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50
450
“보스, 잠시 드릴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든 혁권은 턱으로 비어 있는 소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거기 앉아.”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백성균이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종일 앞에 내려놨다.
“김성균 사장을 감시하는 애들이 보내온 사진인데 흥미로운 것이 찍혀서 가져왔습니다.”
“그래?”
스마트폰을 집어 든 혁권은 액정에 띄워져 있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확대해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사람은…….”
“여당 사무총장인 천대업 의원입니다.”
“김성균이 오늘 이자를 만났다는 거야?”
혁권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서 묻자 백성균이 머리를 끄덕였다.
“호텔 일식당 별실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흐음. 여당 실세와 건설 업체 사장의 만남이라…… 확실히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군.”
“천대업 의원 뒤에 선 비서관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그렇군.”
“호텔 일식당으로 들어갈 때 김성균 사장의 심복인 고동욱 비서실장이 들고 있던 거라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린 혁권은 눈을 번뜩이며 백성균을 쳐다봤다.
“뒷돈을 건넸다 이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이 가방 안에 서류가 들어 있을 리는 없겠지.”
뒤로 몸을 기댄 혁권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을 하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면서 입을 뗐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태일 건설하고 천대업 의원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는 건지 자세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뒤를 캐는 것이 발각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까 각별히 조심하는 걸 잊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한 백성균은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을 챙겨 들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혁권은 소파에 앉은 채 상황을 천천히 되새겨 봤다.
정말로 천대업 의원과 뭔가 거래가 있는 거라면 여당 실세하고 연결된 만큼 상당히 큰 건일 가능성이 컸다.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걸.”
삐삐삐삐-.
조용하던 방 안에 돌연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
하얀 이불 틈 사이로 까만 머리통이 움찔하더니 이내 짜증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소현이 이불을 더욱 둘둘 말았다.
“으으~.”
손만 뻗어서 알람을 끄면 되는데 잠이 덜 깬 아침엔 그런 간단한 동작조차 무척 힘겨운 법이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 알람 소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소현은 결국 자기가 못 견딜 지경이 되고 나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내 스마트폰…… 아, 진짜 어디 있는 거야.”
안경을 찾는 사람 마냥 침대 머리맡을 더듬거리던 소현이 마침내 자기 스마트폰을 발견하고는 그때까지도 징글징글하게 울려 대던 알람을 겨우 꺼 버리고 다시 이불 위로 던져 버렸다.
양팔을 옆으로 활짝 벌린 채 벌렁 드러누우니 침대 매트리스가 가볍게 출렁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는 편해야 된다며 매트리스와 베개를 5성급 호텔에서나 볼 수 있는 비싼 걸로 장만했더니, 이건 거의 마약이나 다름없을 정도다.
최고로 편안한 침대 덕에 그간 불면증이란 단어하고는 인연이 없던 소현이었지만, 어젯밤에는 유독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오늘 몸 컨디션 또한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하아. ……일하러 나가기 싫다.”
소현은 햇볕에 바싹 말려 보드라운 냄새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투정을 부렸다.
비록 아무도 들을 이는 없으나 이렇게 입 밖에 내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서 죽을지도 몰랐다.
‘오늘 촬영장에 가면 손주아가 있겠지.’
또 어떤 식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연출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현은 벌떡 일어나 차가운 생수를 마시면서 울렁거리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 손주아도 연기는 처음이니까 주변 눈치를 좀 보긴 하겠지.’
여태까지는 모델 업계가 제 영역이니 기세등등하게 다녔지만 방송국 쪽은 또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손주아라도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현장에서 처음부터 제 성격을 다 드러내진 않을 거다.
바보가 아니니까 적어도 그 정도 머리는 굴리겠지.
소현은 낙관적으로 생각하자며 자꾸만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까지 움츠리고 살 거야. 정신 차려, 정소현.”
이번 드라마 촬영을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는 거야.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계속 눌려서 사는 건 역시 성미에 안 맞는다.
어릴 때 모델을 목표로 삼은 이후로 끈질기게 노력해서 진짜 프로가 된 것처럼, 소현은 은근히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다.
하긴 그 정도 근성이 없었다면 손주아가 그렇게 괴롭혀 대는데 여태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다.
소현은 샤워를 하고 화장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손주아와 당당하게 맞서기 위해선 누구보다 돋보일 필요가 있었다.
소현은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는 의미로 야심차게 크림 뚜껑을 열었다.
이 화장품으로 말하자면 고작해야 30미리밖에 안 되는 주제에 가격은 40만 원이 넘는 비장의 한 수인 것이다.
비싼 만큼 효과는 뛰어나서 특히 예뻐 보이고 싶은 날만 가끔씩 쓰는 제품인데, 드디어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 셈이었다.
소현은 크림을 목까지 듬뿍 바른 후 천천히 림프 마사지를 하면서 피부를 다듬었다.
정확히 15분 뒤에 다시 세수를 하고 나왔을 때는 마치 막 피부과에서 관리를 하고 나온 것처럼 뽀얀 광채가 얼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흠. 역시 피부는 돈을 투자해야 산다니까.”
