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18
418
다음 날 약속대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에서 지급 요구를 받은 채권을 전부 결제해 주자 혁권은 사전에 합의한 비율에 따라 즉시 돈을 분배했다.
“흐음.”
L&S 코퍼레이션에서 제시한 자산 운영 플랜을 천천히 살펴본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스텐저 변호사를 봤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군요.”
“고객분들 대부분이 저희 로펌의 서비스에 만족해하시니 존슨 씨께서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솔직히 수익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자금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고 은밀하게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하고 있는 사업의 특성상 자금의 출처와 움직임을 드러내 놓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걸 다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상당히 번거롭고 쉽지가 않았다.
L&S 코퍼레이션을 이용한다면 꽤 많은 수수료가 나가더라도 그런 부분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점만큼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다 좋은데 만약에 L&S 코퍼레이션의 내부 정보가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자금 운용 내역이 훤히 다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스텐저 변호사가 자신 있는 태도로 대답했다.
“고객 정보에 대해서는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으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사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정보를 암호화시켜서 쉽게 알아보지 못하게 해 놓은 데다 일정 기간마다 폐기 처분시키기 때문에, 피해가 있더라도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그 외에도 다 말씀을 드리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대비책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스텐저 씨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믿어 보도록 하지요.”
“그러면 저희한테 자금을 맡기시는 겁니까?”
“이번 재판을 잘 마무리 지어 준 것도 있으니 우선 내 몫으로 들어온 돈 가운데 1억 달러를 맡겨 보도록 하지요.”
1억 달러도 엄청나게 큰 액수였지만 향후 더 많은 돈을 맡길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자 스텐저 변호사는 반색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계약서를 쓰도록 합시다.”
미적거리지 않고 혁권이 시원하게 이야기를 하자 스텐저 변호사는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계약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송금까지 일사천리로 끝낸 혁권은 미소 띤 얼굴로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계좌에 돈이 크게 불어나 있기를 기대하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웃으며 악수를 나눈 스텐저 변호사는 얼마 있지 않아 인사를 하고 호텔 객실을 나갔다.
“몇 시나 됐지?”
옆에 있던 하킴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대답했다.
“이제 막 오후 2시가 넘었습니다.”
“조금 더 쉬었다가 공항으로 가면 되겠군.”
“예.”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습관처럼 소현이 선물해 줬던 담배 케이스를 꺼내려고 할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야.”
-함단입니다, 보스.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말씀하신 물건들을 다 준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격은?”
-650만 달러를 부르는데 좀 더 이야기를 하면 600만 달러 정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적당하군. 그런데 루마니아에서 리비아까지 운송하는 것이 문제군.”
탄약을 비롯한 기타 군수품들은 수송기를 가지고 바로 트리폴리까지 실어 나를 수 있었지만, 전차는 차체 무게만 수십 톤에 육박했기에 불가능했다.
육상 운송 역시 어려웠기에 배를 이용해서 가져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국경을 통과하는 문제가 걸렸다.
무기는 이동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물품인 데다 합법적인 거래도 아니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그러자 함단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건 따로 방법을 생각해 뒀습니다.
“어떻게 하려고?”
-전차를 분해해서 컨테이너에 넣어 고철이라고 속여 아테네까지 가져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트리폴리로 가져가는 화물선 안에서 다시 조립을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한 방법에 혁권은 손에 쥔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컨테이너를 열고 조사를 하면 뭔지 바로 발각될 텐데 괜찮겠어?”
-갈라치Galati에서 화물 열차에 실어서 보내면 이동 중에 별다른 세관 검사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관리들한테 뇌물을 좀 쥐여 주면 화차Wagon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겁니다.
“번거롭게 그러는 것보다 아예 갈라치에서 배로 화물을 실어 트리폴리까지 가져가는 건 어때?”
루마니아군의 잉여 장비 보관 창고가 있는 갈라치는 내륙에 위치해 있었지만, 도나우 강을 통해 바로 흑해하고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스탄불을 지나 따로 국경 세관을 통과할 필요 없이 곧장 트리폴리로 갈 수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이긴 합니다만, 최근 터키에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마르마라 해를 지나는 선박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어서 위험부담이 더 큽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함단의 말대로라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현지에 있는 자네가 분위기를 더 잘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처리하고 진행 상황을 계속 보고하도록 해.”
-예.
통화를 끝낸 혁권은 잠시 뒤 부하들과 함께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일반 여객기 대신 임대한 걸프스트림Gulfstream G-550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으음.”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볕에 김성균 사장이 몸을 뒤척이면서 눈을 떴다.
새벽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묵직하게 무거웠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협탁에 풀어 둔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나 있었다.
