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04
304
# 내가 원래 좀 뒤끝이 있어Ⅱ
“자, 이제 10분 전이에요. 모두 스텐바이 해 주세요!”
한 손에 큐시트를 돌돌 말아서 쥔 조연출이 크게 소리를 치자 모델과 메이크업 스태프들이 서둘러 치장을 마무리 지었다.
소현도 손질이 끝난 머리를 거울로 비춰 보면서 제대로 잘됐는지 살펴봤다.
“소현 씨.”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던 소현은 혁권이 웃으면서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야, 이렇게 메이크업을 하고 있으니까 정말 예쁜데.”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구경하러 온다고 했잖아.”
“그거 그냥 농담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자, 이거 받아.”
능청스럽게 말한 혁권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중에 끝나고 주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 든 소현은 이내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그렇지.”
혁권 덕분에 갑자기 무대에 입고 나가는 옷이 줄어들면서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소현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분명 외부인 출입 금지일 텐데…….”
“다 방법이 있지. 내가 원래 수완이 좀 좋잖아.”
어깨를 으쓱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소현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만 만나면 기분이 좋고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5분 남았어요!”
조연출이 들어와서 크게 소리를 치자 혁권은 찡끗 한쪽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가 봐야 되겠네. 객석에 앉아서 볼 테니까 떨지 말고 잘해.”
“내가 무슨 아마추어인 줄 알아요. 이래 봬도 무대에 선 지 2년이나 됐다고요.”
소현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자신 있게 말하자 혁권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멋진데. 지금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제 실력을 다 보여 주는 거야.”
“…….”
의기소침해 있던 걸 알기라도 하듯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에 그녀는 가슴 한쪽이 울컥하며 차올랐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손을 흔들면서 백스테이지 밖으로 나가는 혁권의 뒷모습을 소현은 한없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모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소현에게 물었다.
“누구야, 애인?”
“아녜요. 그냥 아는 사람.”
아는 사람과 친한 오빠의 중간쯤에 걸쳐져 있는 사이이긴 했지만 왠지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하기가 싫었다.
“헤에.”
그녀는 감탄사를 흘리면서 혁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더니 금방 소현에게 붙어 아양을 떨었다.
“괜찮은 남자잖아. 저기, 혹시 연락처 알면 나한테 가르쳐 주면 안 돼?”
그 말에 소현이 웃는 낯 그대로 표정을 미세하게 굳혔다.
“굳이 주선자 흉내 내면서 자리 만들어 줄 필요도 없어. 전화번호만 알려 주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몰라요.”
“응?”
“그, 얼굴만 아는 사이라서. 전화번호까지는 저도 잘 몰라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게다가 자기 번호는 아무한테나 잘 안 알려 주는 것 같더라고요. 모르는 사람한테서 갑자기 연락 오는 것도 싫어하고…….”
아무렇게나 둘러댄 변명이었으나 옆에 있던 모델은 의외로 수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쩐지 여자한테는 철벽을 칠 것 같은 인상이더라. 주변에 이렇게 미인이 많은데도 곁눈질 한번 안 하더라니까.”
“어? 그랬어요?”
‘나는 몰랐는데…….’
소현은 입가가 자꾸 올라가려고 하는 것을 숨기려 혁권이 주고 간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부남도 아닌데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딱 두 가지밖에 없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만큼 여자에 궁하지 않거나, 아니면 애인한테 푹 빠져서 다른 데 눈 돌릴 겨를이 없거나.”
모델은 손가락까지 펴 가면서 얘기 하다가 갑자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아아, 역시 애인이 없을 리가 없겠지.”
그녀는 흥이 깨져 버린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섰다.
“그래도 저런 남자면 친구들도 꽤 수준 높을 것 같은데. 혹시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소개시켜 줄 사람 없냐고 넌지시 말이나 물어봐 줘.”
“예.”
아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소현은 말을 입속으로 삼키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편 백스테이지 한쪽에서는 이번 패션쇼의 주인공인 디자이너가 어찌 된 일인지 인상을 쓴 채 스태프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델만큼이나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구에 패션 업계 종사자라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머리색을 화려하게 물들였고, 검은 슬랙스와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슬슬 나이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눈가 주름과 성마른 느낌의 인상에서 깐깐한 성격이라는 것이 물씬 풍겼다.
“스탠바이까지 5분도 채 안 남았는데 무대감독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날카로운 디자이너의 시선에 조연출 역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행사장에 계셨는데…….”
“그런데 왜 지금은 안 보이는 건데!”
