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00
400
그 정도 숫자라면 국정원에서 한꺼번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 나라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고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홍콩, 마카오까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기에 더욱 문제가 많았다.
그렇다고 하나씩 정리를 하려고 했다가는 상대가 눈치를 채고 꼬리 자르기를 해 버릴 가능성이 컸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표현구 원장이 고심에 찬 얼굴로 의자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자 도병진 3차장이 의견을 하나 제시했다.
“현지 정보기관하고 CIA와 합동 작전을 펼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세히 이야기를 해 봐.”
관심을 보이자 도병진 3차장이 표현구 원장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대량 살상 무기 확산, 달러 위폐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하는 CIA인 데다 해당 국가 정보기관들도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북한의 행태가 거슬릴 테니, 저희가 요청을 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선수를 쳐서 모조리 다 일망타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조를 하자, 이거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자신들만으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차라리 다른 정보기관들과 함께 움직이면 훨씬 수월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던 표현구 원장은 고개를 들어 좌우에 있는 부하 직원들을 둘러봤다.
“도 차장의 의견에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여러 곳이 관여하게 되면 정보가 중간에 새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런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다고 봅니다.”
의견이 서로 갈렸지만 대체적으로 찬성이 우세했다.
표현구 원장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바로 결정을 내렸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혼자 처리를 하려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공조를 하도록 하지. 백 차장.”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정선 1차장이 고개를 돌려 표현구 원장을 봤다.
“자네가 외국 정보기관에 줄이 많으니까 은밀하게 의사 타진을 해 봐. 물론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가지고 있는 패를 다 까 보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백정선 1차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건 이렇게 처리하고…….”
말끝을 살짝 흐리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 표현구 원장은 심인성한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보고서를 읽어 보니 정보 제공자가 김혁권이라고?”
“그렇습니다.”
“리비아 채권 문제를 해결한 그 김혁권하고 동일 인물이 맞나?”
“네.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굵직굵직한 일마다 계속 이름이 거론되는 것 같은데……. 아주 흥미롭군.”
그러자 도병진 3차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CIA하고도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암시장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광물 업체를 소유한 기업가이기도 하고요.”
“백 차장, 자네도 이자를 알고 있나?”
시선을 받은 백정선 1차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희도 리스트에 올리고 주시하던 인물입니다.”
“그렇구먼.”
가끔씩 불필요한 일에 휘말려 구설수에 오르기는 해도 국정원 역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정보기관이었기에, 혁권의 존재는 예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국익에 해를 끼친 적이 없고, 오히려 리비아 채권 회수와 이번 일처럼 도움이 되고 있었기에 그냥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는 거였다.
“대기업 종합상사 직원이었다는 이력도 그렇고, 아주 흥미로워. 제법 똘똘한 놈 같은데 이번 기회에 아예 우리 정보원으로 포섭하는 건 어때?”
“그건 저보다 김혁권과 직접 접촉을 한 심 팀장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도병진 3차장이 대답을 넘기자 심인성은 약간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거절할 겁니다.”
“왜지? 아까 CIA하고도 연관이 있다고 했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도 필요할 때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일 뿐 그 이상 깊은 관계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몇 번 함께 일할 걸 넌지시 운을 띄웠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습니다.”
“독고다이 스타일인가 보군.”
“괜히 묶어 두려고 한다면 아예 저희하고 연결 끈을 끊어 버리려고 할 테니, 그냥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표현구 원장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괜히 쓸 만한 조력자를 잃으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김혁권은 지금까지처럼 심 팀장이 알아서 관리하도록 해.”
“옛.”
“그러면 대충 다 정리된 것 같으니까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표현구 원장은 참석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회의실을 나갔다.
“아, 그러고 보니 말씀드릴 게 있어요.”
찌개를 뜨면서 혁권이 운을 띄웠다.
원래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는 아버지도 요즘은 슬슬 택시를 운행하는 시간을 줄이려는지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덕분에 모처럼 가족 셋이 다 같이 모인 자리라 마침 말을 꺼내기에 좋은 타이밍이었다.
“저 나가서 살 집 정했습니다.”
“벌써?”
아버지를 위해 고등어 뼈를 발라 주시던 어머니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어디니, 여기서 가까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으면 좋겠는데…….”
“차를 타야 되지만 그렇게 많이 멀진 않아요.”
“부동산 계약할 땐 조심해야 한다. 어제도 뉴스 보니까 사기꾼이 많다 하더라고.”
어머니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혁권이 혼자 계약해서 사다 준 사실을 까먹은 듯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시간되면 세무서에 가서 등본 같은 것도 꼭 떼어 봐라. 혹시 담보로 걸려 있는 물건일지도 모르잖니.”
“부동산 끼고 했으면 괜찮겠지.”
“그래도 돈이 얼마짜린데, 확실히 하는 게 좋잖아요.”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아버지는 고등어에 간이 짜다며 투덜거리다가 물을 쭉 들이켜곤 말했다.
“그래서 언제 나갈 생각이냐?”
