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05
305
소현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혁권은 의자에 걸쳐 놓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환한 조명 아래 선 소현은 마치 낯선 사람처럼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색 크리스털 목걸이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며 빛났고, 소현이 다리를 뻗어 워킹을 할 때마다 플리츠스커트가 우아하게 휘감겨 그녀의 가녀린 몸 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찔하리만큼 높은 하이힐을 신었으면서도 마치 푹신한 쿠션 위를 거닐고 있는 양 전혀 힘들이지 않고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런웨이의 끝, 턴 위치까지 오자 소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몸을 살짝 돌리고 턴.
그리고 어깨 너머로 뒤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포즈.
허리에 단 테슬 장식이 보는 이를 유혹하는 것처럼 흔들리며 그녀와 함께 박자를 맞췄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혁권이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소현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찡긋.
소현의 눈이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런 윙크를 만들어 냈다.
물론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부드럽게 변한 것을 혁권은 똑똑히 보았다.
“자부심 가질 만한데.”
런웨이에 선 소현은 마치 빛으로 빚어 낸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넘치는 활력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질 정도로 밝고 아름다운 표정이어서 언제까지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볍게 턴을 하며 도도하게 런웨이를 걸어간 소현은 백스테이지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
그러고는 무대의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다음 옷을 갈아입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탈의실로 뛰어갔다.
말이 탈의실이지 그냥 칸막이 하나만 덜렁 쳐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인원이 많고 빨리 옷을 갈아입어야 되는 데다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대부분 그 자리에서 훌렁 의상을 벗어 던졌다.
소현 역시 모델들로 꽉 찬 탈의실을 이용하지 않고 들어가자마자 뒤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어쩔 수 없이 속옷만 입은 모습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게 되지만 딱히 신경 쓰는 이도 없고 모두들 그게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소현 씨, 잘했어요. 자, 여기 다음 의상!”
“고마워요.”
스태프 한 명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의상을 가져와서 내미는 걸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받았다.
붙어 있는 번호표가 맞는지 확인하고는 재빨리 씌워진 비닐을 벗기고 의상을 꺼내 갈아입었다.
능숙하게 옷을 챙겨 입고 거울로 매무새를 살펴보고 있을 때 진행 스태프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16번 나오세요. 다음 차례예요!”
“네!”
오늘 자신의 마지막 의상이었기에 소현은 잘 끝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곤 몸을 돌려 런웨이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소현은 막 무대를 끝낸 손주아가 백스테이지로 들어오는 걸 보곤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괜찮다며 애써 떨쳐 내려고 했지만 마지막 의상을 빼앗긴 것에 대한 앙금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직 쇼 중간이니까.’
그녀와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시간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한창 일하는 도중이었다.
사적으로 안 좋은 감정이 있어도 공과 사를 구별할 때쯤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소현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아래에서 나무를 받쳐서 만든 계단을 올라오는 소현을 발견한 손주아의 눈에 못된 장난을 떠올린 듯한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이 가깝게 스치는 순간 손주아가 옆으로 몸을 기우뚱거리면서 어깨로 소현을 밀쳤다.
“아!”
족히 10센티는 되는 높은 하이힐이었다.
게다가 다리를 더 가늘게 보이기 위해 굽도 매우 얇은 것이어서 중심을 잃고 흔들거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가까스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은 면했으나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린 소현을 보고 손주아가 머리 위에서 이죽거렸다.
“어머, 미안.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그리곤 소현이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잠깐, 읏!”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손주아를 붙잡으려던 소현은 갑자기 발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쓰러질 때 발목이 안 좋은 쪽으로 꺾인 듯, 화끈거리면서 열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소현 씨, 왜 그래?”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일어나질 못하는 소현을 그제야 뒤늦게 발견한 스텝이 달려와 물었다.
백스테이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도 손주아의 행동을 아무도 보지 못한 듯 각자 자기 할 일에 바빴다.
하긴 아무리 손주아라도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상태에선 뻔히 악의가 드러나 보이는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뒤에서 기 싸움을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쇼를 망칠 정도의 행위라면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고 앞으로 무대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아니면 그 정도로 자신을 미워하는 걸까.
더 이상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소현은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했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소, 손 좀 잡아 주세요.”
난간이 없는 계단이었기 때문에 딱히 잡고 일어날 것이 없었다.
소현은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일어서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손주아가 옷까지 밟고 지나갈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이대로 무대에 나갈 순 있을 것 같았다.
발목만 멀쩡하다면.
“16번, 어디 있어? 스탠바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소현은 굳게 결심을 다진 얼굴을 했다.
