러뜨렸다.
“됐고. 돈은 준비됐어?”
그러자 조현태가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바로 지우면서 말했다.
“그렇긴 한데 이번 일 확실한 거겠지?”
“내가 다 설명을 해 줬잖아. 이건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쉽다니까.”
“회사 공금을 빼낸 거라 잘못되면 절대 안 돼.”
“딱 한 달만 돌려서 쓰고 두 배로 만들어 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한쪽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김인철이 장담하자 두 배라는 말에 현혹된 조현태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널 믿어 보지.”
“잘 생각했어.”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김인철은 눈을 반짝이며 반색했다.
“그럼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할 거야?”
“이미 기초 작업은 다 끝났어. 네 투자금이 들어오면 본격적으로 주가를 띄우기 시작할 거야.”
“개미들한테 던져 줄 미끼가 뭐라고 했지?”
조현태의 물음에 씨익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김인철이 말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야.”
“이거 그림이 바로 그려지는데.”
“두고 봐. 공시가 나가면 그날부터 사탕을 보고 덤벼드는 개미 떼처럼 잔뜩 몰려들 거야.”
“그런데 워낙 비슷한 작전들이 많아서 이것만 가지고는 약발이 크게 먹히지 않을 텐데.”
“그래서 약을 몇 개 더 준비해 놨지.”
“그게 뭔데?”
앞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면서 조현태가 궁금해하자 김인철은 등을 기대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상승세가 약해질 때쯤에 외국 투자회사를 등장시키는 거지.”
“호오.”
“엄청난 매장량에 외국 투자회사가 거액을 투자한다고 하면 의심 따윈 싹 다 사라져 버리고 말걸.”
“큭큭큭. 그렇지.”
“이런 식으로 몇 번 약을 쳐서 골수까지 뽑아 먹은 다음에…….”
김인철이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
마치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힘이 불끈 들어간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뻥 하고 폭탄을 터트려 버리는 거지.”
그는 입으로 효과음을 내면서 손바닥을 크게 쫙 벌렸다.
그러곤 킬킬 웃는데 그 모습이 잔혹한 장난을 즐기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가학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나리오가 아주 그럴듯한데.”
탐욕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현태가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시자 김인철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주머니에 돈을 두둑하게 채워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알았어.”
얽히는 두 담배 연기 사이로 욕망에 일그러진 눈동자 한 쌍이 서로 맞부딪쳤다.
마치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닮은 그 모습에 두 사람은 은밀한 미소를 나누며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다음 날 아침.
혁권이 일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으음.”
커튼을 쳐 놨음에도 불구하고 찌를 듯이 파고드는 햇빛 덕분에 눈이 부셨다.
신음성을 흘리면서 더듬더듬 손을 뻗어 간밤에 저가 발로 밀어 찬 이불을 다시 끌어 올린 혁권은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쓴 채 다시 잠을 청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꾸르르륵.
빈 속인 것을 알리듯 배에서 치는 천둥소리에 혁권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는데도 괜히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혁권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구수한 밥 냄새가 그를 반겼다.
“일어났니? 얼른 씻고 밥 먹어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비척이며 걸어오는 그를 보곤 어린애도 아니고 꼴이 그게 뭐니, 하고 작게 타박했다.
“네에. 그런데 지금 몇 시예요?”
“10시가 다 되어간다.”
그 말에 혁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상시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는 그인데, 아무리 제 집이라고 해도 이렇게 늦게까지 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쉰다고 쉬어도 계속 피곤하더라니 그동안 쌓였던 여독이 한 번에 몰아닥치려고 그랬나 싶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기왕 거울 앞에 선 김에 제멋대로 삐친 머리칼도 물로 좀 정리하고 나왔더니 어머니가 또다시 한 소리를 던졌다.
“이제야 좀 사람 몰골 같구나.”
“어허, 이거 왜 이러세요. 저 정도면 꽤 미남 아닙니까.”
혁권이 턱에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곤 능청을 떨었다.
흐릿했던 잠기운이 가시니 이젠 먼저 장난을 칠 정도로 정신이 돌아온 덕분이었다.
“어머, 얘가. 계속 바깥으로 돌더니 넉살만 늘어 가지곤.”
“하하. 이 정도 자신감도 없으면 사람 상대하는 일 못해먹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떠들다보니 혁권의 눈에 평상시와 다른 풍경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오늘 쉬는 날이세요?”
“어.”
혁권이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부터 계속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던 아버지였다.
취미랄 것이 딱히 없는 아버지가 옛날부터 습관처럼 해 오던 것이 바로 아침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무슨 볼 것이 그리 많은지,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정독하느라 어린 혁권이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묻는 말에도 건성으로 대꾸하기 일쑤라 실망도 많이 했더랬다.
