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25
425
트리폴리 항구.
“화물을 트럭에 다 실었습니다.”
뱃머리가 위로 들린 채 좌초된 화물선을 굳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자말은 옆에서 들린 함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서 급히 끌어 모은 트럭 20대에, 컨테이너에서 꺼낸 화물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의의 일격을 받아 화물선이 좌초되기는 했지만 컨테이너를 거의 다 내린 상태였기에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경각심이 높아진 자말은 주변 경계를 더 철저히 하는 것과 동시에 자밀 의장측에서 또 다른 공격을 해오기 전에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비록 일부를 잃기는 했지만 화물을 트리폴리까지 가져와서 부두에 내려놨으니 맡은 일은 다 끝낸 거였다.
정부군 쪽에서도 컨테이너 두 개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화물을 인수받은 에프칸 중위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제 출발할 생각인데 함께 움직일 겁니까?”
그러자 자말이 계속 교전이 진행 중이라 총성이 끊이지 않는 부두 외곽 지역을 힐끗 쳐다보곤 대답했다.
“시내까지만 동행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그럼 바로 이동할 테니 뒤를 잘 따라오십시오.”
“그러지.”
거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부두를 빠져나가야 했기에 교전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에프칸 중위가 이끄는 정부군 병력을 따라가기로 했다.
끌고 온 픽업트럭 세 대에 부하들과 화물선이 좌초되면서 오갈 때가 없어진 선원들을 모두 다 태웠다.
그러자 한쪽에 세워져 있던 T-72전차 두 대가 우르릉대는 거친 엔진 소리를 울리면서 선두에 서서 이동로를 열었다.
그 시각 혁권은 피레에프스 항구 외곽에 위치한 본거지에서 샌더슨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면 정확히 나한테 떨어지는 몫이 뭐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샌더슨은 느긋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샤라빌 대통령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이득일 텐데. 내 말이 틀렸나?
틀린 지적이 아니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건 그거고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될 거 아니요.”
-역시 장사꾼답군. 하긴 나도 이러는 것이 편하니까 쉽게 가도록 하지.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라스라누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받아서 팔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도록 하지. 그 정도면 꽤 짭짤할 거야.
“샤라빌 대통령 측하고는 이야기가 된 거요?”
-지금쯤 우리 요원이 그쪽하고 접촉하고 있을 테니 조만간 결과가 나올 거야.
이야기를 들은 혁권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지 않소?”
-이미 절벽 끝에 몰린 사람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 같나? 오히려 이쪽 제안을 두 손 들고 환영할걸.
“흠…….”
혁권은 수긍하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자밀 의장한테 밀리면 지금까지 누리던 걸 몽땅 다 잃게 될 테니,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라스라누프에서 생산되는 원유 판매권을 전부 나에게 일임하는 거요?”
-물론이야.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고 용병 대금을 지급하려면 당연히 그래야 되지 않겠어.
“배분은 어떻게 하는 거요?”
-원유 판매 대금 가운데 30%를 트리폴리 정부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리비아를 안정화시키는데 사용하는 거지. 그쪽은 원유를 판매하면서 적당히 커미션을 떼어 가고 말이야.
말은 그럴듯했지만 결국 북아프리카 지역의 요충지인 리비아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현지에서 충당하겠다는 꼼수였다.
CIA의 의도를 바로 눈치챘지만 그는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군수품을 조달하면서도 얼마간 이득을 챙길 수 있을 테니 이거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아, 그리고 용병은 이미 구해 놨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어.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혁권은 살짝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에 용병들을 개별로 고용하기는 어려울 테고 민간군사기업(PMC)를 내세울 생각인 거요?”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기에 샌더슨은 감추지 않고 순순히 이야기를 했다.
-맞아. 블랙워터Black Water에 일을 맡겼으니 곧 움직일 거야. 이라크와 예맨 등지에서 일을 처리한 경험이 많으니까 어렵지 않게 반대 세력을 제압해 낼 테니 기대해도 좋아.
“…….”
웃음을 띤 채 말하는 샌더슨과 달리 그는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낮게 침음을 흘렸다.
대표적인 민간군사업체인 블랙워터는 1998년 미국에서 네이비실을 비롯한 특수부대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용병 회사였다.
정규군 수준의 무기와 기갑 차량 그리고 무장 헬기까지 보유해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며 실제로 여러 전장에서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 주면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악명 역시 높았는데, 외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직 의뢰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희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온갖 전쟁 범죄에도 연루되는 많은 비난과 의혹을 받고 있었다.
그런 블랙워터가 트리폴리에 발을 들여놓는다니 꺼림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CIA의 작전이 진행 중이었기에 그가 반대한다고 해서 블랙워터를 이번 일에서 배재시킬 가능성은 아주 낮았기에 차라리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 트리폴리 주민들을 위한 일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입을 뗐다.
