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54
354
# 이들리브
혁권 일행이 탄 차량 두 대는 매복이 있었던 지역을 크게 우회해서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렀다.
시간이 더 지체됐지만 적하고 또다시 부딪치는 것보다 나았고, 이렇게 해도 터키 국경으로 향하는 거하고 비교해서 이쪽이 훨씬 빨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적이 혁권 일행을 추격해 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교전 장소에 남겨진 전리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쫓아올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몰랐으나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던 일행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거래 주체가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몰랐지만, 매복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화물을 포기하면서 손해를 본 돈이 적어도 1억 달러는 될 터였다.
원래부터 거래 규모가 컸기도 했으나 나눠서 화물을 옮기지 않고 샤레프가 한꺼번에 가져가길 원하는 바람에 피해가 더욱 늘어났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하킴의 말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보스, 저길 보십시오.”
하캄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비스듬히 꺾인 채 도로 한쪽에 서 있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영어로 아랍어로 이들리브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 다 왔군.”
화물을 잔뜩 가지고 도착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고작 픽업트럭 두 대만 겨우 살아남아서 완전 패잔병의 몰골로 온 것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출발 전에 압둘라흐만한테 오더 대금을 다 받았기에 금전적인 손해는 없더라도 거래를 실패했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교전 중에 함께 온 부하 한 명을 잃었기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새 석양이 지면서 하늘이 온통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검문입니다.”
하킴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일단의 병사들이 도로 한가운데 장애물을 쌓아서 통행을 가로 막고 있었다.
확 트인 개활지인 데다 주변에 다른 차량도 없었기에 이미 상대도 이쪽을 발견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복장으로 봐서 반군 같습니다. 왼편에 기관총을 장착한 픽업트럭도 하나 세워져 있군요.”
여기까지 와서 시리아 정부군을 만났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반군이라니 다행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괜히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천천히 바리케이드 앞에 세워.”
“알겠습니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차량을 멈춰 세우자 상대편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크게 소리를 쳤다.
“소속을 밝혀라!”
러시아제 PK 기관총 총구가 이쪽을 조준하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벌집이 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픽업트럭 화물칸에 타고 있던 모센이 황급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성질 급한 몇몇은 그대로 총구를 모센 쪽으로 돌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발사할 기세였으나 그는 계속해서 뭐라고 소리치며 천천히 다가갔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글쎄요.”
모센의 돌발 행동에 혁권은 눈썹을 찡그리고는 상황을 지켜봤다.
잠시 뒤 다시 돌아온 모센이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이야기가 잘됐으니 다시 출발하면 됩니다.”
“뭐라고 한 거요?”
그러자 모센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이번에 거래를 하기로 되어 있는 JAF(정복군) 지휘관 이름을 대니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더군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다 좋은데 앞으로는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고 움직이시오.”
“……그러지요.”
상대가 다소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혁권은 제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경고를 했다.
이번 한 번뿐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매복에 당했을 때도 샤레프를 구한다고 자리를 이탈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렀기에 확실히 이야기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반군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를 옆으로 치워 주자 일행이 탄 차량은 검문소를 통과해서 곧장 이들리브 시내로 들어갔다.
시리아의 주요 농산물 생산지이자 이들리브 주의 주도主都이기도 한 이들리브 시의 첫인상은 황폐함 그 자체였다.
번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 도로는 구멍이 뚫리고 파여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
회색빛 폐허는 마치 지옥 같았던 알레포를 연상시켰다.
그나마 나은 건 도시가 전쟁터로 변해 정부군과 반군이 밤낮으로 교전을 벌이던 알레포하고 달리 이들리브는 반군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수시로 정부군과 러시아 항공기들의 폭격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도시 전체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병원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일행은 샤레프와 부상당한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들리브에서 가장 큰 국립 병원을 찾아갔다.
끼이익.
병원 입구에 픽업트럭이 멈춰 서자 일행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그걸 보곤 깜짝 놀라 다가왔다.
“어딜 다친 겁니까?”
그러자 모센이 이제 의식을 완전히 잃고 들것에 누워 있는 샤레프 쪽으로 의사를 잡아끌 듯 데려가면서 빠르게 이야기를 했다.
“왼쪽 다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괜찮겠습니까?”
청진기를 가슴에다 대고 살피던 의사는 굳은 얼굴로 옆에 있는 간호사를 돌아봤다.
“바로 수술실로 데려가고 수혈부터 시작해요!”
“예, 선생님.”
간호사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샤레프를 이동용 침대에 눕히는 걸 보며 의사가 물었다.
“환자 혈액형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센이 말끝을 흐리자 의사가 고개를 돌려 간호사한테 다시 이야기를 했다.
