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
44
그 때문에 예전부터 많은 외국계 기업들이 진출해 있었는데 태일물산도 그중 하나였다.
이 지역의 핵심 거점으로 한때 상주 인원만 쉰 명에 달할 정도로 중요한 A급 지사였으나 아랍의 봄 이후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해지면서 역할이 크게 위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다.
리비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직항편이 없어 할 수 없이 혁권은 로마를 거쳐 카이로에 도착했다.
입국장을 나오자 사내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검게 그을렸으나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인이었다.
“김 대리님?”
아니나 다를까 한국말로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반갑습니다. 카이로 지사에서 근무하는 배동주입니다.”
“김혁권이네.”
손을 잡으며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180은 되어 보이는 키에 각진 얼굴을 가진 배동주는 얼른 그가 끌고 나온 캐리어 손잡이를 대신 잡으며 말했다.
“짐은 저한테 주십시오.”
“안 그래도 되네.”
“아랫사람인 제가 해야지요. 일단 나가시죠.”
“그러지.”
캐리어를 잡고 앞서 걸어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짐을 맡기고 뒤를 따라갔다.
싹싹한 태도에 배동주의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치안이 불안했지만 리비아와 달리 카이로 국제공항은 여행객과 사업차 방문한 이들로 상당히 붐볐다.
하지만 곳곳에 중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에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간 일행은 SUV에 짐을 싣고는 바로 공항을 떠났다.
운전을 하며 배동주가 조수석에 앉은 그를 쳐다봤다.
“며칠 전에 검찰총장이 이슬람 극단 세력의 테러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어서 분위기가 조금 안 좋습니다.”
“나도 들었어. IS와 연계된 조직의 소행이라며?”
“예. 시리아 쪽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작년부터 슬금슬금 세력을 넓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대낮에 카이로에서 테러를 벌일 정도로 커져 버렸습니다.”
“정부에서 그걸 그냥 놔두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부에서 강력하게 단속을 하고 있지만 독버섯처럼 빠르게 번지는데 완전히 속수무책인 상황입니다.”
“그렇군.”
혁권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반정부 세력들과 달리 IS는 상당히 과격하고 극단적이었기에 자칫 군부를 중심으로 나름 정권을 잘 유지하고 있는 이집트가 리비아처럼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이고 있었는데 몇 년째 이어진 치안불안으로 국가 경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관광 수입이 크게 감소하고 유가까지 하락해 원유 수출 대금이 줄어들자 정부의 재정 적자가 심화됐다.
거기다 물가 상승과 실업률마저 증가하자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전력마저 부족해져 정전이 수시로 이루어지자 참다못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이집트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야간통행금지까지 실시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은 IS와 같은 이슬람 극단세력이 세력을 급격하게 늘리는 데 밑바탕이 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배동주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리비아는 여기보다 더하다면서요?”
“거긴 정부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세력끼리 흩어져 거의 내전 상태나 마찬가지니까.”
“이런 걸 보면 차라리 독재 정권이 있던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글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배동주의 이야기에 혁권도 동의를 했지만 독재 권력 아래 안정을 택하든 아니면 혼란스러워도 자유를 원하든 그건 이 나라 국민들의 몫이었다.
* 카이로
태일물산 카이로 지사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5층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위상이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총괄하는 곳답게 최상층 전체를 다 임대해서 쓰고 있었는데 현지 고용인을 포함해 직원이 서른 명이나 됐다.
이곳 카이로 지사의 책임자는 올해 마흔한 살인 장덕종 지사장이었다.
직급은 부장으로 해외 지사 경력만 10년이 넘는 베테랑 영업맨이자 조필승 상무이사 라인이었다.
곧 본사 본부장으로 영전되어 갈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승진을 앞두고 자신한테 골칫덩어리가 맡겨진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 부장, 이런 식으로 할 거야!”
-뭐가 또 불만이야?
왜 화를 내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동철 부장이 모르는 척 능청을 떨자 장덕종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김혁권이 말이야! 네놈이 싸지른 똥을 왜 내가 치워야 되는 건데.”
-이봐, 아무리 같은 부장이라고 하지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이것도 많이 참는 거야. 제대로 퍼부어 줄까!”
-끄으응.
한번 뒤집히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라 붙은 별명이 인간불도저였다.
거기다 차진 욕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해 회사 내에서도 일단 말싸움이 붙으면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거 다 빼고서라도 두 사람은 타고 있는 라인이 달라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었으니 세상에 이렇게 상성이 안 맞는 상대도 있을까.
결국 이동철 부장이 택한 것은 달아오른 주전자처럼 펄펄 끓는 장덕종을 살살 달래는 거였다.
-그러지 말고 이번 한 번만 사정을 봐줘.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퉁명스러운 대답에 이동철 부장은 짜증이 났지만 애써 참고는 말했다.
