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56
256
전투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갈수록 탈출 가능성이 낮아졌기에 혁권은 서둘러 움직였다.
화물을 내렸던 창고로 돌아가자 어린아이와 노약자 들을 비롯해 반군 부상병들까지 백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반군 부상병들은 상태가 아주 위증한 이들로 의약품이 부족한 알레포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려웠기에 잡히면 무조건 죽임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내보내려는 거였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둔 것으로 봐서 그가 부탁을 거절했더라도 탈출을 그대로 감행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한쪽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본 혁권은 하산한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가 가져온 트럭은 쓸 수 없으니 다른 걸 준비해 주십시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어서 그게 더 낫지 않겠소?”
그는 단호한 얼굴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좁고 폭격으로 엉망이 된 도로를 지나가기에는 덩치가 너무 큽니다. 그리고 너무 눈에 띄어서 잘못하면 정부군한테 집중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산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군한테서 노획한 화물 트럭이 세 대 있는데 그거면 되겠소?”
“주민들을 태운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짐칸이 덮여 있어야 됩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 주겠소.”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손목시계를 봤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 가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바로 움직이도록 합시다.”
“알겠소.”
“그리고 탈출로는 기차역 방향으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상대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거긴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상대의 생각을 역이용하는 겁니다. 포위망을 갖춘 정부군은 반군이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것만 신경 쓰고 있지 설마 동부 지역을 공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설명을 들은 하산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포위가 된 이후로 한 번도 동부 지역을 먼저 공격한 적이 없으니 분명 그럴 거요.”
“정부군의 공세를 중단시키는 건 힘들겠지만 잘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력이 열세인 만큼 절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혁권의 당부에 하산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염려 마시오.”
그러고는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이렇게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
“이왕 하기로 한 일이니 데려가기로 한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하산이 결연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꼭 그렇게 될 거요. 아니, 내가 어떻게 해서든 길을 만들어 주겠소.”
“저도 그리됐으면 합니다.”
“이번에 도움을 준 걸 결코 잊지 않겠소.”
그와 악수를 나눈 하산은 몸을 돌려 반군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숨을 내쉰 혁권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그는 옆에 조용히 서 있는 하킴을 보며 말했다.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후회되십니까?”
“그런 건 아냐. 다만 나 때문에 또다시 힘든 일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부하들한테 미안할 뿐이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하킴이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이미 보스한테 맡긴 목숨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냥 지시만 내리십시오.”
“다른 부하들도 그럴까?”
“물론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렇군.”
가만히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산이 새로 가져온 트럭 세 대를 뒤에 달고 혁권 일행이 창고를 나섰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선두에 혁권과 부하들이 탄 차량 두 대가 서고 트럭이 후미에서 따라오는 대열을 취했다.
사방이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차량들은 미등조차 켜지 않은 채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정부군에 의해 전기가 완전히 끊겨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으나 혁권과 부하들은 미리 준비해 온 야시경에 의존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는 좁아졌지만 불빛을 켜지 않아 정부군에 들키지 않고 점령지 경계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폭음과 총성이 쉬지 않고 계속 들렸지만 그래도 다른 방향에 비하면 전투가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멀리 어둠 속에서 높다란 알레포 역 시계탑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부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서 세워.”
“예.”
앞서 가던 사륜구동차가 천천히 멈춰 서자 뒤따라오던 차량들도 줄을 지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시동 끄지 말고 대기해.”
짧게 말한 혁권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건물 지붕 사이로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시계탑을 바라본 그는 이내 뒤에 늘어서 있는 트럭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있는 세 트럭 중 제일 가까운 차량에 다가가 짐칸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천을 들어 올리니 희미한 달빛에 내부가 어스름히 보였다.
발 하나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던 난민들이 갑작스런 인기척에 숨을 죽인 것이 느껴졌다.
자신에게로 돌려지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을 보면서 혁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끝날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말은 안 통하지만 분위기로 대충 무슨 뜻인 줄 알아들었는지 입구 쪽에 앉은 몇몇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포즈를 취했다.
혁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천막을 내리고 돌아섰다.
이제 잠시 뒤면 또다시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가로질러 도시를 탈출해야 됐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자칫 정부군한테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었기에 입맛만 다시며 참았다.
사륜구동 차 옆으로 돌아가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하킴이 급히 다가왔다.
