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58
458
“이 시간에 누구야……?”
툴툴거리면서 소현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며 스마트폰을 한쪽 귀에 가져다 댔다.
“혁권 씨.”
-하하하. 목소리 들으니까 내 전화 많이 기다렸나 본데.
“아니거든요?”
혁권에게 보일 리도 없는데 소현이 입을 삐죽였다.
-지금 어디야?
“집 앞요.”
그러면서 소현이 내 말 좀 들어 보라며 우는 소리를 했다.
“세상에, 촬영이 이제 겨우 끝났다니까요. 말이 돼요? 게다가 내일은 또 일찍 일어나야 되고…….”
-그래. 안 그래도 많이 피곤해 보인다.
“어?”
오피스텔 안으로 막 들어가려던 소현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예요? 설마 어디서 나 보고 있는 건 아니죠?”
-그 설마가 맞는데.
대답과 함께 혁권이 반대편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엔 당연하다는 듯이 두 사람 분의 커피가 들려 있었다.
“혁권 씨!”
반가운 얼굴로 달려온 소현은 그대로 혁권의 품에 안겼다.
“피곤하다고 그러더니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은데.”
“칫. 반가워서 그러죠.”
입술을 살짝 삐죽인 소현은 몸을 바로 하면서 물었다.
“오늘 돌아온 거예요?”
“입국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지.”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보면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나 주려고 사 왔어요?”
“당연하지. 네가 좋아하는 돌체 라떼야.”
“헤헷.”
소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달콤한 우유와 짙은 커피 향이 섞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샷 2개, 연유랑 우유 많이, 얼음은 적게. 맞지?”
“잘 기억하고 있네요.”
소현은 맨 아래에 깔린 연유를 빨대로 쪽 빨아들인 다음 으음, 하면서 기쁜 듯 웃었다.
“안 그래도 달달한 게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지친 몸에 당분이 들어가니 금방 활력이 솟았다.
빨대로 얼음 조각들을 휘저으면서 맛있게 마시는 소현의 모습에 혁권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아해 주니 일부러 사다 준 보람이 있네.”
“더운데 어서 집에 들어가요.”
“그래도 되겠어?”
한쪽 손에 테이크아웃 컵을 든 채 새침한 얼굴로 소현이 말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착하게 굴어서 오늘 하루만 허락해 줄게요.”
“아. 예. 알았습니다, 공주님.”
“호호호!”
팔짱을 낀 소현과 함께 혁권은 오피스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도로변에 세워진 승용차 안에서 몰래 숨어 촬영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찰칵! 찰칵!
연신 셔터를 누르던 사내는 두 사람이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카메라에 달려 있는 액정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살펴봤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망원렌즈를 장착한 데다 확대를 하자 혁권과 소현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두꺼비처럼 욕심이 많게 생긴 사내의 이름은 표현구로 3류 잡지 연예부 기자였다.
“흐흐흐. 아주 잘 찍혔는데. 늦은 시간에 남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여자 배우라…… 오랜만에 클릭 수 좀 올라가겠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차창 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똑똑똑.
고개를 들자 짙은 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외국인 사내가 표현구를 내려다보면서 서 있었는데 바로 혁권의 부하인 하킴이었다.
“뭡니까?”
겨우 대화만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차창을 살짝 내린 채 묻자 하킴이 미간을 좁히고는 제법 능숙한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내려.”
“…….”
눈치를 살피던 표현구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는 그대로 자동차 시동을 걸고 달아나려 했다.
부르르릉.
그 순간 언제 다가와 있었는지 백성균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힘껏 자동차 앞 유리창을 때렸다.
퍼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앞 유리창에 새하얀 금이 갔다.
거미줄처럼 넓게 퍼진 금이 시야를 온통 뒤덮는 것에 표현구가 헉 숨을 들이켜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운전석 차창을 박살 낸 하킴이 한 팔을 불쑥 집어넣어서는 잠금장치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내가 내리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하킴은 잔뜩 겁에 질린 표현구의 멱살을 잡아 승용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때마침 옆에 멈춰 선 밴에 표현구를 떠밀어 넣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당황한 표현구가 도움을 요청하듯 크게 소리를 치면서 반항했다.
“주둥아리를 다 찢어 놓기 전에 조용히 입 닥치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차갑게 끊어서 말하는 하킴의 목소리에 표현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래야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어떻게 할지는 네놈이 하기에 달렸어.”
핏기가 사라져 새하얗게 질린 표현구의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린 하킴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라미를 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시끄러워지니까, 어서 출발 해.”
이미 시동이 걸려 있는 상태였기에 밴은 오피스텔 앞을 출발해 곧장 속력을 내서 사라졌다.
우우웅.
진동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한 혁권이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소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웃는 얼굴로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으면서 혁권이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것보다 드라마를 보니까 갈수록 연기가 능숙해지던데, 이젠 완전히 배우라고 해도 되겠어.”
