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98
398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마침내 도착한 혁권이 유리문을 열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잠시 기다리던 사이에도 몇 명이 말을 걸거나 제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고 간지라 소현은 엄청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아예 나 기분 안 좋음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써 놓은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소현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아뇨,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사실은 혁권이 조금 일찍 와서 기다려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괜히 애꿎은 그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도 커피? 가끔은 다른 것도 좀 마셔 봐요.”
“커피 전문점에 와서 커피를 마시지 말란 소리야?”
“다양성을 추구해 보라는 거죠.”
“으음. 그럼 차 종류로 해 볼까?”
주문받는 카운터 위의 메뉴를 한참 쳐다보던 혁권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티를 골랐다.
“나는 얼 그레이 티에 우유를 타 먹는 게 좋던데…….”
“사실 홍차는 잘 몰라.”
“그럼 왜 골랐어요?”
“그냥 이름이 멋있어 보이니까?”
참으로 남자다운 단순한 이유였다.
티백이 우러나는 동안 혁권은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오디션도 끝났으니까 한동안은 여유가 있겠네?”
“응. 스케줄을 다 비워 놔서 이번 달은 완전 백수예요. 한창 바쁠 땐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었는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까 뭘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 참 이상하죠.”
“평소에 하지 못했던 걸 하는 건 어때?”
“예를 들면?”
“취미 활동이라든가…….”
“딱히 없는데. 그냥 오빠가 나 책임져 주면 안 되나?”
오늘은 어쩐지 어리광 부리고 싶은 기분인 듯, 평소보다 애교를 많이 부리는 소현이었다.
“그럼 나야 고맙지. 뭐 하고 싶어? 말만 해.”
“음~.”
빨대를 한쪽 손으로 잡고 잠시 생각하던 소현은 이내 앞에 앉아 있는 혁권을 보면서 말했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바다?”
“응. 동해에 일출 뜨는 게 그렇게 예쁘다 하더라고요. 왜, 새해 되면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그렇지.”
“나도 꼭 한 번은 직접 보고 싶었는데, 딱히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소현이 말했다.
뜬금없는 바다 타령에 잠시 당황하던 혁권은 별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동안 제 입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느라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많이 힘들었을 터였다.
“그래. 가자.”
“정말요?”
그렇게 쉽게 가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소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봤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어차피 차 타고 가면 금방이야.”
“하지만 내일 회사는 어쩌고요?”
가까운 서해 바다도 아니고 동해까지 가서 일출을 구경하려면 아무리 빨리 다녀온다고 해도 내일 하루는 출근을 하지 못할 터였다.
“상관없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혁권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미안한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에이. 그냥 다음에 가요.”
“생각났을 때 가야지. 참으면 병 걸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러니까 내일 일정 전부 취소시켜.”
“오빠!”
소현이 깜짝 놀라 그를 불렀지만 혁권은 그대로 통화를 끝냈다.
“들었지.”
“어휴. 정말 못 말린다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다지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강원도에 가서 맛있는 회를 먹으면 되겠네.”
“마음대로 해요.”
이내 소현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뒤 두 사람은 혁권의 애마인 벤틀리 콘티넨탈 GT 스피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렸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맛있는 군것질을 하거나 쉬면서 천천히 움직였지만, 목적지인 정동진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어둠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해가 뜨는 일출 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그는 소현을 데리고 식당부터 들어갔다.
모듬회에 대게찜까지 푸짐하게 시켜 놓고 배를 채운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바로 앞에 있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운데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해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파도소리를 들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바다를 마주 보며 세워 둔 차 안에 들어가서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고는 편한 자세로 그동안 자주 하지 못했던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해가 떠오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나가자 새벽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어왔다.
조금 추워하는 것 같아 보이자 혁권이 윗도리를 벗어 소현의 어깨에 걸쳐 줬다.
“괜찮아요.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네가 와서 간호해 주면 되잖아.”
“뭐요?”
“하하하. 농담이야.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있어.”
“그래도…….”
“이러다가 해 뜨는 걸 놓치겠다. 어서 가자.”
미안한 마음에 말끝을 흐리던 소현은 혁권이 한쪽 팔을 잡고 해변으로 걸음을 옮기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따라갔다.
정동진 기차역을 지나 해변으로 내려가자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말고도 일출을 보려고 모여든 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멀리 유람선 모양의 리조트가 환한 불빛을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끝없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제일 좋은 자리에 서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봤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어서 일출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어쩌면 일출보다는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과 추억이 더 소중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것 같더니 낮게 깔려 있는 구름 위로 붉은 기운이 주위의 어둠을 밀어냈다.
