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68
168
재차 재촉하자 혁권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보아하니 어물쩍 빠져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른 기관도 아니고 기무사가 자신한테 무슨 용건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좋은 일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 연행을 거부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부모님을 비롯해서 걸리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한 혁권은 결국 일단 기무사 요원들을 따라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하킴, 짐을 챙겨.”
“예.”
그의 말에 잔뜩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던 하킴이 몸에서 힘을 빼고는 한쪽에 놔둔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집어 들었다.
“갑시다.”
포위하듯 양옆에 선 기무사 요원들은 두 사람을 청사 한쪽에 위치한 보안 구역 사무실로 데려갔다.
회색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풍기는 삭막한 방이었다.
다리가 가느다란 얇은 철제 책상과 의자 두 개 외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는, 마치 경찰서에서 용의자를 데려다 놓고 심문하는 곳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혁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당연히 그 뒤를 따르려던 하킴은 기무사 요원들에 의해 제지당하자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당신은 반대쪽이야.”
그리고 거칠게 팔을 잡아끌자 하킴은 난폭하게 반항하는 대신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두 발에 힘을 단단히 주고 버텼다.
무언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 기무사 요원들의 얼굴에 난색이 스쳤다.
완력을 쓰면 어떻게든 되긴 하겠지만 새로 국적을 받아 그리스 국민이 된 하킴이었기에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하킴.”
혁권의 부름에 하킴이 새까만 눈동자를 들었다.
“시키는 대로 해.”
일단 지금은 얌전히 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킴의 몸에서 힘이 싹 풀렸다.
덕분에 달라붙어 있던 기무사 요원 둘이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킴이 뭐 하냐는 듯 흥 코웃음을 치고 얼른 안내하라는 것처럼 턱을 까딱였다.
저런 건방진 새끼, 하고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났으나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어깨만 으쓱하고 마니, 요원들도 어이가 없는 듯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까 신분증을 보여 줬던 홍창진 대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만들 하고 어서 데려가.”
“예.”
요원들이 얼굴을 굳히며 대답하자 홍창진 대위는 그를 보곤 조사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들어가시오.”
안으로 들어간 혁권은 실내를 스윽 한번 살펴보고는 철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문을 닫은 홍창진 대위는, 긴장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너무나도 태연한 혁권의 모습에 내심 고개를 내저으면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기무사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수사관인 홍창진 대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있는 혁권을 잠시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그리스에 있는 솔 루시두스라는 무역 회사가 김혁권 씨 소유가 맞지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자 혁권을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도 죄가 됩니까?”
퉁명스러운 태도에 홍창진 대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면서 말했다.
“물론 그건 죄가 되지 않지만 군용 물자를 당국의 허락 없이 몰래 해외로 빼돌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소.”
“……!”
이번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혁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홍창진 대위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서류철을 하나 꺼내 책상에 내려놨다.
“보름 전에 이런저런 물품들과 함께 군용 구급 키트 6천 개를 불법으로 반출한 거 인정하십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구급 키트를 매입해 그리스로 가져간 건 맞지만 군용품이 아니라 민수용입니다.”
“민수용이라서 괜찮다?”
“합법적으로 통관 검사까지 마친 물건인데 문제가 된다니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묻는 족족 맞받아치는 대꾸에 기분이 상할 법 한데도 홍찬진 대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마치 자기가 우위에 있는 듯한 묘한 여유까지 지닌 것에 혁권은 일말의 불안한 공기를 민감하게 감지했다.
아직 내보이지 않은 수가 있다.
그렇게 직감했을 무렵, 홍찬진 대위가 기다렸다는 듯 책상에 서류철을 쫙 펼쳤다.
그러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여기 있는 서류를 보면 엄연히 방위사업청에서 관리하는 군수품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의심이 되면 직접 확인해 봐도 됩니다.”
서류철을 집어 들어 살펴본 혁권은 이내 얼굴을 구기며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서류에는 정말로 그가 구매한 구급 세트가 군수품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믿기지 않는 얼굴로 재차 서류를 확인하던 혁권은 작성 날짜가 작년 12월로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곤 고개를 들었다.
“이건 작년에 만들어진 문서가 아니오!”
“그래서요.”
“납품이 지연돼서 계속 재고로 남아 있던 물량을 지난달에 용도 변경을 해서 매입했으니, 당연히 이 서류에는 엉뚱하게 기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오.”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지만 상대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가 가진 서류는 이것뿐이고 거기에 맞춰 조사를 진행할 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홍찬진 대위의 물음에 혁권이 발끈하여 대답했다.