“자꾸 비행기 태울래요. 이러다 진짜 잘하는 줄 알겠네.”
“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거지.”
“됐어요. 오빠 입에서는 칭찬만 나오니까 안 믿을래.”
흥, 하면서 소현이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촬영장에 있는 다른 연기자들하고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다고요. 매일 옆에서 실력 차이를 느끼고 있으니까 그만해요.”
“흐음. 그래서 우울해?”
“아뇨.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기 수업하는 시간도 더 늘렸고…….”
“너무 무리 하진 마. 그러다 쓰러질라.”
“선생님이랑 똑같은 소릴 하네. 걱정 말아요, 다 상태 봐 가면서 하는 거니까.”
의욕에 불타는 소현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혁권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런, 너무 오래 있었군.”
“벌써 가게요?”
“소현이 너도 일찍 자야지. 요즘에 나보다 네가 더 바쁜 것 같은데 오래 붙잡고 있을 수야 없잖아.”
“아직 괜찮은데…….”
그래도 소현 역시 슬슬 잠이 오는 듯 작게 하품을 했다.
방금 커피를 마셨어도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온 데다 긴 대기 시간, 날카로운 촬영장의 분위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 있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나마 혁권이 앞에 있으니 잠시 동안 피곤을 잊을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였다.
소현은 일어서는 혁권을 따라 함께 오피스텔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복도까지 나왔다.
“더 나올 필요 없어.”
바로 근처에 차를 대 놨으니 나오지 말라는 혁권의 말에 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요.”
소현은 손을 흔들면서 혁권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지켜봤다.
그리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에 고개를 꾸벅이면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혁권은 미끄러지듯 다가와서 멈춰 선 차량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백성균을 보며 혁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몰래 찍는 놈이 있어서 잡아 놨습니다.”
“정체가 뭐야?”
“그것까지는 아직 확인을 못 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안양에 있는 창고로 데려갔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 직접 들어 봐야 되겠으니까. 그리로 가.”
“알겠습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었으나 누군가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혁권은 신경이 예민해졌다.
혁권이 안양에 위치한 예전 TC 인터내셔널 창고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회색 시멘트로 지어진 창고 건물 앞에는 경호 차량으로 쓰는 밴이 세워져 있었고, 하킴이 옆에 서 있다가 그를 보곤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어떻게 됐어?”
“조금 겁을 줬더니 다 술술 불더군요.”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니고?”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하는 놈이야?”
“알고 보니 기자였습니다.”
뜻밖의 말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기자라고?”
“그렇습니다. 스타 데일리라는 잡지에 속해 있다더군요.”
이야기를 하면서 표현구한테서 빼앗은 기자증을 하킴이 내밀었다.
“흐음.”
기자증을 확인한 혁권은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3류 잡지인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기자라는 신분이 걸렸다.
괜히 이번 일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이제 막 연기자로 데뷔한 소현한테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취재를 하려고 집 앞에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하킴이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소현 씨에 대해 안 좋은 기사를 쓰려고 계속 따라다닌 거라고 합니다.”
“뭐라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도도엔터테인먼트 사장의 사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라면…….”
“손주아가 속해 있는 회사입니다.”
옆에 있던 백성균이 말을 덧붙이자 혁권은 그때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릿속으로 깨끗이 정리가 됐다.
“이제 별짓을 다 하는군.”
“빼앗은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꽤 오랫동안 소현 씨 뒤를 쫓아다닌 것 같습니다.”
소현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적으로 행동이었다고 하자 혁권의 얼굴에서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창고에 있는 놈을 어떻게 할까요? 말씀만 하시면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불필요한 뒤탈이 없게 하려면 하킴의 말대로 깨끗이 처리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사진 몇 장을 찍었다고 목숨까지 빼앗는 건 너무 심한 조치였다.
무엇보다 소현의 주위에 더러운 피를 묻히는 것이 꺼려졌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다 빼앗았겠지?”
“예.”
“어차피 피라미에 불과한 놈이니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쭐을 내 준 뒤에 풀어 줘.”
“알겠습니다.”
혁권의 지시에 군말 없이 하킴이 머리를 숙였다.
차가운 눈빛으로 표현구가 갇혀 있는 창고를 힐끗 쳐다본 그는 옆에 있는 백성균을 보며 말했다.
“기자 놈은 그렇다고 쳐도 도도엔터테인먼트 사장을 그냥 가만히 놔두면 또 이딴 더러운 술수를 부릴 테니까, 아무래도 손을 봐 줘야 되겠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런 놈들은 어설프게 건드려 놓으면 더 골치 아파지니까 확실하게 정리하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는 무겁게 굳어 있는 얼굴로 돌아섰다.
가능하면 소현이 하는 일에 개입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걸 참아 줄 만큼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특히나 괴롭히는 대상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더욱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