“지금 공사 중이니까 그것만 끝나면 바로요.”
새로 벽지를 도배하는 것뿐이면 하루 만에 끝나지만, 내부를 싹 비우고 전문 업체에 인테리어 시공을 맡겨 놓은 뒤라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는 창문 다 열어 놓고 환기 좀 시키렴.”
“네, 물론이죠.”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늘어놓던 어머니는 아쉽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언제까지 다 큰 자식 끼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막상 보내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허하네.”
“어차피 지금도 매일 얼굴 보고 사는 거 아니잖아.”
“당신은 말을 해도 참, 아들이 집을 나간다는데 섭섭하지도 않아요?”
“아, 말없이 가출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게다가 혁권이 나이면 오히려 늦은 편이지.”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매정하다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혁권을 바라보았다.
“혼자 살면 밥은 잘 챙겨먹을 수 있겠니?”
집에서는 항상 어머니가 차려 주는 걸 먹든가, 아니면 밖에서 사 먹고 들어오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혁권이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못 하시는 듯했다.
“그럼요. 이래 봬도 요리는 꽤 할 줄 아는데…….”
“어머, 정말?”
물론 혁권이 할 줄 아는 거라고 해 봐야 물이랑 재료만 넣고 끓이면 되는 찌개류와 김치볶음밥같이 간단한 음식이 다였다.
그마저도 군 생활 시절, 혹은 외국에서 스스로 끼니를 때워야만 할 때 어쩔 수 없이 익힌 것에 불과해 맛은 보장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다행이구나. 나가 살면 제대로 밥을 안 해 먹을까 봐 반찬 몇 개 좀 싸 가서 냉장고에 넣어 주려 했는데…….”
“에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매일 집에 붙어 있을 것도 아니라 주시면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텐데, 아깝잖아요.”
“그래도 필요하면 집에 꼭 연락하렴.”
“예.”
유독 이것저것 챙겨 주려고 하는 어머니가 고마워 혁권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버지니아 주 랭리Langley.
개인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러셀 CIA 국장은 갑자기 찾아온 해리스 동아시아 담당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보고드릴 것이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마침 좀 쉬려고 했던 참이니 그리 앉도록 해.”
“감사합니다.”
해리스가 사무실 한쪽에 위치한 소파로 가서 앉자 러셀 국장은 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시겠나?”
“괜찮습니다.”
“그래. 난 한 잔 마셔야 되겠어.”
책상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커피를 시킨 러셀 국장은 윗도리 단추를 풀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국회 예산 심사를 준비해야 돼서 이것저것 살펴볼 게 많아.”
“이번에도 나바로 상임의원이 깐깐하게 구는 겁니까?”
“그자야 예전부터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이잖나.”
“하긴 지난번에도 의회의 감시를 받지 않는 비밀 예산을 대폭 삭감시키고 그랬었지요.”
“맞아.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되는 정보기관에 예산 사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야.”
작년에 의회로 불려 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걸 떠올린 러셀 국장은 눈가를 찡그리면서 불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면 저희가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는지 다 알려 주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다.”
“내 이야기가 그거야. 하여튼 의회에 앉아서 호통이나 칠 줄 알았지 현실을 모른다니까.”
여비서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오자 잠시 대화를 멈춘 러셀 국장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집어 들면서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건 그렇고 보고할 것이 뭔가?”
자세를 바로 한 해리스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선을 통해 한국에서 함께 공조를 해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한국이라면 국정원을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쪽하고 같이 움직일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
“슈퍼노트에 관련된 겁니다.”
슈퍼노트Super note라는 말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러셀 국장의 표정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슈퍼노트라고 했나!”
“네.”
슈퍼노트란 진짜 화폐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미화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가리키는 거였다.
감별기로도 걸러지지 않을 만큼 감쪽같았기에 은행에서도 위폐인지 모르고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달러의 기축통화基軸通貨 지위를 위협하는 물건이었기에 미국 정부에서 상당히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였다.
오죽 피해가 심각했으면 90년대 여러 종류의 슈퍼노트가 기승을 부리자, 68년 만에 100달러짜리 지폐 도안을 바꿔 버렸을 정도였다.
“자세히 이야기를 해 봐.”
러셀 국장은 어느새 찻잔을 내려놓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북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슈퍼노트를 은밀히 유통시키는 루트를 국정원이 잡아냈다고 합니다.”
“확실한 정보야?”
“네.”
시선을 받은 해리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자, 러셀 국장은 턱을 매만지며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북한이라면 오래전부터 슈퍼노트를 대량으로 제작해 유통시키는 걸로 미국 정부에서 의심을 하던 곳이었다.
슈퍼노트 정도의 정밀함을 가진 위폐를 만들려면, 장비는 물론이고 재료와 인쇄 기술 수준이 개인이나 범죄 집단에서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적인 역량이 모였을 때나 가능한 일인 데다 실제로 북한 인사들이 슈퍼노트를 쓰다가 체포된 사례가 종종 있었기에 더욱 혐의가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