하루를 출근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 버렸지만 자신이 회사 사장이었기에 김성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손주아가 알몸으로 침대 시트를 살짝 끌어당겨 가슴을 가리면서 일어났다.
“일어나셨어요.”
금방 잠에서 깨어나 정돈이 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화장을 했을 때와 다른 요염한 색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모델답게 시트 아래로 보이는 뽀얀 피부와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한 몸매는 남자들의 시선을 저절로 잡아끌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손주아를 잠시 가만히 바라본 김성균은 시트를 걷고 팬티만 입은 채 침대에서 나갔다.
작은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서는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한 냉수가 들어가자 무거운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방 한쪽에 있는 가죽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을 때 얇은 시트를 몸에 두르고 다가온 손주아가 라이터 불을 켜서 앞으로 내밀었다.
“…….”
힐끗 손주아를 쳐다본 김성균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몸을 뒤로 기댔다.
시트로 가렸지만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볕에 육감적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상당히 섹시했다.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손주아의 몸을 훑어 내린 김성균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러자 손주아가 눈을 반짝이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손주아라고 해요.”
“이름이 예쁘군.”
“감사합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김성균은 한쪽에 있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들어 있던 수표를 서너 장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내가 따로 챙겨 주는 거니까 받아.”
“네.”
건네받은 수표는 전부 100만 원짜리였다.
한쪽 손에 수표를 말아 쥔 채 손주아가 서 있자 김성균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봐.”
너무나 냉담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손주아가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몸에 두른 시트를 내려놓자 알맞게 굴곡진 여성의 나체가 드러났으나 김성균은 거기에 힐끔 시선을 주었을 뿐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손주아가 벗어 던진 옷가지를 다시 주워 입는 동안, 그는 여전히 앉은 자세로 느릿하게 담배를 피웠다.
“가 볼게요.”
“그래.”
달칵 소리와 함께 손주아가 방을 나가자, 5분 정도 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김성균은 그제야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방 안으로 들어서는 고동욱 실장을 향해 말했다.
“방금 나간 애, 괜찮군.”
어지간한 여자는 하룻밤 안는 것만으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김성균의 입에서 이 정도 칭찬이 나왔다는 건 꽤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나 다름없었다.
“따로 관리를 할까요?”
“그렇게 해.”
툭 내뱉듯 말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난 김성균은 몸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시내에 위치한 특급 호텔 레스토랑 별실에 고동욱 실장과 손주아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연락을 받고 나온 손주아는 초조한 얼굴로 고동욱 실장의 눈치를 살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차를 가져온 종업원이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밖으로 나가자 고동욱 실장이 손주아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손주아 씨.”
“예. 옛.”
“좋은 일로 온 거니까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네.”
고동욱 실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사장님께서 손주아 씨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후원을 해 주시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들은 손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스폰을 해 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러자 고동욱 실장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후원을 해 주시는 겁니다.”
선의를 베푸시는 건데 그런 단어는 부적절하군요, 하고 고동욱 실장이 사뭇 딱딱한 말투로 내뱉자 손주아는 위축된 태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괜히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말을 조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예.”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고동욱 실장이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연예계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원을 받게 될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손주아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 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기회가 온 거였다.
그것도 단번에 신분을 상승시켜 줄 수 있는 황금 동아줄이었다.
고민을 하고 말 것도 없었던 손주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서둘러 대답했다.
“하, 할게요.”
고동욱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손주아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뭐죠?”
“사장님께서 드리는 겁니다.”
봉투를 열어 보자 100만 원짜리 수표 10장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정도면 한 달 생활비로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이건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 카드키입니다. 비어 있는 곳이니까 언제든지 이사를 하면 됩니다.”
눈앞에 있는 수표와 오피스텔 카드키에 손주아는 자신이 스폰서를 제대로 잡았다는 걸 실감했다.
“다른 것이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손주아가 고동욱 실장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뭡니까?”
“광고를 하나 찍고 싶은데…… 안 될까요?”
“광고라고요?”
고동욱 실장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자 손주아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울츠라는 패션 브랜드 메인 광고 모델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시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주제도 모르고 태일건설 아파트 브랜드 광고 모델을 시켜 달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뭐, 생각해 보죠.”
“꼭 부탁드릴게요.”
손주아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 목소리에 제법 절박한 감정이 담겨 있어, 고동욱 실장은 무슨 이유라도 있나 싶었다.
일순 호기심이 일긴 했으나 거기까지 참견할 생각은 없는지라 그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원래 자기 자리였던 울츠 모델을 빼앗아가 굴욕감을 준 소현한테 복수를 할 생각에 손주아는 몰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