-자네도 이제 그만 밖으로 돌아다니고 본사로 들어와야지 않겠어.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방금 한 이야기는 뭐야!”
바짝 날을 세우는 장덕종과 달리 이동철 부장은 느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조 상무가 자네 뒤를 봐주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 김 이사님이 반대를 하면 승진이 어렵지 않겠어. 좋은 게 좋다고 이번 일을 받아 주면 나도 김 이사님한테 이야기를 잘해 주지.
“으음.”
장덕종은 미간을 모은 채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조필승 상무이사가 물산에서 잔뼈가 굵은 터줏대감이라고 해도 오너 일가인 김인철 이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장덕종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내가 뭘 해 주면 되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
-그냥 놈이 더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사표를 쓰도록 내버려 두면 되네.
차라리 그만두라고 압박하는 게 낮지 무관심한 태도로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만큼 가혹한 일도 없었다.
“자네 참 잔인하군.”
-그만큼 눈치를 줬는데도 아직 붙어 있는 놈이 미련한 거야.
이런 치졸한 일을 도와주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그냥 한번 눈을 딱 감기로 결심했다.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해.”
-물론이야.
통화를 끝낸 장덕종이 착잡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사무실 문이 열렸다.
“지사장님, 이번에 새로 오신 김혁권 대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배동주와 함께 들어온 혁권을 본 장덕종은 한쪽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아.”
“예.”
혁권이 소파에 앉는 사이 안내를 해 준 배동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줬다.
담배를 물고 상석으로 간 장덕종은 한참 동안 가만히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 사고를 치고 쫓겨났다면서?”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일 만했으나 혁권은 전혀 그런 것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반년 넘게 리비아에서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전혀 반성을 안 한 모양이군.”
눈을 치켜뜨며 장덕종이 질책하듯 말하자 고개를 든 혁권은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니니까요.”
“뭐라고!”
“지사장님쯤 되시면 어찌 된 건지 내막을 아시지 않습니까?”
“허어.”
위축이 되기는커녕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장덕종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다 이내 패기인지 아니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고 꼬리 자르기를 한 윗선에 대한 반발심인지는 몰라도 당당한 모습이 조금 마음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오래 보지 않을 사이였기에 장덕종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어찌 됐건 여기에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가도록 해.”
처음 보자마자 딱 선을 긋고 시작하자 혁권은 대충 이럴 거라 짐작은 했어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예.”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장덕종이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이걸로 카이로 지사에서 그가 앞으로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명확해졌다.
여기까지 와서 이동철 부장의 압박에 시달려야 된다는 것이 짜증 났지만 회사 업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사장실을 나온 혁권은 다른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다들 환영하지도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지사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였다.
“오늘은 첫날이니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쉬도록 하게.”
직속상관인 김윤구 총무 과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이, 배동주.”
“예.”
“김 대리가 아직 이 동네에 대해 잘 모를 테니까 자네가 안내해 줘.”
그렇게 말하고 김윤구 과장이 다시 자리에 앉자 배동주가 다가와 혁권의 여행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안 들어 줘도 되는데.”
“에이, 여기까지 힘들게 오셨잖습니까?”
사무실을 벗어나니 갑갑했던 숨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았다.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건 배동주도 마찬가지였는지 짐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는 꽤 싹싹한 태도를 보였다.
구태여 사양할 것 없다며 제법 무거울 여행 가방을 번쩍 들어서 손쉽게 옮기는 것 하며, 180은 될 법한 큼직한 키에 덩치까지 있으니 마치 커다란 대형 개를 보는 듯했다.
“숙소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습니다. 좀 낡긴 했지만, 그럭저럭 살 만은 해요.”
아마 카이로엔 처음일 혁권을 배려해서인지 배동주는 운전을 하는 동안 눈에 띄는 건물이 있으면 이건 뭐다, 저건 뭐다 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도착했습니다.”
배동주의 말에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오래된 10층짜리 아파트가 있었다.
건물 측면에는 비상 통로로 이용되는 철제 계단이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고, 페인트칠을 한 외벽은 보수 처리를 하지 않아 군데군데 벗겨진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면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오른쪽 벽에 있는 우편함이었다.
아직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각종 고지서나 광고물 들이 잔뜩 꽂혀 있는 걸로 보아 숙소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걸 챙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못 되는 모양이었다.
“나 참. 만날 버려도 금방 다시 쌓인다니까요.”
혁권의 시선이 우편함 쪽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더니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고 생각한 듯 배동주가 쑥스럽게 웃으며 광고지들을 한 손에 아무렇게나 그러쥐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두 사람은 504호로 향했다.
한 층에는 총 4개의 집이 있었는데, 2개로 나뉘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