그걸 본 소현은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출을 보기 힘들 것 같죠.”
“오늘 못 보면 다음에 또 와서 기다리면 되지. 안 그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히잉.”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소현이 귀여운지 그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떴다. 떴어!”
얼른 고개를 들어서 앞으로 바라보자 구름 사이로 시뻘건 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채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우와!”
두 사람 역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장엄한 광경에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위로 이글거리면서 떠오르는 태양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세차게 뛰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
“그래.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동안 일출을 바라보던 소현이 고개를 돌려 혁권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 사랑해요?”
태양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부끄러운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소현의 얼굴 또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결에 머리칼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혁권은 말했다.
“그럼 이 세상 무엇하고도 널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나도 그래요.”
시선이 마주친 소현이 가만히 눈을 감았고 혁권이 얼굴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찬란한 일출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근처 식당으로 가서 유명한 초당순두부로 아침을 먹은 두 사람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차를 탔다.
“잠을 한숨도 못 잤는데 서울까지 운전할 수 있겠어요?”
“괜찮아. 이렇게 옆에 상큼한 피로 회복제가 있잖아.”
“아이 참. 장난치지 말고요.”
그러자 혁권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가다가 정 피곤하면 휴게소에 잠깐 차를 세워 놓고 쉬면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무리하지 말고 졸음이 오면 꼭 이야기해요.”
“알았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한 혁권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 소현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소현은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지?”
“누군데?”
“메니지먼트사 실장님요.”
“무슨 급한 일인지도 모르니까 받아 봐.”
혁권의 말에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소현 씨. 나 정 실장인데 지금 통화 가능해?
“네. 괜찮아요.”
-방금 전에 DBC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었어.
“방송국에서요? 혹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자 옆에 있는 혁권한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정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소현 씨를 뽑기로 했대. 이 주 뒤부터 촬영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있으래.
“정말이에요!”
-그래. 내가 왜 이런 걸로 장난을 치겠어.
생각지도 못했던 희소식에 소현은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다 정 실장님 덕분이에요.”
-나보다는 소현 씨가 고생이 많았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거 알지?
“그럼요.”
-생소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겠지만 처음 모델로 데뷔했을 때를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명심할게요.”
-소현 씨라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정 실장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든든했다.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하면서 쌓아 올린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괜히 허튼소리로 바람을 넣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지금 집이야?
“아뇨. 머리도 식힐 겸 잠깐 지방에 내려와 있어요.”
굳이 누구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런, 곤란한데. 앞으로 일정에 대해서 상의하고 싶거든.
“꼭 오늘 해야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빠를수록 좋지.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에게 오니까. 그리고 전화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말하고 싶고.
그 말에는 소현도 동의했다.
-그럼 언제쯤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야?
정 실장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혁권을 쳐다보았다.
“늦어도 4시간 안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어.”
스마트폰 너머의 상대에겐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가 속닥였다.
“오늘 오후면 가능할 거 같아요.”
-그래, 잘됐다.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사무실에 들렀다 가.
“네. 그렇게 할게요.”
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혁권이 물었다.
“오디션 결과가 나왔다고?”
“응. 뽑혔어요!”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으나 가깝게 붙어 있으니 절로 통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굳이 소현에게 다시 물어본 것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잘됐다.”
혁권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것 봐, 일부러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잖아.”
“일출을 보면서 좋은 기운을 받은 덕이다, 뭐 그런 말이에요?”
“원래 마음을 비워야 행운이 깃드는 법이거든.”
하긴 혁권이 아니었으면 오디션 결과 때문에 신경 쓰느라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을 게 뻔했다.
“하긴, 오빠 이론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저 지금 무척 행복한 기분이거든요.”
그러면서 소현은 혁권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엄청 졸린 것만 빼면 다 완벽한데 말이죠.”
후암, 크게 하품을 하자 혁권이 웃어 버리는 바람에 몸이 흔들렸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한숨 자. 우리 공주님은 내가 알아서 모셔다 드리죠.”
“어머, 고마워요. 우리 기사님 팁은 안 드려도 되려나?”
“볼에 키스 한 번은 어때?”
“그 정도야.”
소현은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그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댔다가 떼었다.
어린애가 하는 것처럼 가벼운 장난 같은 키스였으나 혁권은 그것만으로도 잔뜩 배부른 기분이 되었다.
“슬슬 가 볼까.”
혁권은 통화하는 동안 꺼 뒀던 시동을 다시 걸고는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