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61
361
잠시 상대를 무섭게 노려본 혁권은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래서 좋을 것이 없을 텐데…….”
“난 명령 받은 대로 할 뿐이오.”
단호한 태도에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뻔뻔한 저 얼굴을 주먹으로 박살 내 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들의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이런 비열한…….”
“자, 어떻게 할 건지 선택하도록 해.”
권총 끝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압둘 대위가 재촉했다.
“오늘 이 일을 머릿속에 꼭 기억해 두도록 하지.”
“얼마든지.”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혁권은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여기서 흥분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심호흡을 한 혁권은 옆에 있는 자말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무기를 내려놔.”
그러자 자말이 절대 안 된다는 얼굴로 혁권을 쳐다봤다.
“보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서 다 같이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잖아.”
“이제 곧 정부군이 진격해 올 텐데 이곳에 남으시면 안 됩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후우.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그를 만류하려던 자말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한 혁권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에 쥔 권총을 아래로 내렸다.
다른 부하들도 그걸 보곤 머뭇거리면서 무기를 치웠다.
“진즉에 그렇게 할 것이지. 그러면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었잖아.”
압둘 대위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고개를 돌린 혁권이 정색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봤다.
“그쪽 말대로 아직 못 끝낸 거래가 있어서 남는 거니까. 우쭐해하지 마.”
“뭐야!”
와락 인상을 구긴 압둘 대위를 무시한 채 혁권은 반사적으로 알란이 줬던 권총을 꺼내 들고 서 있던 이반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로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군.”
그제야 이반이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정말 여기 남아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반군 병사들이 영 마뜩치 않은 듯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걱정하지 마. 저쪽도 일을 망칠 생각은 아닐 테니까.”
인질로 잡고 있긴 해도 필요한 화물을 받기 전에는 절대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할 거란 말이었다.
이반은 반군 쪽을 향해 험악한 눈길을 보내곤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아무쪼록 몸조심 하고 계십쇼.”
“그래. 기다리도록 하지.”
혁권이 부하들과 함께 뒤로 물러서자 그때까지도 영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반이 그제야 수송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쁘게 이륙 준비를 하느라 미처 바깥 상황을 알지 못한 알란이 혼자 탑승하는 이반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탑니까?”
“계획이 바뀌었어.”
“예?”
눈을 껌뻑이는 알란을 지나쳐 가면서 이반이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보스는 함께 안 가고 여기에 남을 거야.”
“그게 무슨…….”
“바로 떠나야 되니까 후방 램프를 닫아.”
“……예.”
묻고 싶은 말은 한가득이었지만 이반의 표정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알란은 심각한 분위기에 묵묵히 지시를 따랐다.
후방 램프 쪽으로 걸어간 알란은 도로 한쪽에 서 있는 혁권과 부하들을 힐끗 쳐다보곤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뻗어 벽면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요란한 기계음이 울리면서 아래로 내려져 있던 후방 램프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위이이잉. 쿵.
이내 양쪽 날개에 달려 있는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가동됐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수송기가 낮에 반군 병사들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치워 놓은 중앙 분리대를 지나 방향을 선회했다.
엔진 뒤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주위에 강한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이륙 준비가 모두 끝나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혁권이 고개를 돌려 압둘 대위를 보며 말했다.
“불을 켜 주시오.”
머리를 끄덕인 압둘 대위는 손에 든 무전기를 입에 대고는 지시를 내렸다.
“시작해.”
그러자 한쪽 끝에 헝겊을 둘둘 말아 기름을 잔뜩 묻힌 횃불을 들고 도로 양옆에 서 있던 반군 병사들이 횃불을 아래로 내려 낮에 파 둔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순간 시뻘건 불길이 확 솟구치더니 안에 넣어 둔 기름에 불이 붙으면서 길게 파 둔 구덩이를 따라 빠르게 번져 갔다.
도로 양쪽에서 일렁거리며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불길은 마치 야간 이착륙을 돕기 위해 공항 활주로에 설치된 유도등처럼 느껴졌다.
설마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줄 생각도 못 했던 이반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 놨을 줄이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알란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면 이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이반은 보조 제트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리면서 말했다.
“그럼 가 볼까.”
모든 엔진을 풀로 가동시킨 수송기는 이내 쭉 뻗은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 나가더니 육중한 기체가 시커먼 하늘로 솟아올랐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없이 이륙에 성공하자 혁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Baby, this is what you came for lightning strikes every time she moves and everybody’s watching her but she’s looking at you oh, oh, you oh oh…….
핸드폰으로 틀어 놓은 노래를 입으로 함께 흥얼거리며 소현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짧은 트레이닝팬츠 아래로 길게 쭉 뻗은 다리를 반으로 접고, 발가락 사이에는 분홍색 쿠션을 끼운 채 미간을 모으고 집중하는 얼굴 표정이 마치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과도 같았다.
