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2
42
쌍안경을 꺼내 상대를 자세히 살핀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픽업트럭 한쪽에 꽂혀 펄럭이는 건 투부족 민병대의 깃발이었다.
-어떡합니까?
선두에 선 자말도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물었지만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를 무시하고 이대로 달아나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추격전이 벌어지면 불리한 건 이쪽인 데다 그 과정에서 차량들이 낙오하거나 망가질 수 있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는 일단 차를 멈추고 대화로 일을 풀어 보기로 했다.
기껏 여기까지 운반해 온 차량을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적당히 뇌물을 찔러 주고 운 좋게 넘어가는 상황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기왕이면 희망적인 쪽에 기대를 걸어 보자며 그렇게 속으로 되뇐 혁권은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다들 차를 세워!”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자말의 물음에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최대한 말로 좋게 풀어 보는 수밖에.”
-괜찮을까요?
우려를 나타냈지만 혁권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부딪쳐 봐야지.”
-후우. 알겠습니다.
“대신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대응할 수 있게 단단히 준비를 해 둬.”
-옛.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강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행렬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천천히 멈춰 섰다.
혁권은 가지고 있던 글록 권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하고는 다시 허리 뒤에 꽂아 넣고 셔츠로 가렸다.
그리고 작게 숨을 몰아쉬고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한낮의 후덥지근한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혁권은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민병대를 가만히 노려봤다.
자말을 비롯한 부하들 역시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하고선 그를 보호하듯이 나란히 섰다.
“함단은?”
“뒤편 트럭에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있습니다.”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멈춰 선 트럭 아래에 함단이 직접 기관총을 잡고 엎드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봐서 그렇지 트럭 밑이 낮은 데다 다른 차량들로 교묘히 시야를 가리고 있어 자세히 확인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것 말고도 운전수들 역시 모두 자동차에서 내려 여차하면 공격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모습에 혁권은 불안감을 떨쳐 내고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옵니다.”
자말이 짧게 말했다.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숨긴 허리 뒤춤을 손으로 더듬으며 다시 얼굴을 굳혔다.
투부족 민병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차량을 멈췄다.
그러고는 총기로 무장한 민병대 열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매부리코에 얇은 입술,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한눈에 봐도 상당히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검은 피부색 때문에 유난히 도드라지는 흰 눈자위를 부릅뜬 채 이리저리 쳐다보는 행동은 상당한 위압감을 줬다.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어 지휘관으로 보이는 흑인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다가오더니 혁권한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당신이 책임자인가?”
아랍어에 자말이 얼른 통역을 해 줬다.
“그렇습니다.”
너무 숙이고 들어가면 상대가 깔볼 수도 있었기에 그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상대는 거만한 시선으로 혁권을 아래위로 쓸어봤다.
“저 차들은 뭐지?”
턱으로 뒤에 있는 차량들을 가리키면서 묻자 그는 긴장하며 대답했다.
“트리폴리로 가져가 팔 중고 자동차입니다.”
눈을 가늘게 뜬 지휘관은 길게 늘어 선 중고차들을 탐욕에 찬 얼굴로 봤다.
불길한 느낌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거 받으시고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이야기를 하며 주머니에서 동그랗게 말아 고무줄로 묶은 달러 뭉치를 꺼냈다.
2천 달러였는데 현지 사정을 감안하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콧방귀를 뀌면서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감히 투부족 전사들을 매수하려고 들어!”
거센 말투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뒤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 민병대 대원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탐욕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혁권은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옆에 있던 자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충돌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혁권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마주 보고 선 인원들 외에도 픽업트럭 세 대에 다섯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화물칸 위에 장착된 기관총을 잡고 있었다.
만약 제때 제거를 하지 못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군이 인원수도 많고 기관총 역시 두 정이나 가지고 있었지만 투부족 민병대와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품인 중고 차량을 안전하게 트리폴리까지 가져가서 이익을 남겨야 했기에 전투가 벌어지면 최대한 빨리 상대를 제압해야 됐다.
그렇게 혁권이 속으로 상대를 가늠해 보고 있을 때 민병대 지휘관의 말이 이어졌다.
“이 차량들은 우리가 모두 압수를 하겠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그는 바로 정색을 하며 반발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으름장을 놨다.
“웃기는군.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익.
혁권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지휘관은 뒤에 늘어서 있는 민병대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 차에서 다 내리게 해!”
“예.”
지시를 받은 민병대 대원들이 움직이는 순간 그가 숨겨 둔 권총을 빼 들며 소리쳤다.