“차후에 서로의 입장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최소 2년간은 라스라누프에서 생산되는 원유 판매를 나한테 맡긴다는 샤라빌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공식 문서를 받아야 되겠소.”
어차피 CIA 입장에서는 손해 날 것이 없었기에 샌더슨은 흔쾌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러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확실히 하기 위해서 상대가 마지막으로 묻자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던 혁권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탁월한 선택이야. 그럼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지.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고.
혁권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해가 지면서 들판에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창가에 기대 선 채 안주머니에서 소현이 선물해 준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치이익.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혁권은 일을 하기로 한 이상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생각했다.
한편 예정된 촬영을 모두 끝마친 소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동식 부장을 만나러 개인 스태프들과 함께 소속사로 향했다.
“어? 수나 언니, 아직 퇴근을 안 하고 있었네요?”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소현이 말을 걸자 책상 앞에 앉아 한창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김수나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소현이 왔네. 드라마 촬영은 어때? 할 만해?”
“처음 해 보는 거라 조금 어색하고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재미있어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니까. 연기도 잘할 거야.”
“고마워요, 언니. 그런데 정 부장님은 안 계세요?”
소현의 물음에 김수나가 안쪽 사무실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셔. 들어가 봐.”
“알았어요.”
걸음을 옮긴 소현은 가볍게 노크를 하곤 얼마 전까지 사장실로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전화 통화 중이던 정동식 부장은 그녀를 보고는 한쪽 팔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소파에 앉자 정동식 부장이 전화 상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다시 서류를 만들어서 보내 드리지요.”
직함이 올라간 만큼 상당히 바빠진 듯 약간 지친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는 전화를 끊고 소현에게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다렸지?”
“아뇨. 일이 많으신가 봐요?”
“뭐, 그렇지.”
그는 대충 대답하고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소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말을 꺼낸다.’
정동식 부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방적으로 브랜드 모델에서 제외되다니 프로로서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일일 게 분명했다.
만약 그가 소현의 입장이었어도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정동식 부장은 이렇게 된 김에 사실대로 전부 알려 주기로 했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잠시 말을 골랐다.
“잡지에 실린 울츠 광고를 봤다고?”
정 부장이 말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 소현이 이야기를 했다.
“제가 나온 부분만 다 빠졌더라고요. 혹시 광고 콘셉트가 바뀌기라도 한 거예요?”
“그게 말이야…….”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정동식 부장은 이내 소현을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은 얼마 전에 울츠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그쪽 내부 사정 때문에 모델을 교체하게 됐다고 하더라고.”
“네? 그게 무슨…….”
소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내가 미리 알려 줬어야 되는데 한창 드라마 촬영 중이라 괜히 신경을 쓰이게 할까 봐. 미처 이야기를 못 했어. 미안해.”
정동식 부장이 머리를 숙이면서 사과를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소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써 정신을 차린 소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아니, 갑자기 왜? 혹시 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그러자 정동식 부장이 절대 아니라는 듯이 한쪽 팔을 흔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럼 왜 갑자기 모델을 바꾸려는 거죠?”
하긴 자신도 울츠의 조치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소현이라고 쉽게 납득할 리가 만무했다.
잠시 고심하던 정동식 부장은 이대로 놔두면 자신감을 잃고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에도 악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후우.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 다른 곳에서 하면 안 돼.”
정 부장이 재차 쐐기를 박자 소현은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일단 약속부터 해 줘, 응?”
“……알았어요.”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말을 해 주지 않을 기세였기에 소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윗선에서 새 모델을 꽂아 넣으라고 압력이 들어왔다더군.”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마주 앉아 있는 정동식 부장을 봤다.
“설마…….”
그러자 정동식 부장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짐작하는 것이 맞아. 스폰이 들어온 거지.”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소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니까 울츠 쪽에서도 계약금과 지급한 모델료를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거지. 내가 능력이 없어서 소현 씨한테 정말 미안해.”
실망을 하거나 크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소현은, 자초지정을 알게 되자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부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그런 이유라면 저도 울츠 브랜드 모델에 미련이 없어요.”
“진심이야?”
정 부장의 물음에 소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진짜예요. 이번 드라마로 유명해져서 절 놓친 걸 울츠 브랜드 사람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상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는 모습에 정동식 부장은 안심하며 그때서야 얼굴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많이 걱정했는데, 그런 마음이면 됐어.”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소현이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집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어린애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다른 직원을 시켜서…….”
“괜찮아요. 정 걱정되시면 큰 길에서 택시 타고 갈게요.”
그제야 정 부장은 안심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로 소속사 사무실을 나온 소현은 엘리베이터까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지라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었다.
소현은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바닥을 보면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자, 재빨리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누른 소현은 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정 부장 앞에서는 의연한 척했지만 혼자만 남게 되니 표정이 무너지려고 했다.
“정신 차려야지.”
소현은 두 뺨을 손으로 짝 때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기껏 따낸 모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아직 진 건 아니야.’
소현은 더욱 강해지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