피부는 돈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되새기면서 소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을 때 타이밍이라도 맞춘 건지 스마트폰이 드드득 진동했다.
“네, 여보세요.”
-소현 씨, 저 지금 밑에 도착했는데. 준비하고 나오려면 얼마나 걸려요?
“금방 내려갈게요.”
소현은 간단하게 지갑과 스마트폰만 미니 백에 챙기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탔다.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셨네…… 어?”
운전석에 있다가 문을 열고 나온 매니저가 소현을 보고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제 푹 잔 모양이에요. 피부에서 아주 빛이 나네.”
“그래요?”
“카메라 감독님이 화면발 잘 받는다고 좋아하겠는 걸요.”
매니저가 웃으면서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소현이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앉았다.
도중에 태워 갈 모양인지 항상 함께 다니는 코디도 없이 그녀 혼자뿐이라 편하게 다리를 쭉 뻗고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 소현은 버릇처럼 대본을 무릎에 올리고 펼쳤다.
오늘 촬영할 분량은 손주아와 소현이 처음으로 얼굴을 맞부딪히는 신이었다.
“역시…….”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오길 잘했어.’
소현이 대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자 매니저가 무슨 일 있냐며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이더니 또 표정이 왜 그래요?”
“제 얼굴이 이상해요?”
“싸우러 가는 사람 같은데요.”
그렇게 티가 났나.
소현은 머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가운데 그녀를 태운 밴은 빠르게 도로를 내달려 방송국으로 향했다.
“지난번에 말한 건 다 처리했나?”
김성균이 묻자 왼편 소파에 앉아 있던 고동욱 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예. 오늘부터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아서 잘 챙겨 주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재무이사인 구민재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어서 와. 은행에서 연락이 왔나?”
“네. 방금 PF 대출 1차분 5천억 원이 법인 계좌로 입금됐습니다.”
“그러면 일단 토지 매입 대금은 전부 해결됐군.”
“그렇습니다.”
천대업 의원한테 뇌물을 주고 부탁한 일이 바로 용산 드림 타워 프로젝트에 필요한 PF 대출을 알선해 달라는 거였다.
초대형 건축 사업인 만큼 PF 대출 금액도 엄청났는데, 무려 5조 원에 달했다.
아무리 부동산 사업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고 해도 액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은행들이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당 실세인 천대업 의원이 나서자 거짓말처럼 금방 일이 해결되어 버렸다.
“천 의원 힘이 확실히 센 모양이군.”
구민재 이사가 얼른 말을 거들었다.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이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기획 제정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니, 더욱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긴.”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 사장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는 고동욱 실장을 보며 말했다.
“건축 승인도 조만간 나올 거라고 했지?”
“다음 주에 공청회를 통과하면 바로 승인을 내주기로 이야기가 다 끝났습니다.”
“착공이 늦어지면 그만큼 손해를 봐야 되니까 차질이 없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머지 PF 대출은 언제 들어오기로 되어 있지?”
시선을 받은 구민재 이사가 대답했다.
“건축 승인을 받으면 절반이 입금되고, 나머지는 공정률이 50%를 넘겼을 때 받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금 운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군.”
사업을 진행하는 데 제일 중요한 자금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인지 김성균 사장의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대출 진행이 매끄럽도록 은행 관계자들한테 미리미리 기름칠을 해 놔.”
“안 그래도 오늘 자리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 많으니까 아끼지 말고 넉넉하게 집어 주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 사장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용산 드림 타워 프로젝트만 성공리에 마무리를 짓는다면, 얼마 전에 있었던 리비아 채권을 헐값에 팔아 손해를 봤던 일 정도는 깔끔하게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더불어서 그룹의 후계 구도 역시 동생들을 제치고 확실히 자리를 굳힐 수 있을 터였다.
“실장님.”
한창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던 정빛나 실장이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들자 여직원이 한쪽 손에 수화기를 든 채 말했다.
“사장실로 올라오시라는데요.”
“지금 말이야?”
“예. 바로 오시래요.”
일하고 있는데 중간에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했지만 사장의 호출이라고 하자 정빛나 실장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정식 오픈을 하지는 않았지만 리모델링 공사가 다 끝난 강남 매장에는 디자인실을 비롯해 각 부서들이 모두 입주해 있었다.
혁권도 며칠 전부터 안양에서 이쪽으로 사장실을 옮겨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여비서가 그녀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머리를 끄덕인 정빛나 실장은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습니까?”
하킴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혁권이 그녀를 보곤 웃으면서 말했다.
“바쁜데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무슨 일이시죠?”
“일단 그리로 앉게.”
정빛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차 한잔하겠나?”
“괜찮습니다.”
성격대로 딱 부러진 대답에 그 역시 두 번 권하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정 실장을 오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말했던 다이아몬드 때문이야.”
그러면서 혁권이 턱으로 탁자에 올려 둔 상자를 가리키자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정빛나 실장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