“혈액형 검사부터 해요!”
“알겠습니다.”
의사는 다른 부상자들도 빠르게 살펴보고는 위중한 순서대로 치료에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의료진의 몫이었기에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혁권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모센한테 다가갔다.
“수술을 받고 있으니 살 수 있을 거요.”
“그래야지요.”
“그건 그렇고 연락을 기다릴 텐데 압둘라흐만 씨한테 상황을 보고해야 되지 않겠소?”
“…….”
잠시 잊고 있던 현실로 돌아온 모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액의 거래를 날려 버리고 아들인 샤레프까지 중상을 입고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압둘라흐만한테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모센을 보면서 혁권이 충고를 해 줬다.
“시간이 갈수록 수습하기가 어려워질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 거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모센은 위성전화기를 꺼내 들고는 복도 구석으로 걸어갔다.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어찌 됐건 거래를 망쳤으니 그걸 지켜보는 혁권의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혁권은 병원이라는 걸 떠올리곤 밖으로 나갔다.
콘크리트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선 혁권은 하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한 열네댓 살쯤 됐을까 싶은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공터 한쪽에서 여기저기 꿰매 너덜너덜해진 축구공을 차면서 놀고 있었다.
폭격에 반쯤 부서진 건물과 그 옆에 중기관총이 거치된 채 세워져 있는 픽업트럭만 아니라면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죽고 죽이는 어른들의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지긋지긋한 내전이 모두 끝날 때까지 저 아이들이 과연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혁권이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눈앞에서 노는 아이들은 참으로 천진난만해 보였다.
“앗!”
한 아이가 공을 차다가 헛발질을 했는지 흙바닥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면서 낄낄거리자 빨개진 얼굴로 툭툭 털고 일어난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공을 찾다가 혁권이 발로 축구공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곤 곧장 달려왔다.
그러다 자신들과는 다른 외양을 가진, 외국인인 것을 깨닫곤 뭐라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모습에 혁권이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몇 살이야?”
능숙하지 못한 탓에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일단 말이 통한다는 것을 깨닫자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열세 살요.”
그러면서 양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였다가 다시 오른쪽 손가락 셋을 들어 보였다.
“착하다.”
혁권은 대답을 잘해 줘서 고맙다는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허리를 숙여 축구공을 집어서는 아이한테 넘겨주었다.
“자.”
그리고 품속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밀자, 처음엔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금방 받아들질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가 초콜릿을 향해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먹고 싶긴 한 눈치였다.
“가져가. 받아도 돼.”
혁권이 재차 말하면서 손에 쥐여 주니 그제야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친구들이랑 나눠 먹고.”
“고맙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인사한 아이가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자 금방 주변에 다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마도 낯선 아저씨랑 무슨 얘길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아이가 가진 초콜릿을 보자 와악, 하고 좋아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동그랗게 주위를 둘러싼 친구들과 초콜릿을 한 조각씩 나눠 먹는 모습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모센이 다가와서 말을 거는 소리에 혁권이 몸을 뒤로 돌렸다.
“존슨 씨, 전화를 받아 보십시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앞으로 내밀어진 위성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날세.
묵직하게 깔린 목소리에 압둘라흐만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하긴 화물을 다 잃고 후계자인 첫째 아들까지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고 있으니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말씀하십시오.”
-매복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혁권은 위성전화기를 귀에 댄 채 힐끔 앞에 있는 모센을 쳐다보곤 이야기를 했다.
“적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은 데다 전력 차이가 심해서 화물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드님도…….”
-아. 그 이야기는 됐네. 항상 위험을 곁에 두고 살아가야 되는 인생이니 샤레프도 그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을 걸세.
“…….”
크게 화를 내거나 화물과 아들을 제대로 지켜 내지 못했다고 원망을 쏟아 낼 줄 알았던 혁권은 생각과 달리 너무나도 담담한 태도에 내심 감탄했다.
-그것보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그게 뭡니까?”
-이들리브에서 카바트라는 사람을 내 대신 좀 만나 줬으면 좋겠군.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혁권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혹시……?”
-자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네. 이들리브를 장악하고 있는 반군 지도자일세.
“그런 사람을 제가 왜……?”
-어찌 됐건 우리 쪽 책임으로 거래가 어긋나 버렸으니 뒷수습을 해야 되지 않겠나. 전화 통화만으로 끝내기에는 그러니 내 대신 자네가 카바트 사령관을 만나 주게. 원래대로라면 샤레프가 처리해야 되지만 알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부탁하네.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수술 중인 샤레프까지 언급하면서 압둘라흐만이 부탁하자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고마움을 표시한 압둘라흐만은 카바트 사령관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되는지 한참 동안 설명을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