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10
210
얼마 뒤 조사실을 나오자 먼저 풀려난 알아바디와 백성균이 복도에 서 있다가 그를 보곤 머리를 숙였다.
“보스.”
“고생들 많았어.”
“아닙니다.”
밤새 조사를 받느라 다들 얼굴이 조금 초췌해지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테러범을 잡아 줬는데 상은 주지 못할망정 죄인처럼 가둬 두다니 정말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애초에 자신들을 노린 테러였다는 걸 못 들었는지 백성균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독일 경찰들을 욕했다.
“늦게라도 풀려났으니 됐어.”
혁권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곤 말을 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건 이미 글렀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 짐부터 찾아야겠군.”
비행기 표는 그다지 아깝지 않았지만 일정이 꼬이고 테러에 연관돼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에 그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호텔로 돌아가면 바로 다음 비행기 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직항편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가급적 빨리 떠날 수 있는 걸로 해.”
“알겠습니다.”
24시간 안에 떠나라는 말이 아니라도 혁권은 이곳에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잠시 뒤 혁권 일행은 체포 과정에서 압수된 소지품들을 돌려받았는데 테이저 건은 위험 물품이라는 이유로 넘겨주지 않았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곧 독일을 떠날 생각인 데다가 괜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실랑이를 벌이기 싫었기에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잔뜩 모여 있는 기자들을 피해 후문으로 경찰서 건물을 빠져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존슨 씨.”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다가오는 사내가 한 명 보였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건장한 흑인이었는데 그동안 워낙 위험한 일을 많이 하다 보니까 한눈에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양손을 모두 주머니 밖으로 내놓은 채 앞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혁권은 긴장을 풀지 않았고 알아바디와 백성균 역시 언제든 덤벼들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채 상대를 주시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사내는 영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샌더슨 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역시 그의 예상이 맞았다.
아까 조사실에서 BFV 요원의 이야기를 듣고 샌더슨이 뒤에서 손을 써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어디에 있소?”
“절 따라오시죠.”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일행과 함께 흑인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가 그를 데려간 곳은 주차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밴이었다.
“혼자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부하들한테 기다리라는 눈짓을 한 혁권은 옆문을 열고 밴에 탔다.
그러자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샌더슨이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가는 데마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 같소.”
샌더슨의 말에 그는 쓰게 웃었다.
“그쪽이 독일 정부에 손을 쓴 겁니까?”
“맞소. 뭐.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해도 괜찮소.”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자 혁권은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아직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나선 것 아니오.”
“후후후. 부정하지는 않겠소.”
“어찌 됐건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잊지 않겠소.”
“역시 계산이 확실해서 좋다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쩔 거요?”
“뭘 말이오?”
상체를 바로 한 샌더슨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부터 그쪽을 노린 테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거 아니오.”
혁권 역시 정색을 한 채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번처럼 현상금을 내건 이슬람형제단에 복수를 할 생각이오?”
“그러든 말든 CIA가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소만…….”
날 선 혁권의 태도에 샌더슨은 진정하라는 듯이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오.”
“…….”
눈을 가늘게 뜬 혁권은 계속 이야기를 해 보라는 얼굴로 상대를 가만히 쳐다봤다.
“알다시피 지금 리비아에서는 트리폴리 정부군과 미스라타 민병대가 서로 힘을 합쳐서 훔스와 말라타를 비롯한 IS 계열 무장 세력의 점령지를 속속 탈환하고 있는 중이지 않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로 순조롭게 전투가 계속된다면 리비아 서북부 지역에서 IS 계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세력들을 모조리 다 격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넓히는 것과 동시에 리비아의 풍부한 유전지대를 확보하려던 저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IS의 기세가 크게 위축될 거요.”
“그게 내가 복수를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상관이 있소, 그것도 아주 밀접하게.”
단호한 대답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점령지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자 IS 계열 무장 단체들이 정규전에서 벗어나 무차별적인 테러로 공격을 전환할 거라는 첩보가 있소. 한마디로 이번 같은 테러가 리비아는 물론이고 친서방 세력을 지원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대상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오.”
자국민 피해와 여론에 민감한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 테러 단체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효과가 확실했는데,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여론이 안 좋게 흐르게 되면 각 정부들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IS는 테러를 통해서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작은 비용으로 자신들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다.
“미스터 김과 이슬람형제단이 서로 복수를 주고받는 것이 서방 국가들을 향한 동시 다발적인 테러의 기폭제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있소.”
“그럼 나보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서 놈들이 노리는 대로 그냥 당하라는 겁니까!”
거친 반응에 샌더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는 가지 않을 테니, 당분간만 참아 주면 안 되겠소?”
