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5
45
열쇠로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간 배동주는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혁권의 여행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자 둘이 살기엔 좀 비좁다 생각하실지 몰라도, 살다 보면 어떻게든 적응되실 겁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급하게 나가느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들을 주워 담아 한쪽으로 치우며 배동주가 말했다.
셔츠나 바지는 그렇다 쳐도 며칠 전에 갈아입었는지 모를 팬티까지 굴러다니는 걸 보니 평소 생활이 어땠는지 안 봐도 뻔했다.
“환기라도 시킬까요?”
별로 말이 없는 혁권의 모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배동주가 벌떡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미처 어질러진 집 안을 치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는 양 배동주가 혼자 분주하게 움직일 무렵, 혁권은 정장 상의를 벗으면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들만 모여 살던 집답게 약간은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빈말로라도 그리 깨끗하다고는 말 못 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법 번듯한 소파와 텔레비전이 있으니 나름대로 구색을 갖춰 놓긴 했다.
아마 세탁과 청소만 제때 해서 정리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터였다.
다행히 배동주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성격은 아닌지 오래되어 빛바래긴 했어도 딱히 더러운 구석은 없는 벽지를 눈으로 훑던 혁권은 손등으로 살짝 두드려 보고 쿵쿵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 혹시 소음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옛날 건물이어서 좋은 점은 벽이 두껍다는 것 하나뿐이거든요.”
“그런가?”
“예. 바로 위층에 애 둘을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쿵쿵 뛰어다녀도 소리 하나 안 나더라니까요. 한국 같았으면 바로 고함 지르고 싸웠을 텐데 말이죠.”
“사원 숙소라 가족들이 함께 사는 경우도 있나 보군.”
“예전에는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들 따로 집 얻어서 나가고 이 아파트에 남아 있는 건 저 같은 독신들뿐입니다. 아무래도 가족이 살기엔 너무 좁으니까요.”
“그렇군.”
“그건 그렇고 쓰실 방 말입니다. 일단 이불 시트나 베개 같은 건 다 세탁소에 맡겨서 갈아 놓긴 했는데…….”
혹시나 마음에 안 든다며 바꿔 달라면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배동주가 말끝을 흐렸다.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군.”
“아뇨, 당연한 일인데요.”
그러면서 배동주가 보여 준 방은 생각 외로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침대에서는 금방 세탁한 이불 특유의 뽀송한 냄새가 났고, 옆에 붙어 있는 작은 협탁과 일인용 책상 또한 크게 흠잡을 것 없이 깨끗했다.
그 외에 다른 가구라곤 옷장 정도밖에 없어 좋게 말하면 단출하다 할 법한 기본 구성이었으나 혁권에겐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좋군. 마음에 들어.”
“정말이십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배동주가 반색하며 기뻐하는 티를 내자 줄곧 말없이 무뚝뚝하게 있던 혁권의 입에서도 피식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수로라도 방 바꿔 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 않아도 돼.”
“하하.”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배동주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피곤하실 텐데 쉬십시오.”
“음. 자네도 나 때문에 하루 종일 수고했어.”
배동주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가자 혁권은 여행 가방을 침대 아래에 내던지곤 풀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체중을 싣자 침대가 작게 흔들리면서 삐걱 소리가 났다.
누운 자세 그래도 손을 들어 창문을 여니 어느새 노을이 내려앉고 있어 서쪽 하늘은 완전히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세한 먼지 입자가 떠다니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다 이윽고 눈을 감자 자연스럽게 찾아온 수마에 혁권은 그대로 몸을 내맡겼다.
다음 날부터 혁권은 사무실에 출근해 업무 파악을 했다.
사실 주어진 업무가 딱히 없어 인수인계를 할 것도 없었다.
지사장의 지시를 받은 김윤구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자료 정리 같은 허드렛일을 맡겼다.
그런 것도 꼭 필요한 업무이기는 했지만 대리 직급을 달고 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를 밀어내는 거였다.
보통 이러면 자과감이 들거나 초조해지기 마련이었지만 혁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넉넉해진 여유 시간에 만족해하면서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했다.
오전동안 할 일 없이 시간만 때우던 혁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참 더운 때라 그런지 오래돼서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물탱크만 덜렁 있을 뿐 넓은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혁권은 난간에 한쪽 팔을 올리고 서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며 혁권은 위성 전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룩.
위성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특유의 연결 음이 들리며 신호가 갔다.
얼마 있지 않아 자말이 전화를 받았다.
-보스.
“별일 없지?”
-네. 카이로에 도착하신 겁니까?
“그래.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많아서 연락이 늦었어.”
-그러시겠지요. 아 참. 그리고 전해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말해 봐.”
-알리탈리아 항공이 어제부로 트리폴리를 오가는 여객기 운항을 중단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짧게 혀를 차며 그는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댔다.
한 달 전부터 몇 번이나 반군의 대공미사일 공격이 있었던 데다가 급기야 공항 부근에서 정부군과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등 극도로 긴장감이 높아졌다.