“오오, 잘됐어.”
말끔하게 잘 발린 발톱을 보고 소현이 웃으면서 기뻐했다.
혼자 패디큐어를 바르면 항상 오른쪽은 잘되지만 왼쪽은 삐뚤삐뚤하게 되기 일쑤인데 오늘은 집중력을 발휘한 덕분인지 기포도 안 생기고 예쁘게 발렸다.
“이 정도면 숍에 안 가도 되겠는걸.”
손톱은 눈에 안 띄게 얌전한 색깔을 바르더라도 발톱만은 화려하게 하는 것이 더 예쁜지라 밝은 하늘빛에 반짝거리는 글리터까지 올렸더니 꼭 지중해의 바다를 발에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네일이 마르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라도 하려고 손을 뻗는데,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혁권의 이름을 보고 소현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좀 있으면 돌아올 것 같다더니 벌써 공항인 걸까.
아니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면서 잠시 전화를 건 걸지도 몰랐다.
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거리는 입가를 손으로 꾹꾹 눌러 내렸다.
-아. 잘 지냈어?
“얼마 전에도 연락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저 오늘은 집에서 쉬는 날이에요.”
-그렇군.
그러고 잠시 말이 없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왜 그러는데요?”
-그게…… 아, 미안해서 말을 못 하겠어.
끄응, 하면서 곤란해하는 표정에 눈에 잡힐 듯 선했다.
“뭔데요. 일단 말해 봐요.”
덩달아 약간 심각해진 소현이 자세를 바로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고쳐 쥐었다.
-한국에 금방 돌아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네에?”
-일이 그렇게 됐어.
어딘가에 털썩 주저앉은 듯 의자 쿠션이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낮은 한숨이 귓가를 간질였다.
-설마 일정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죠?”
-음, 약간 해결해야 될 일이 생겨서…… 말로 설명하긴 좀 그래.
자세한 사정을 밝히기는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전화로 이것저것 길게 대화하는 게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아쉬운 감정을 삼키고 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안해. 많이 실망했지?
“전혀 아닌데요. 누가 매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줄만 아나.”
-괜히 기대만 시킨 것 같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하지 말 걸 그랬어.
그가 후회하는 것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 기대는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건 그거 나름대로 또 상처잖아…….
“흥.”
소현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말했다.
“어쨌든 난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까 오빠도 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돌아와요. 알겠죠?”
-응, 고마워.
이해해 줘서 다행이라는 것처럼 안도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차마 풀 죽은 기색을 보일 수 없었던 소현은 일부러 딱 부러지게 얘기하곤 짧은 작별 인사로 통화를 끝냈다.
“휴우.”
노랫소리도 끊겨 갑자기 적막해진 방 안에 소현의 한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엄청 우울해졌다.
인터넷 창을 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간 소현은 뮤지컬 표를 2장 예매해 둔 것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결국 이건 못 보게 됐네.”
혁권이 돌아올 날짜에 맞춰 넉넉하게 미리 예매해 둔 것인데 이젠 무용지물이었다.
기껏 좋은 자리를 잡은 것이 아까워 다른 친구를 부를까 하다가 소현은 그냥 예매 취소 버튼을 눌렀다.
혁권과 함께하려고 관람평까지 찾아보면서 골라 둔 작품을 다른 사람과 보려니 어쩐지 영 내키질 않았다.
“그래, 일이니까~. 뭐 어쩌겠어.”
하지만 혼자 중얼거리는 말과는 달리 소현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우울하게 만들다니.
속으로 원망하면서 꼬물거리는 발가락에 아까 발라 놓은 페디큐어만이 제 주인의 맘도 모르고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어두운 방 안, 탁자 위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의 액정이 혼자 밝은 빛을 내뿜고 있다가 금방 사라졌다.
혁권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담배 끄트머리에서 붉은 불꽃이 치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작은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실내에 혼자 앉아 있던 혁권은 일어나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한쪽 손으로 커튼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자 바깥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불을 꺼 둔 객실 안은 어두웠지만 호텔 밖 하늘은 마치 석양이 지는 것처럼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도시 북쪽에 위치한 취수장을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화염만 보이는 게 아니고 둔중한 폭음이 은은하게 들리는 걸로 볼 때 전투가 도시 전체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터키가 지상군을 투입해 IS를 압박하는 동안 골칫거리였던 이들리브 지역의 반군을 소탕하고 동북부 유전 지대를 탈환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정부군의 계획대로 된다면 반군 세력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를 무너뜨려 내전을 보다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유 수출로 바닥난 재정을 메꾸고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여긴 지옥으로 변하겠군.”
예전에 알레포에서 봤던 참혹한 광경을 떠올리며 혁권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