“난 절대 인정 못 합니다!”
탁, 하고 서류철을 내리치듯 던지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상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혁권을 보며 말했다.
“그럼 법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 참고로 정식 조사에 들어가면 거래를 중개한 유기백 씨도 처벌 대상이 될 겁니다.”
혁권은 눈을 부릅뜨며 상대를 노려봤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사실이 회사에 알려진다면 그의 부탁을 받아 도와준 것뿐인 유기백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최악의 경우 해고를 당할 수도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고심할 때 품속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연거푸 올리는 벨 소리에 흘긋 눈길을 주니 홍찬진 대위가 받아 보라는 듯 거만하게 턱짓했다.
“여보세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박, 나 샌더슨이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반갑지 않은 전화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통화를 하기 곤란하니까 나중에 다시 연락합시다.”
-혹시 기무사 요원들한테 조사를 받고 있지 않소?
“……!”
전화를 끊으려던 혁권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앞에 앉아 있는 홍찬진 대위를 쳐다보면서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설마 이거 당신이 꾸민 짓이오!”
-그럴 리가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기무사 요원의 행동에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차였다.
-원한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소.
“거기에는 당연히 조건이 붙을 테고 말이오.”
바짝 날이 선 혁권의 말에 샌더슨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나씩 주고받아야 공평하지 않겠소.
그는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이딴 식으로 함정을 파놓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소만.”
-그만큼 미스터 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주시오. 자, 어떻게 하겠소? 참고로 기무사에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면 그때는 나도 손을 쓰기가 조금 곤란하니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거요.
“으음.”
인상을 찡그린 채 혁권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대로 샌더슨한테 발목이 잡혀 끌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부리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물론 기무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군사정권 시절이 아니었기에 재판으로 간다면 충분히 억울함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잃어야 하는 것이 컸다.
당장 친구인 유기백이 기무사 조사를 받으면서 회사에서 곤란을 겪어야 될 테고, 부모님한테도 걱정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다 감수하더라도 문제는 샌더슨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CIA가 거기서 포기할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 몰랐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를 조정하기 위해 더욱더 구석으로 몰아 갈 가능성이 있었다.
CIA라면 이번처럼 없는 죄도 만들어서 상대를 압박할 능력과 힘이 있었다.
애초에 이런 자들과 엮이는 것이 아니었다고 자책했지만 후회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한참 고심을 거듭한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리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소.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하하하! 진작 그렇게 했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대신 또다시 내 주변 사람들을 가지고 수작을 부린다면 그때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뜻을 같이한다면 나도 무리수를 둘 생각이 없소.
원하는 걸 얻은 샌더슨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그리스에서 만나 나눕시다.
얼마쯤 있자 이번에는 홍찬진 대위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예.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짧게 통화를 끝낸 홍찬진 대위는 살짝 인상을 쓴 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 참. 더러워서.”
하얀 담배 연기와 함께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홍찬진 대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딘지 모르지만 백이 아주 좋은 것 같소.”
“글쎄, 백이 아니라 족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거요.”
정보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홍찬진 대위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앞에 놓인 서류철을 덮었다.
“하긴, 뭐 나야 위에서 까라는 대로 한 거지만 처음부터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했지. 보아하니 그쪽도 골치 아픈 쪽하고 엮인 것 같은데 웬만하면 빨리 정리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요.”
“나도 그러고 싶소.”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은 홍찬진 대위는 서류철을 집어 들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 일은 이걸로 종결처리 됐으니 가 봐도 좋소.”
조사실을 나간 혁권은 마찬가지로 풀려난 하킴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떨어져 있는 내내 그를 걱정했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하킴의 물음에 그는 굳이 사실대로 다 이야기를 해 줄 필요가 없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오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정말이십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금방 풀려났잖아.”
“…….”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굳이 파고들려 하진 않았다.
가만히 보기만 할 뿐 하킴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혁권은 속으로 안도한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런, 시간이 많이 지체됐군. 그래도 지금 가서 다시 수속을 밟으면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탈 순 있을 거야.”
“예.”
하킴이 짐 가방을 들고 앞장서자 혁권은 그 등을 바라보며 쓴 입맛을 감췄다.
일은 해결했다손 쳐도, 결국 샌더슨의 손바닥 위에서 놀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