물론 지금은 그게 먹고사느라 바빴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낙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리운, 옛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혁권은 조용히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아버지가 신문 마지막 장을 덮는 것과 동시에 혁권이 슬그머니 일어나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아버지, 잠시 보여 드릴 게 있는데요.”
“음? 뭐냐.”
“그게, 여기선 좀 그렇고. 밑에까지 내려가야 돼서요.”
“먼저 말해 주면 안 되는 거냐?”
“에이, 그냥 한번 속는 셈 치고 따라와 주세요.”
혁권이 간절하게 보채자 아버지가 무슨 일이냐는 듯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들은 말이 없었기에 나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쯧. 귀찮게 굴기는.”
결국 혁권의 고집에 못 이긴 아버지가 툴툴거리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자기도 궁금하다면서 덩달아 따라나온 어머니까지 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니 해사한 햇빛이 세 사람을 반겼다.
“날씨 하나는 끝장나게 좋구먼.”
“그렇죠? 이불 잘 마르겠네.”
“이번 주말에 비가 온다니까 그 전에 빨래할 거 있으면 해 놔. 그 뭐냐, 검은색 셔츠 있지? 항상 일할 때 입고 다니는 거. 그거랑 흰색이랑 두 개는 여벌로 더 있어야 돼.”
“알았어요. 어휴, 남정네가 잔소리가 심해서 원.”
“알기는 개뿔이 뭘 알아. 어제 출근하기 전에 서랍장 열어 보니까 입을 만한 게 하나도 없더만.”
“검은색이랑 흰색은 항상 따로 빨아야 한단 말이에요. 매일 손빨래할 수도 없고 좀 모아 뒀다 빤다는데.”
“세탁기는 뒀다 어따 써!”
“당신은 세제 아까운 줄도 몰라요?”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사이좋더니 어느새 또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에이, 두 분 다 왜 이러세요?”
“크흠. 네 엄마가 먼저 시작했다.”
“이 양반이 또 누구 탓을 하고 난리야.”
항상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투는 게 두 분 나름의 애정 표현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러다간 끝이 안 나겠다 싶은 혁권이 얼른 큰 소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 저것 좀 보세요.”
그 말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버지였다.
“허어, 제네시스 아니냐. 저런 차가 어쩐 일로 이 동네에 다 있담.”
“뭔데요. 비싼 거예요?”
“비싸다마다. 저거 하나 살 돈으로 내 차 두 대는 살 수 있을걸.”
“어머나.”
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제야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거렸다.
“누구 집 차일까?”
“유지비가 얼만데 이런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감히 저런 차를 살 수 있겠어? 잠깐 들렀다 가는 친척이거나 손님 거겠지.”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도 아버지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차를 아래위로 살피기 바빴다.
운전을 업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괜히 흠집이라도 날까 차마 손은 대지 못하면서도 눈빛만은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게 빛났다.
“아버지.”
혁권은 긴 말하지 않고 대뜸 준비해 뒀던 자동차 키를 내밀었다.
“음?”
“아버지 거예요.”
키와 승용차 사이를 방황하던 아버지의 시선이 미세한 기쁨으로 떨렸다.
설마, 하면서도 부풀어 오르는 기대는 숨길 수가 없는 듯 얼굴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너, 혹시…….”
“예.”
혁권은 아버지의 손에 억지로 자동차 키를 쥐여 주고는 자기가 직접 팔을 이끌며 스마트키 버튼을 눌렀다.
삐삑,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깜빡이면서 잠금장치가 풀린 차 문을 열자 진한 가죽시트 냄새가 훅 끼쳤다.
“세상에! 혁권아, 이거 네가 산 거니?”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차가 너무 오래됐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시트도 아래로 많이 꺼져서 딱딱하던데.”
어디 그뿐이랴.
술 취한 손님이 토해 놓고 간 오물 탓에 정체 모를 얼룩이 번져 있는 것은 예사요, 조수석 문은 아귀가 안 맞아서 힘을 세게 줘야 겨우 열릴 정도였다.
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세차를 하고, 내부 청소나 관리도 열심히 한 덕분에 겨우 영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지가 되는 것이지, 사실은 중고로 팔아도 아무도 안 받아 줄 정도로 제 수명을 다한 차였다.
“손님이 불편해하면 장사도 안 될 거 아니에요. 택시기사는 차가 영업 도구인데 이제 한 번쯤 바꿀 때도 됐죠.”
그러니까 이건 전혀 사치가 아니다,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을 열심히 어필했다.
다행히 어머니에겐 효과가 있었는지 단순히 기뻐하는 기색이었으나, 아버지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듯 살짝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게 돈이 얼만데. 필요하면 중고로 하나 사면 되지, 뭐하러 이런 비싼 차를 끌고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