그래도 혁권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냥 해 달라는 건 아니오.”
“……?”
숨기는 게 있으면 얼른 토해 내라는 뜻으로 혁권이 눈을 치켜뜨자 샌더슨이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투자 이민을 위해 그리스에 세운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걸 해결해 주겠소이다.”
그러자 혁권은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다가 등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그가 관심을 보이자 샌더슨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빈 자리에 놔둔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한번 살펴보시오.”
서류 봉투 안에는 미국의 유명 SPA 브랜드(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Brand)에서 낸 주문서가 들어 있었다.
가격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주문 수량이 무려 셔츠 5만 벌이나 됐다.
이 정도면 보유한 공장의 규모를 생각할 때 최소한 3개월은 안정적으로 설비를 돌릴 수 있었다.
이리저리 생산 물량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안 되면 자기 돈을 써서라도 일단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하던 차였기에 혁권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이슬람형제단은 물론이고 잠재적인 적들한테 자신이 만만하게 보일 수도 있었기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혁권의 고민을 눈치챈 듯 샌더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미뤄 달라는 것뿐이오. 위험이 해소된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손을 써도 좋소.”
한쪽 손으로 밤새 면도를 하지 못해 조금 까칠해진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을 한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럼…….”
“하지만 오래 기다리진 못합니다.”
반색을 하는 샌더슨에게 쐐기를 박듯 혁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잘 생각했소.”
어쨌거나 일이 제 의도대로 풀리고 있으니 샌더슨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대신 이번에 도움을 받은 건 이걸로 갚은 셈 칩시다.”
“흠, 알겠소.”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순 없지, 하면서 샌더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뒤로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는 밴에서 내렸다.
혁권 일행이 아테네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입국장 밖으로 걸어 나가자 마중을 나와 있던 자말이 반색을 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보스, 어서 오십시오.”
짙은 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자말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잘 있었나?”
그도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깍듯한 태도로 손을 맞잡은 자말은 약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테러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릅니다.”
“그랬나.”
“한국에서 일이 생겼을 때 경호를 더 강화시켰어야 되는데 제 불찰입니다.”
자말의 말에 그는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아직도 놈들이 날 노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자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다고 했지만 자말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혹시 몰라 인원을 더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늘어서 있는 부하들이 네 명이나 됐다.
뭘 이렇게 거창하게 마중을 왔냐며 말하고 싶었지만 그리하면 기껏 생각해 준 자말의 배려를 무시하는 꼴이 될까 봐 속으로만 삼켰다.
“그럼 가지.”
얼른 공항을 뜨고 싶어서 혁권이 먼저 앞장서자 그 뒤로 자말을 비롯한 네 명의 수행원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한 무리를 지어 있으니 이에 위압감을 느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에 길을 터 주었다.
일행을 태운 차량 두 대가 줄을 지어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혁권이 옆자리에 앉은 자말을 보며 말했다.
“별일 없지?”
“네. 아, 참. 미스라타 민병대에서 전투식량을 좀 더 보내 달라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얼마나?”
“종류 별로 5만 박스를 주문했습니다.”
“상당히 많군. 지난번에 보내 준 것도 아직 꽤 남았을 텐데.”
“조리 없이 간단히 먹을 수 있고 맛도 있는 데다 할랄 인증까지 되어 있는 저희 전투식량 인기가 현지에서 아주 큽니다. 민병대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까지 구해 먹을 정도라더군요.”
“호오. 그래.”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고 전투식량을 만들어 공급했지만 이렇게 인기를 끌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기에 혁권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랄 인증을 받은 것이 주효했습니다. 항구가 다시 열리자 여기저기서 식료품이 공급되지만 아무래도 이슬람 율법에 맞는 음식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가 제공하는 전투식량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달은 힘들고 다음 달 안으로 보내 준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류 공장은 가동 준비가 다 됐다고 그랬지?”
“예.”
“곧 제품 생산에 들어가야 되니까 준비 상태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점검 하도록 해.”
이야기를 들은 자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주문을 확보하신 겁니까?”
“그래. 셔츠 5만 벌을 OEM 생산하는 건데 이윤이 크지는 않지만 일단 공장을 돌리는 것에 만족하자고.”
“정말 잘됐습니다.”
이민국에 약속한 날짜가 이미 지난 상태라 이러다가 어렵게 받은 이민 허가가 취소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하던 자말은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각 염려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주문서니까 우선 이민국에 서류를 접수시켜서 확인을 해 줘.”
“그러겠습니다.”
샌더슨한테서 받은 서류 봉투를 그대로 넘겨준 혁권은 피곤하다는 듯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