만약 여기서 못하겠다고 포기해 버리면 오늘을 위해 1년 동안 준비했을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쇼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그리고 아마 자신의 커리어 역시 망가질 것이었다.
소현은 그런 결과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
분명 내일이 되면 퉁퉁 부어서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될 테지만, 어떻게든 무대를 한 바퀴 걷는 것쯤은 가능하겠지.
괜찮아. 발목이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비록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지만 일단 참아 보기로 했다.
소현은 한껏 고개를 쳐들고 다른 모델의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어디 아파? 눈가가 빨개.”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 모델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으나 소현은 한껏 프로다운 미소로 아무렇지도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곧바로 그녀의 순서였기에 더 이상 말이 오가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 작은 호의에도 감사했다.
화장이 지워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소현은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마스카라가 번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 모든 잡념들은 밝은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자 단숨에 바람을 불어 날려 버린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자신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과 쿵쾅거리는 커다란 음악, 화려한 조명이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
소현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평소와 같이 당당하게 워킹을 하며 런웨이로 걸어 나갔다.
마침내 30여 분간에 걸친 패션쇼가 모두 무사히 끝나고 디자이너하고 함께 메인 모델이 나와 피날레를 장식하자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짝짝짝!
그런 박수 소리를 뒤로한 채 소현의 백스테이지 의자에 앉아 욱신거리는 발목을 한쪽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으…….”
많이 접질렸는지 금방 벌겋게 부어올랐다.
아픈 것도 힘들었지만 모레 예정되어 있는 패션쇼에 어떻게 서야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지금도 이런데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걷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 옆자리를 쓰던 모델이 그걸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왜 이래? 걷다가 접질린 거야?”
“예. 좀.”
“이거 심한데. 어쩌다가 이랬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료한테 차마 손주아가 무대 계단에서 자신을 밀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쪽 바닥 소문이 엄청 빠르기도 했고 딱히 증거나 증인도 없는데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자칫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걷다가 삐끗했어요.”
“조심 좀 하지. 엄청 아프겠다. 바로 병원부터 가.”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참. 그러고 보니 너 모레 쇼가 하나 더 남아 있지 않았어?”
“맞아요.”
“이래 가지고 런웨이에 설 수 있겠어?”
동료 모델의 말에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잠깐 내려다보고는 대답했다.
“그때까지는 낫겠죠.”
진통제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걸을 수만 있으면 무대에 오를 생각이었다.
무모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미 그녀의 몸에 의상을 다 맞춰 놓은 데다 이틀도 남지 않았는데 못하겠다고 한다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발목을 다쳤다는 건 핑곗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쇼를 앞두고 몸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 뻔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동료 모델도 쉬라는 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못했다.
“치료받고 밤에 잘 때 냉찜질을 해. 그럼 부기가 조금 빠질 거야.”
“고마워요.”
“호텔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앞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 돼요.”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동료 모델이 짐을 챙겨서 일어나자 그녀는 접질린 발목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잘하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다 꼬이는 걸까.
소현은 어쩐지 눈가에 물기가 고이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꾹 눌러 참은 후 신발을 갈아 신었다.
일을 할 때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은 하이힐을 신어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오히려 편하고 쿠션이 좋은 신발을 선호했다.
소현 역시 다르지 않아서, 아침에 호텔에서 나올 때 가방에 플랫슈즈를 하나 챙겨 왔었다.
사실은 운동화가 제일 좋을 테지만 가방에 쉽게 들어갈 수 있고 무게가 적당한 것을 찾다 보니 딱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소현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플랫슈즈를 신은 한쪽 발을 부자연스럽게 절면서 느린 발걸음으로 행사장을 벗어났다.
백스테이지를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혁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소현아!”
“기다렸어요?”
“당연하지.”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늘 정말 멋졌어! 무대 위에서 아주 광채가 나던 걸.”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정말이야. 새삼 정말 모델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지금까지 아닌 줄 알았어요?”
소현이 살짝 눈을 흘기자 그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말했다.
“쪼금 의심하기는 했지.”
“뭐예요!”
“하하하. 농담이야.”
한쪽 팔을 들어 주먹을 쥐는 걸 보며 혁권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
“이제 다 끝났지. 밥 먹으러 가자. 근처에 샐러드가 맛있는 곳이 있다네.”
고작 샐러드로 배가 채워질 리 없었지만 모레 또 무대에 서야 되는 그녀를 배려한 거였다.
그걸 바로 눈치챈 소현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병원부터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어디 다쳤어?”
“발목을 조금 접질렸어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혁권은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