“죄송합니다.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디자이너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이마를 찌푸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모델들을 런웨이로 올려야 되는데, 언제 찾아서 데려온다는 거야!”
잔뜩 날이 선 디자이너의 말에 조연출은 어깨를 움츠리며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조연출 역시 갑자기 안 보이는 무대감독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건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마귀할멈 같은 얼굴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무섭게 노려보는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조명과 음향, 진행 팀까지 스태프들이 전부 조연출만 다그쳐 대는데 아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그도 무대감독처럼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선생님, 관객들 입장이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여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하자 얼굴을 굳힌 채 입술을 질근질근 씹던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쪽 이름이 뭐라고 했죠?”
“바, 방형욱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작게 머리를 끄덕인 디자이너는 양손을 허리에 걸친 채 이야기를 했다.
“미스터 방이 무대감독 대신 연출을 맡도록 해요.”
“예? 제가요?”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보고 있던 조연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가뜩이나 신경질이 나 미치겠는데 조연출이 머뭇거리자 디자이너는 이마에 혈관 마크를 만들어 내며 짜증을 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여기서 쇼를 접기라도 하자는 거야!”
“아, 아닙니다.”
찔끔한 조연출은 얼른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흔들었다.
“옆에서 봤으니까 순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순서를 외우고 있는 건 물론이고 리허설 준비를 자신이 거의 다 했기에 연출 내용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직접 연출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케이블 채널이지만 방송국 카메라까지 들어와서 녹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부담감이 컸다.
디자이너 역시 입봉조차 하지 않은 초짜한테 자신의 무대를 맡기는 것이 영 불안하고 탐탁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 없으니까 미스터 방이 연출을 맡도록 해요. 내 말 알아들었죠!”
“예, 옛.”
“그럼 미스터 방만 믿어요.”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디자이너가 몸을 돌려 사라지자 조연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이게 도대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꿈에도 그리던 입봉을 하게 된 조연출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는 꼭 자신이 멋들어지게 쇼를 연출하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기회가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시자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찌 됐건 이건 기회였다.
잘만하면 지긋지긋한 조연출 딱지를 떼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팔.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
해 보자고 마음을 먹자 그동안 깊숙이 눌려 있던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한 조연출은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렀다.
“모두 올 스탠바이. 음향 팀, 배경음악 준비됐죠?”
-오케이.
“모델들 무대 위로 올려 주시고 2분 뒤에 암전을 했다가 음악이 플레이되면 바로 쇼를 시작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들리는 스태프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조연출은 의욕에 가득 찬 얼굴로 무대 앞 하우스로 달려갔다.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관람객들이 런웨이를 가운데 두고 반원 형태로 설치된 좌석을 하나둘씩 채웠다.
혁권 역시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는데 런웨이 바로 앞 VIP석이었다.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답게 얼굴만 보면 누군지 알 만한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고 한쪽에는 사진기자들이 잔뜩 몰려 앉아 있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기에 조금 어색한 기분도 들었지만 혁권은 금방 적응을 하곤 입구에서 받은 팸플릿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조명이 천천히 꺼지더니 스피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금부터 김도영 디자이너의 작품들을 감상하시겠습니다.
멘트가 끝나는 것과 함께 조명이 다시 켜지자 경쾌한 음악에 맞춰 늘씬한 모델들이 워킹을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등장한 모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매력을 뿜어내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혁권 역시 모델들의 움직임과 옷차림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런 가운데 화려한 무대 앞과 달리 백스테이지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큐시트에 맞춰 정해진 옷을 입고 등장해야 됐기에 도도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던 모델들은 뒤로 나오자마자 입고 있던 의상을 벗어 던지면서 바쁘게 탈의실로 뛰어갔다.
“빨리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어!”
“내 옷 어디 있어?”
백스테이지 바닥에는 온갖 옷가지와 잡동사니 들로 넘쳐났다.
“5번 준비하시고 다음번 모델분이 들어오면 바로 나가세요.”
“네.”
스태프의 말에 자수 장식이 들어간 선레이 플리츠 치마를 입은 소현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몇 번이나 섰던 런웨이지만 음악이 나오고 조명이 들어오면 늘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우.”
그녀는 양손을 가슴에 올린 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할 수 있어. 정소현. 여긴 너만의 공간이야.”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주문 같은 거였다.
그러자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있던 스태프가 이제 나가라는 듯이 재빠르게 손짓을 했다.
신호를 받은 소현은 허리를 쭉 펴곤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이 카리스마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당하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부신 조명을 받으면서 런웨이에 선 순간만큼 그녀가 바로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