“보스, 반군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군이 쏜 박격포탄 여러 발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 위를 날아갔다.
쉬이이익~!
곧이어 둔탁한 폭음과 함께 철도역 부근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그걸 본 혁권은 작게 숨을 내뱉곤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자동소총을 노리쇠를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철컥.
“출발해.”
그가 사륜구동 차에 올라타자 운전대를 잡은 부하는 야시경을 눈에 쓰면서 가볍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우웅.
혁권도 단안식 야시경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러자 눈앞이 녹색으로 바뀌면서 앞에 뭐가 있는지 또렷하게 보였다.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거였는데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 부하들이 탄 차량 두 대가 앞서 가자 난민을 가득 태운 트럭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누르면서 혁권이 말했다.
“다들 들리나?”
-예.
-말씀하십시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사방을 똑바로 살피고 이쪽을 공격하려 들면 바로 사살해 버려.”
단호하게 말한 혁권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AK47 자동소총을 두 손으로 꽉 거머쥐었다.
둔탁한 폭음과 총성이 귓가를 울리고 예광탄 줄기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걸 보면서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방금 전까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어느새 제 박자를 찾으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코너를 따라 성벽처럼 우뚝 서 있는 5층 건물을 돌아가자 반군과 정부군이 한데 뒤엉켜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투투투퉁!
타타탕! 타탕! 꽈아앙!
도로 한쪽을 막고 있던 정부군 전차가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불에 타고 있는 가운데 반군들이 그동안 당한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마구 총을 쏴 댔다.
설마 반군이 이쪽을 공격해 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부군 병사들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쏟아진 총탄에 정부군 병사 서너 명이 피를 뿌리면서 그대로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시끄러운 총성이 울렸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온갖 불길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차량 행렬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거리 한복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발견한 정부군 병사들이 쏜 총탄이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퍼퍽! 퍽!
차체에 총탄 구멍이 뚫리는 소리가 나자 혁권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총구를 밖으로 내밀며 바로 응사를 했다.
타타타탕!
방아쇠를 당기자 묵직한 충격에 어깨로 전해졌다.
다른 부하들도 탄창을 다 비워 버릴 기세로 맹렬하게 총격을 퍼부었다.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
운전석에 앉은 부하가 있는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륜구동 차가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도로에 떨어진 건물 잔해들을 타넘으면서 거리를 질주했다.
피슝!
총구 화염이 번쩍이면서 길게 뻗어 나오는 예광탄 줄기와 귓불을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 소리가 그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빗발치는 총탄에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권은 넘치는 아드레날린에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과감하게 상체를 드러낸 채 총구를 좌우로 돌리면서 자동소총을 마구 긁어 댔다.
초반에 CIA가 몰래 지원해 준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에 힘없이 러시아제 전차가 격파당했다고 해도 경계 지역에 배치된 정부군에는 반군의 기습 공격을 막아 낼 충분한 전력이 남아 있었다.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굳히며 도로에 집중사격을 가한다면 혁권과 부하들은 그대로 총알받이가 되어 버렸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은 마치 지휘부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군 병사들은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총을 쏴 대거나 일부는 아예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숨기기 바빴다.
그 덕분에 차량 행렬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거리를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
덜컹.
바닥에 돌멩이라도 있었는지 차체가 크게 들썩였다.
그 때문에 한순간 총을 든 손이 미끄러질 뻔했으나 혁권은 침착하게 고쳐 쥐고 자세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
서른 발짜리 탄창이 모두 비자 그는 재빨리 전술 조끼 주머니에서 새 탄창을 꺼내 갈아 끼우고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탄피가 쇳소리를 내면서 발밑에 떨어져 쌓였다.
타타탕! 탕! 탕!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총구 화염을 향해 자동소총을 갈겨 대자 비명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 두셋이 모습을 감췄다.
그걸 끝으로 양쪽 병사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블록을 벗어났다.
그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를 들으며 사격을 멈춘 혁권은 고개를 돌려 백 도어 유리를 통해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예광탄 불빛과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지만 자신들을 추격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차량 행렬이 포위망을 돌파해서 서쪽 시가지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당장 반군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급급하다보니 이쪽을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터였다.
앞으로 갈 길이 먼 혁권 입장에서는 아주 반가운 상황이었다.
반군이 시선을 끌어 주는 동안 최대한 빨리 도시를 빠져나가 정부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부하도 그걸 아는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