트리폴리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항공 노선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리비아 정부가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테러 위협을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운항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반군의 의도대로 리비아 정부의 입지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생필품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질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물가가 크게 폭등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높은 물가에 리비아 국민들은 생활이 힘들어지겠지만 혁권에게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위성 전화기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가장 많이 오른 품목을 조사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예.
트리폴리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그는 통화를 끝냈다.
기다란 위성 전화기 안테나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혁권은 어느새 필터 앞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구둣발로 담배를 비벼 끄면서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한테는 기회였지만 갈수록 리비아 상황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트리폴리를 어떻게 왔다 갔다 해야 될지 고민이 됐다.
띄엄띄엄 운항이 됐어도 그나마 있던 정기 항공 노선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육로나 해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그것도 마땅치가 않았다.
바닷길 역시 내전이 격화되면서 진즉에 끊어져 버린 상태였고 육로는 가장 가까운 튀니지 국경을 넘어간다고 해도 반군과 무장 강도 들이 활개 치는 사막을 몇 시간이나 가야 했기에 쉽지가 않았다.
한두 번은 몰라도 앞으로 사업을 진행시켜 나가려면 수시로 트리폴리를 다녀야 되는데 그때마다 육로를 이용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고 위험했다.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서 전화로 모든 걸 처리할 수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트리폴로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빨리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쉬운 것이 없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걸음을 옮겨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 지시한 대로 자말이 최근 가장 크게 오른 물품 목록을 메일로 보내왔다.
혁권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노트북에 열어 놓은 메일을 진지한 얼굴로 쳐다봤다.
“밀가루와 휘발유라…….”
리비아인들의 주식이 빵인 만큼 평상시에도 밀가루 소비는 어마어마했다.
가다피 정권 때만 해도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밀가루를 공급했었기에 한화로 1천 원 정도면 빵을 30개 넘게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붕괴되고 바로 지루한 내전 상태가 이어지면서 가장 많이 오른 것이 바로 밀가루 가격이었다.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진 밀가루 가격은 가뜩이나 생활이 어려운 리비아 국민들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키웠다.
휘발유 가격의 상승은 리비아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산유국이라는 걸 생각할 때 더욱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수십만 배럴을 퍼 올릴 정도로 많은 원유가 생산됐지만 이걸 가공할 정제 시설들이 대부분 반군이 장악한 벵가지 일대에 몰려 있었기에 필요한 연료를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됐다.
내전 때문에 운송비가 폭등한 데다 휘발유 역시 가다피 정권 시절 지원하던 보조금이 사라져 버렸기에 비싸게 주고 사야만 했다.
어찌 됐건 현재 이 두 품목이 트리폴리에 가져가면 가장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문제가 있었다.
트리폴리까지 운송해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제일 확실하고 쉬운 건 배로 가는 건데…….”
그가 손에 든 볼펜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혼잣말을 할 때 배동주가 앞으로 다가왔다.
“뭐 하고 계십니까?”
“응.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혁권은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덮었다.
“이것 좀 드십시오.”
“어. 고마워.”
커피를 내려놓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컵을 집어 들었다.
첫날 이후 의도적으로 그를 꺼리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함께 아파트를 쓰는 룸메이트라서 그런지 배동주는 이렇게 가끔씩 말을 붙이곤 했다.
“맛이 괜찮은데.”
“하하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믹스 커피 하나는 잘 타지 않습니까.”
너스레 떠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던 혁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참.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트리폴리 항구에 내려진 입출항 금지령이 아직 안 풀렸지?”
그의 물음에 배동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확실히는 몰라도 아마 그럴걸요. 변변한 해군도 없는 리비아 정부가 기뢰를 금방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가다피 정권을 압박하기 위한 서방 연합군의 폭격에 부두 시설이 크게 파괴되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최소한의 항구 기능을 살아 있었다.
덕분에 충분하지는 않아도 화물선들이 들어와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줬었다.
그러던 것이 몇 주 전 주와라Zuwarah에서 몰래 반군이 판매한 원유를 싣고 가던 러시아 유조선을 리비아 정부군이 나포해 가자 보복으로 기뢰機雷 수십 개를 트리폴리 항구 외곽에 풀어 버리면서 바닷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주와라 해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구식 기뢰를 목선에 싣고 몰래 야밤에 들어와 빠뜨린 거였지만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바로 다음 날 기뢰가 깔린 걸 모르고 항구를 빠져나오던 화물선 한 척이 순식간에 두 쪽이 나서 침몰해 버렸다.
부랴부랴 조사에 나선 리비아 정부는 또다시 소형 경비함이 격침되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장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에서 트리폴리 항에 대한 입출항을 금지했고 리비아 정부는 기뢰를 설치한 반군에 대해 강한 비난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항구 외곽에 깔린 기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고 주와라를 비롯해 튀니지와 인접한 국경 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반군 세력인 ADDI는 정부의 비난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