“다 쓸어 버려!”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싸움을 각오하고 있던 자말과 부하들은 지체 없이 각자 무기를 꺼내 마구 갈겨 댔다.
타타탕! 타탕! 탕!
“우웩!”
“크악.”
최초로 그가 쏜 총탄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협박하던 적 지휘관이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뒤에 있던 민병대 대원들도 기습적으로 벌어진 총격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쏴!”
대부분 방아쇠를 당겨 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붉은 피로 메마른 사막을 적셨다.
운 좋게 총격을 피한 적들이 곧장 반격을 해 왔다.
투타타타탕!
퍼퍽! 퍽!
요란한 총성과 함께 바닥 모래가 솟구치자 혁권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숙이고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픽업트럭에 장착된 적 기관총이었다.
AK 소총과는 다른 묵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에 아군 용병 서너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춤을 추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널브러졌다.
그 모습을 본 혁권은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적 기관총이 계속 살아 있으면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을 끝내려는 그의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비 오듯 총탄을 쏴 대는 기관총 때문에 그는 물론이고 아군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탁 트인 벌판이라 엄폐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기관총 사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방법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기관총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기관총부터 처리해!”
악을 쓰듯 소리를 친 혁권이 한쪽 무릎을 꿇고 권총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편에서 둔탁한 총성이 들렸다.
타타타탕!
양측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쏘지 못하던 아군 기관총이 드디어 불을 뿜기 시작한 거였다.
투투툭!
불꽃과 함께 자동차 철판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는 섬뜩한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끄악!”
삽시간에 여러 발의 총탄이 몸에 박혀 피투성이가 된 적 기관총 사수는 힘없이 무릎을 꺾으며 화물칸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어서 운전수들도 가지고 있던 총을 쏘며 엄호사격을 퍼붓자 승부의 추는 급격히 아군으로 기울었다.
“히이익!”
마지막으로 남은 한 놈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다가 자말이 쏜 총탄에 피를 뿌리며 그대로 엎어졌다.
그걸로 전투가 종료되자 일순 무거운 정적과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주위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통스러운 신음성과 함께 살려 달라며 호소하는 낮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는 혁권의 눈에 비친 것은 참혹한 현장이었다.
투부족 민병대 복장을 입고 있는 사내들은 대부분 피구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지만,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체 중에는 아군도 꽤 많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서 그게 멀쩡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동료의 차가운 시신 옆에서 핏물이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제 옆구리를 붙잡고 엉엉 우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총알로 너덜너덜해진 다리 한 짝을 질질 끌면서 모래 바닥을 기는 사람도 있었다.
심한 중상을 입은 부상자가 생각보다 더 많아 보이자 혁권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런 혁권의 뒤로 자말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딱히 총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질 않으니 혹시 다리를 삐었거나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난 괜찮아.”
옷을 탁탁 털자 버석버석한 느낌의 모래 알갱이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문제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인 혁권은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자말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보다 저쪽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이나 도와주지그래.”
“예.”
명령을 받은 자말이 부상자들을 추스르며 옮기는 것을 지켜보던 혁권은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끄으…… 큭.”
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것은 바로 민병대 지휘관이었다.
기세등등하던 방금 전 모습과는 달리 피로 흥건한 가슴팍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벌레처럼 살기 위해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혁권은 아직 따끈한 기운이 남은 권총을 움켜쥐고 그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민병대 지휘관이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죽은 생선 눈깔처럼 흐려진 눈동자로 위를 올려다보던 그는 상대방이 혁권인 것을 알아채자 순식간에 흉악한 빛을 띠었다.
본능적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총을 집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옆을 휘저어 봤자 거기엔 모래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혁권은 지휘관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냥하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탕-!
한순간 울려 퍼진 총성에 피 냄새를 맡고 주변을 얼쩡거리던 독수리들이 파드득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언제 또다시 투부족 민병대나 다른 무장 단체와 만날지 몰랐기에 혁권은 차량에 무리가 가는 걸 각오하고 최대한 속도를 높여 사막을 가로질렀다.
다행히 사리르 유전 지대를 벗어나자 다시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 일행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움직이는 강행군을 이어 갔다.
그렇게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날 일행은 목적지인 트리폴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 대나 되는 중고 차량을 끌고 시내로 들어가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기에 트리폴리 외곽에 위치한 통조림 공장으로 갔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추야자를 가공해서 통조림으로 만드는 리비아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 혁명 기간 동안 정부군과 반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폐허가 되고 공장 설비마저 약탈을 당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버려져 흉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